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17)

81화

“그거 들었어?”

“드디어 주군이 왔다는 소식?”

“정말 오랜만에 뵙게 되는군.”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가 뭘까.”

“…글쎄…. 무언가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들이 하나둘씩 이안이 영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주군을 만나기 위해 훈련복이 아닌 단정한 제복으로 갈아입으며 기사들은 머리를 모았다.

“정말 무슨 일일까?”

그러다 문득 한 기사가 옷을 입으며 웅얼거렸다.

“본래 영지로 잘 찾아오지도 않는 분이지 않은가.”

“곧 알 수 있겠지.”

“설령 모른다고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지 않은가.”

어느새 두 말을 짐과 함께 안전하게 두고 온 알렉스가 제 검은 머리를 털며 윗옷을 벗었다. 그는 깨끗한 회색 티셔츠를 입고는 핀잔했다.

“저하께서 하고자 하는 것에 의문 가지지 마라. 언제부터 우리가 그거 일일이 따졌나? 모두 저하께 은혜 입은 사람들이다. 우린 그저 저하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예!”

그제야 단장의 존재를 눈치챈 기사들이 각이 잡힌 자세로 경례를 취했다. 알렉스는 옷차림을 점검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급작스럽게 영지를 찾은 이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처럼 저하를 따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준비들 마쳤나. 모두 끝나면 나오도록 해라. 저하께서 기다리신다.”

더불어 언제 나타났는지 미카일이 그들을 재촉했고 영문도 모른 채 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모두 연무장에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이 서 있는 단장 아래로 세 명의 기사단장이 선두로 깔끔한 자세로 섰다. 그 뒤로 각 기사단의 일원들이 대열을 갖추었다.

기사들은 모두 존경 어린 시선으로 이안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선두에 선 알렉스는 신뢰와 선망으로 단단히 굳은 눈을 한 채 이안에게 경례했다.

“모두들 오랜만이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제복 차림이었던 그는 회색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의 단출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역시 그저 서 있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이 벌어지는 신체조건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두서없이 갑작스럽게 이렇게 소집해 미안하구나.”

이안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들의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모두 비밀에 부쳐야 한다.”

그의 말에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밀이라니, 대체 자신의 주군은 기사들을 모아 무엇을 벌일 생각인가.

‘그러고 보니 하르힌 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군.’

문득 알렉스는 항상 이안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하르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같이 말을 타고 와서 알렉스, 그에게 직접 말을 맡기고 함께 저택으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했는데 현재 이안은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알렉스는 하르힌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진 이안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정확히 한 달 후 프로디터들과 함께 황실에 반역을 일으킬 예정이다.”

“!”

“도망가려면 지금 도망가도 좋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이라니. 나라를 뒤집는 일이었다. 연무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에게 언제나 충성하는 이안의 모습을 보아온 기사들은 말을 잃었다.

황실의 앞잡이, 미친개, 전장귀 등등 이안을 일컫는 단어들과 함께 그의 행보를 지켜보았던 그들 아닌가.

‘목숨을 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일이다. 실패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이안은 혼란스러운 눈을 한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입매를 굳혔다.

“셋, 셋을 센다. 지금 아니면 도망갈 길은 없다.”

이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걸 수 없다면 차라리 도망가는 편이 나으리라.

언제나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를 지켜주며 신뢰와 정을 쌓아왔던 그들이었기에 이번 일에 대해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넘겨준 것이다.

‘레드포드는 갔을까…. 닉스는 겁이 많으니까 떠날 것이다. 알렉스와 진은 그래도 남아있어 주겠지.’

복잡한 생각을 마치고 이안은 숫자를 다 센 후 다시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진해서 떠나는 것이 어쩌면 일의 실체를 알고 두려워하다 배신당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

그리고 이내 눈을 감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정갈하고 깔끔한 기사단들의 자세와 형태가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떠나지 않습니다, 저하! 어째서 저희가 도망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희의 충성심을 가볍게 보지 말아주십시오!”

알렉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존명!”

“존명!”

알렉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주먹을 쥔 손을 가슴에 올리며 외쳤다.

“황가에 대항하여 반기를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나? 어쩌면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안의 말에도 알렉스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저희는 그저 저하를 따를 뿐입니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너희들….”

“저하.”

단상 아래에 서 있던 미카일 역시 조용히 이안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는 모두 저하의 사람입니다. 지옥까지 따라가겠습니다.”

그러곤 쓰고 있던 모노클을 벗어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정갈하게 빗은 회색 머리를 제 손으로 헝클어트리더니 불끈 주먹을 주고 이내 크게 외쳤다.

“저도! 저하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머저리들.”

이안은 피식 웃으며 자신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 기사단 단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자들과 함께라면 어쩌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지도 몰랐다. 이안의 가슴 안에 불꽃이 튀었다.

