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17)

80화

아비드 황궁 안은 분주했다. 라이핀은 의회 소집을 주기적으로 진행하느라 바빴다.

“폐하.”

일라이자가 그가 좋아하는 초콜릿 마블 케이크를 대령하며 조용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라이핀을 불렀다.

“왜?”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시고 계십니까?”

“어떤…?”

“폐하께서 어딘가 변하셨다는 소문입니다.”

그는 조심스레 그의 주군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며 물었다.

“내가 변했다, 라….”

그러자 가만히 듣던 라이핀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보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는 안경을 벗어 올렸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그가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일라이자가 가지고 온 금빛 그릇에 담긴 포크를 손에 쥐어 케이크를 조각냈다. 그리고 그 조각을 입에 넣어 천천히 음미했다.

“사실 시간을 끌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내가 후회할 것도 같군.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

“?”

“이제 정리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

아리송한 말들에 문득 델리사가 생각났지만 일라이자는 짧게 맞장구쳐주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변화의 시간이 찾아온 거지.”

이윽고 라이핀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 ⚜ ⚜

“하르힌!”

이안이 거칠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서슬 퍼런 외침에 하르힌은 몸을 움츠렸다.

“저하, 네르아에게 그녀를 부탁한 것이 그리 큰 문제입니까?”

네르아가 마탑에 보이지 않게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하르힌은 왜 그녀가 더 마탑을 찾지 않는지 알지 못했다.

이안에게 물어도 그는 입을 다물고 더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

하르힌은 그저 이안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덧붙여 네르아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안의 화가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도리어 더욱 초조해하며 화를 내는 이안의 모습에 하르힌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네르아니까 위험하다는 거다!”

“…네르아는 저희와 16년을 함께 한 아이입니다. 도대체 저하야말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안은 계속해서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하르힌도 점점 참아왔던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뭐?”

항상 불만 없이 이안을 따르던 하르힌이 그런 말을 내뱉자 이안이 하르힌에게로 몸을 돌렸다.

“네르아도 저하께서도 제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헌데 어째서 제 탓만 하시는 겁니까?”

“하르힌….”

“저하께서는… 이상해지셨습니다. 그 여자 탓인가요?”

“하르힌!”

“….”

하르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제 그는 이안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나의 탓이다. 리제아나는 관계없어.”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르아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은 점에서 미안하다. 하지만 그녀와 친했던 너에게 네르아가 마탑에서 쫓겨났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어.”

“예?”

땅만 바라보고 있던 하르힌의 고개가 번쩍 위로 들어 올려졌다.

“네르아가… 왜 마탑에서 쫓겨나요? 도대체 왜요?”

“마탑에 들어오면서 했던 맹세, 기억하나?”

하르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한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함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마력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리라 맹세해야 했다.

만일 이를 어길 시, 이안이 마탑주의 권한으로 마력을 봉인하고 그 마법사는 마탑에서 쫓겨났다. 그가 다시 봉인을 풀지 않은 이상 마법사는 마법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상황을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잊고 있던 규율이었다.

“네르아는 그 규율을 어겼다.”

“네?”

“그녀는 자신의 재능으로 리제를 죽이려고 했었지. 무도회에서 리제아나가 쓰러진 이유가 그녀 때문이다.”

“….”

당시의 기억을 더듬던 하르힌은 희게 질렸다.

“설마.”

잊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안이 진심으로 당황해하는 표정을 보았으니까.

그의 제복이 구겨지고 기껏 올린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리제아나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그는 당황하며 무도회장을 뛰쳐나갔다.

곧바로 네르아에게 이 모든 상황을 전하려 했지만 그 이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그 이후였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하르힌이 어느 지점을 떠올리고 있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저하! 오랜만에 오셨군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어느샌가 다가온 데벤시아 공작가의 제1 기사단장 알렉스가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빠르게 뛰어왔다.

“그래, 부탁한다.”

“…돌아가실 겁니까?”

하르힌이 묵묵히 물었다. 그가 곧바로 돌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돌아간다고….”

이안이 고개를 내려 말을 한번 쳐다보고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알렉스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일단 들어가지.”

“들어가실 겁니까?”

“왜?”

