82화
현재 라이핀은 책상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편지의 첫 문장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구두를 신은 발로 황궁의 대리석 바닥을 규칙적으로 탁탁 친 라이핀은 깃털 펜을 바로 잡았다.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 영애에게.]
그는 먼저 수신인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사실 아직 델리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마음을 받아들이자 진실한 감정이 느껴졌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델리사를 사랑했던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이어서 그는 말라가는 입을 침으로 적시며 마저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분명 델리사는 한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먼저 다가와 그에게 한없이 사랑을 속삭이던 그녀였다.
“사람은 간사하니까.”
하지만… 리제아나가 사라진 직후, 매번 옆에서 그를 보필해왔던 그녀가 사라지자 델리사가 옆에 있음에도 옆자리가 텅 빈 기분이었다.
아무리 델리사가 다시 그를 찾아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건네도 허전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지.’
델리사는 아름다웠다. 모두가 사랑하는, 제국 제일 미인이라 소문난 여성이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물론 라이핀도 처음부터 리제아나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뚝뚝한 그녀의 모습에 질려 자신도 마음을 떼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멀어진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를 무렵 그녀는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의 부재는 큰 자리를 차지했다. 매번 라이핀의 뒤처리를 하던 그녀가 사라지니 라이핀은 그녀를 대체할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델리사에게 몇 개의 일을 맡기고자 했지만….
“폐하, 정말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 두꺼운 책을 어찌 읽으라고! 이러지 말고 저희 뱃놀이 나가시는 건 어때요? 제가 노래 불러드릴게요!”
매번 여러 핑계를 대며 넘어간 델리사였다. 그때마다 라이핀은 모른 척 넘어가 주었지만 그럴수록 리제아나의 부재는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이핀은 다시 눈앞의 편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더는 늦어지면 안 되었다. 적어도 오늘 안에 전해져야 할 편지였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델리사, 그대는 정말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는 그런 당신이 좋았어.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향한 마음이 진심인지 나조차도 모르겠군. 그러니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기 전에 끝내고 싶어.
우리의 사랑이 겉치레뿐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아버렸으니까.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편지로 주고받을 내용은 아니잖아. 대화할 시간을 가졌으면 해.
사흘 후 아침 9시, 우리의 오두막으로 홀로 와줬으면 좋겠어.
라이핀으로부터.]
편지를 완성하고 난 라이핀은 편지에 황가의 인장을 찍지 않고 개인적으로 따로 일라이자를 불러내었다.
황제라는 위치를 부각하고 싶지 않아 발신인에는 그저 ‘라이핀’으로만 적은 라이핀은 편지를 반으로 접어 편지지를 그에게 건넸다.
“어디로 붙일까요?”
“뭐?”
일라이자가 묻자 라이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 그러니까 크로덴느 백작에 붙이면 되겠죠. 네, 하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폐하.”
그의 매서운 반응에 일라이자가 어색한 미소로 뒷머리를 긁적이다 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가 집무실을 빠져나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일라이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런 일라이자의 행동에 라이핀은 어이없다는 듯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핀은 단단히 조이고 있던 크라바타를 거칠게 풀고 책상 위에 가볍게 던졌다.
“예?”
“네가 직접 가서 전해줘야지.”
“그렇지만 제가 지금 일이 밀려서-”
“그래서?”
“아, 아닙니다!”
일라이자 정리해야 할 보고서와 서류가 한가득 있었지만 라이핀의 살벌한 눈을 보자 그 걱정들은 저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황제의 갈색 눈은 인자해 보였지만 그가 화가 났을 때는 야생 곰같이 살벌했다.
일라이자로서는 곧바로 크로덴느 백작가로 달려가 델리사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금방 전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라이핀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일라이자는 한 수 빠르게 움직여 발걸음을 단번에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마차를 준비시켜 뒷문으로 빠져나간 그는 혹시 편지가 구겨질까 노심초사하며 백작저로 향했다.
문제는 어떻게 델리사에게 전달해주는 점이었다.
크로덴느 백작저를 ‘황제의 보좌관’답게 방문한다면 가문의 사용인을 불러 방문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의 편지를 은밀히 전해야 했다.
“어쩌지….”
영애에게 편지를 전할 방법이 통 떠오르지 않아 일라이자는 일단 먼저 마차를 백작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천천히 걷기를 선택했다.
“보좌관님?”