⚜ ⚜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었나?’

리제아나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뜨며 일어났다. 아무리 걷고 걸어도 어둠뿐이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그녀는 걷기를 포기했다.

‘델리사와 네르아가 이리 쉽게 나를 죽일 것 같진 않아.’

도발이 성공했던 건가.

리제아나는 제 손을 들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힘을 주어 있는 힘껏 세게 볼을 꼬집어 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몸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여긴.’

그리고 이내 이곳이 그녀의 의식 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그렇게 그들이 쉽게 날 죽일 리가 없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여자는 집요했다. 게다가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리제아나를 해치려 하지 않았나.

모든 것을 리제아나가 망쳤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 이대로 쉽게 리제아나를 죽게 둘 리 없었다.

‘난… 어디쯤에 있는 걸까?’

하지만 애써 침착해보려고 해도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두려웠다. 네르아와 델리사 앞에서 죽일 거면 빨리 죽이라고 외친 것도 불쑥 솟은 분노 때문이었다.

‘애초에 살아나갈 수 있는 선택지가 있긴 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비드로 무작정 납치당해 넘겨졌다. 그리고 크로덴느 백작저에서 두 손이 꽁꽁 묶여 두 여자에게 화풀이를 당했다.

그리고 다시 네르아에 의해 기절했던 것이 기억난다. 또 이번엔 어디로 옮겨지는 걸까.

‘그럼….’

덮쳐오는 위화감과 불안감이 한데 뒤엉켜 그녀를 거대한 파도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이안을 더 못 보는 걸까…. 그를 더는…?’

가슴이 아파 왔다.

텐젤의 생활은 이안 덕분에 아비드에 있을 때보다 지겨울 틈 하나 없었다. 항상 이안이 찾아와주어서,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 주어서, 어딜 가자고 먼저 손을 내밀어주어서, 그녀에게 강요가 아닌 부탁을 해주어서.

어느새 그녀의 삶에 하나하나 박혀 있던 것이었다. 새하얀 벽에 다양한 색깔을 칠해주듯 이안은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수확제도, 무도회도, 수련도 온전히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과 있어 본 적이 처음이라서 기뻤다.

친구도 사실상 위선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안이 어느 정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고맙다고… 전했던가.’

마지막까지 이안을 어떻게 대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던 그녀는 다시금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버렸다.

이안이 그녀에게 다가왔던 그때 저도 모르게 공작저에서 목을 조르던 그와 겹쳐 보였다.

결국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안도 결국 쓸쓸히 뒷모습을 남긴 채로 떠났다.

그는 분명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지만 그 이면으로 슬픔과 아쉬움이 섞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상대의 표정이나 말투에 예민한 리제아나로서 그런 감정 정도는 눈치채기 쉬웠다.

그녀의 행동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결국 붙잡을 수도 없었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라고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했네. 항상 그는 나를 ‘리제’라 불렀는데….’

후회되는 행동들이 떠오르자 감정의 파도는 깊어지고 점차 어둠 속으로 끝없이 침체하는 기분이 다시금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이안-’

소리 내서 그의 이름을 불러 보려고 해도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보고 싶어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안은 텐젤에 있었고 현재 그녀는 제대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안을 좋아하고 있다.’라는 마음이 얼마나 이제 와서 이기적인지 새삼 깨달았지만 이미 사람에게 한번 상처받은 그녀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배신당할지 몰라 그녀에게 앞으로 닥칠 불행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도박을 선택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안에게, 하르힌에게, 모든 사람에게 감히 마음을 열기가 두려웠다.

라이핀의 배신으로 사람들의 친절과 선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안에 대한 마음은 분명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 아직 정확히 무슨 정의를 가진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안을 향한 마음만은 사랑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 사람만 보면 간지럽고 두근거렸으니까.

‘그래도….’

감히 염치없게 그의 이름을 허공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나도 이안을 좋아했어요.’

저도 모르게 주책스럽게 눈에서 무엇인가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좋아하고 있어요. 매번 조건 없이 보여주던 그 웃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요. 내밀어주던 손을 먼저 다시 잡고 싶어요.’

마음을 한번 내려놓자 억눌러있던 진심들이 손쓸 틈 없이 흘러나왔다. 이제 멈출 수도 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도회에서 함께 춤추었을 때 정말 행복했었는데. 내가 쓰러졌을 때 온 힘을 다해 달려와 준 것도, 매번 다쳤을까 걱정해주었던 것도 고마웠어요.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또 한발 늦었던 모양이에요.’

털어놓고 나자 피곤이 몸을 휘감는 느낌이 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미안해요. 무사히 마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내 마지막 남은 바람에 달아둘게요.’

겨우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점멸했다. 어딘가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감정의 크기가 생각보다 무거웠던 모양이었다.

위태로운 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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