“곧…바로 가실 기세였으니까요.”

그러자 이안은 숨을 한차례 무겁게 내뱉고는 어깨에 힘을 풀었다.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르힌.”

그가 천천히 입을 떼며 말에서 내려 알렉스에게 말꼬리를 쥐여주었다.

“이미 멀리 와버렸다.”

이안이 간단하게 결론을 마무리 지었다.

그의 말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하르힌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안은 침착했지만 또 잔혹했다. 그는 하르힌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들어가지.”

“….”

“알렉스, 하르힌의 말도 부탁해. 그대가 나올 줄 몰랐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군.”

조금 전까지 험악하게 인상을 짓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하르힌.”

그리곤 이안이 고개를 살포시 돌려 하르힌을 불렀다. 흩날리는 앞머리 사이로 반짝이는 눈은 타오르는 듯 붉었지만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려. 나머지 이야기들은 내 방에서 올라가서 하도록.”

“…네, 저하.”

이에 하르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숨김없이 대화해야 할 때였다.

⚜ ⚜ ⚜

데벤시아 영지에 있는 저택은 수도에 있는 저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게다가 영지의 성은 오직 군사 양성을 위해 지어 기사단들의 거처도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거처도 훌륭했지만 여러 건물 가운데 우뚝 선 저택은 위용이 넘쳤다. 금빛으로 도배된 외관은 단숨에 사람을 끌어당기기 충분했다.

성 내부 또한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성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2층에 위치해 있는 이안의 방은 그 분위기가 배로 더해졌다. 분명 가구들과 벽지, 불빛 모두 저택과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하. 돌아오셨습니까.”

알렉스가 두 말과 짐을 챙겨가고 이어서 영지의 집사인 미카일이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이 영지의 사용인들은 수도 저택의 사용인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안은 오히려 그편이 더 편했다. 무엇보다 사용인이 적어도 시종장인 미카일은 유능해 저택의 관리에 소홀하지 않았다.

“뭐라도 준비해드릴까요?”

미카일이 넌지시 이안과 하르힌 둘에게 물었다.

“저는-”

하르힌이 조용히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지만 이안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필요 없어. 미카일, 알렉스에게 기사단들 모집해서 훈련장으로 모이라고 전해줘. 최대한 빨리 가볼 테니까.”

“존명.”

미카일은 전직 기사단 소속이었다. 그는 정갈하고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는 경례 자세를 취하더니 금방 돌아서서 훈련장으로 향했다.

“하르힌.”

“예…옛!”

어느새 이안의 방으로 돌아온 하르힌이 쭈뼛거리며 불편하게 자리에 앉아 애써 침을 삼켰다.

“나는 그 일로 곧장 네르아의 마력을 봉인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나도 그녀의 행방을 모른다. 그녀는 곧바로 내 앞에서 사라졌거든."

“그, 그게 끝입니까?”

“그래.”

이안의 이야기는 짧게 끝났다. 그는 이야기를 마친 후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러니 이제 네 차례지.”

분위기가 다시 삭막해졌음을 느끼며 하르힌은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네르아는 지금 어딨지? 리제를 그녀에게 맡겼다고?”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애초에 이렇게 미리 말해주셨으면-!”

“말했으면?”

억울함에 북받쳐 두 주먹에 힘을 꽉 쥐고 있는 하르힌에게 이안이 불쑥 물었다.

“네가 네르아를 내칠 수는 있었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가 찾아왔을 때 나에게 보고하지 않은 거지?”

“….”

“그래서 네게 네르아에 대한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해 다 말할 수 없었다. 너는 네르아에게 너무 무르지 않나. 적어도 하르힌, 네가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

“실망이군.”

이안이 고압적으로 다리를 꼬며 권태로운 눈빛으로 창문을 응시했다.

“하르힌. 주군의 권한으로 명령하지.”

이윽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 하르힌에게 이안이 입을 열었다.

“마탑으로 돌아가. 프로디터들의 체포와 황제에 대한 일은 내가 지휘할 테니 리제아나를 보호해라.”

“저하!”

“너는.”

이안이 창문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당황스럽게 흔들리는 하르힌의 금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네르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까지 버려버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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