그때 그에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일라이자는 고개를 재빠르게 돌려 그를 알아본 사람을 찾기 위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시녀가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시녀는 일라이자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너는….”
일라이자는 최대한 그녀를 기억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샐리라고 합니다, 보좌관님.”
샐리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시선은 땅바닥을 향하게 다소곳이 서 있었다.
“혹 백작저의 하녀인가?”
이름을 듣고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보자 그제야 그녀가 델리사가 항상 데리고 나오던 시녀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여신께서 나를 도우시려는구나!’
직감적으로 일라이자는 이 시녀가 이 편지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누가 더 그들을 보기 전에 재빠르게 속삭였다.
“잠시 실례를.”
“네? 어머-”
일라이자는 순식간에 샐리의 손목을 잡고 백작저 담장을 빙 돌아 뒤쪽으로 달렸다.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보좌관님!”
샐리는 당황한 듯 조금 찬 숨을 몰아쉬며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혹시 델리사 영애가 저택에 계실까요?”
“델리사 아가씨요?”
그의 물음에 샐리는 잠시 시선을 허공으로 두며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뇨, 현재 저택에 없으십니다.”
“그럼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아니, 설령 안다고 해도 아가씨가 허락하시지 않는 이상 말해드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보좌관님.”
그녀의 눈을 자세히 바라보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라이자는 차오르는 초조함에 구두 끝을 땅에 짓누르며 이내 결론을 내렸다.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럼 이 편지를 델리사 영애께 꼭 전해주십시오. 폐하의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네. 절대 열어보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샐리 양.”
“안녕히 가세요, 보좌관님.”
일라이자는 한시름을 놓으며 재빠르게 샐리를 향해 신사적으로 인사를 취하고는 마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어쨌든 편지는 이제 제 손을 떠났고 그 책임은 샐리에게 일임되었으니 나머지의 일은 전적으로 그 시녀에 달려있었다.
“자, 어서 가지.”
마차에 올라탄 일라이자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창문을 열어 차가운 겨울바람을 쐬었다.
차가웠지만 홀가분한 건 사실이었다.
⚜ ⚜ ⚜
“…봐, 이봐, 일어나죠.”
리제아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거칠게 깨우는 힘에 천천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읍.”
추위와 배고픔에 신음조차 제대로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입이 손수건으로 막혀 있었다. 손과 발 역시 무언가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야가 돌아오자 이내 그녀는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마침내 알아볼 수 있었다.
만인의 사랑받는, 사랑스러운 모습의 백작가의 영애, 델리사가 아닌 악독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델리사를.
“와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리제아나가 깨어난 것을 눈치챈 델리사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네르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네르아는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불안하기만 했다.
“아 정말 오래 기다렸답니다, 언제 깨시는지 궁금했거든요.”
델리사는 그녀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깨어나실 동안 차도 한잔해봤죠.”
“읍읍.”
“그렇게 말씀하셔도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비 전하. 아니 이제는 그냥 당신을 리제아나라고 하대해도 되려나.”
자신의 아래에 묶여 있는 리제아나를 보며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짓던 델리사는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말도 못 하시는데, 그냥 내가 하는 말이나 듣죠.”
들고 있던 찻잔을 기울여 우아하게 마시더니 그녀는 휙 일어나서는 뜨거운 차를 리제아나를 향해 뿌렸다.
“!”
뜨거운 물이 닿자 리제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비틀었다. 화끈한 통증이 몸을 감쌌다. 다행스럽게도 빠르게 고개를 돌린 덕에 얼굴에 화상을 입진 않은 모양이었다. 입이 막힌 리제아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 이런. 차가 많이 식었나 보군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못했잖아.”
델리사는 한숨을 내쉬며 컵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리제아나 앞에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리제아나, 내가 재밌는 사실 한 가지 알려줄까? 어차피 죽을 텐데.”
“….”
차에 젖은 검은 머리칼과 보랏빛 눈에 맺힌 눈물을 바라보던 델리사는 이내 참지 못하고 커다랗게 웃다 속삭였다.
“이곳은 라이핀 폐하와 내가 너 몰래 사랑을 나누던 곳이란다.”
“!”
리제아나의 동공이 커졌다.
“푸핫. 그래. 이전에 라이핀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했던가. 네가 사랑했던 사람이 너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냈던 곳에서 홀로 죽으렴.”
델리사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 구겨진 드레스를 털며 말을 이었다.
“죽여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리제아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비참하게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