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17)

79화

‘언제나 먼저 선의를 베풀렴. 그럼, 사람들도 믿고 따라줄 테니까.’

생전에 사브릴은 리제아나에게 말했다. 리제아나는 아직까지 그녀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권력을 가져라. 세상 사람이 널 함부로 깔보지 못하게 힘으로 밀어 부딪히는 거야.’

하지만 펠로렌치아 공작은 선의와 인정보다 권력과 위계를 더 중요시했다. 그는 항상 다른 이들을 밟고 꼭대기로 올라서야 만족했다.

리제아나는 이 두 가지 가르침을 새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때때로 저도 모르게 필로렌치아 공작저 시절의 버릇이 나오곤 했다.

“왜?”

리제아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한 네르아와 델리사를 바라보며 그녀는 스스로 자조적으로 비웃었다.

“너희 이렇게 나를 끌고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

항상 남을 배려하고 걱정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히 헛된 희망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녀는 묵묵히 참아왔었다.

라이핀이 어떤 요구를 하든 그가 바라는 대로 했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어떤 비리를 가지고 오든 두 손으로 조용히 해치워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끔찍한 죽음과 배신.

“하, 하하.”

델리사가 헛웃음을 연거푸 내뱉었다. 리제아나가 스스로를 죽이라고 말할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왜? 두려워?”

리제아나가 다시 그들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나를 납치해서 일을 벌이고 나니 두려워진 거야? 모두 소용없는 짓인 걸 왜 모르는 거지?”

“닥쳐. 리제아나.”

분위기는 단번에 험악해졌다. 그녀의 행동에 분노가 터진 모양이었다.

네르아는 주먹을 꽉 쥐며 짧고 강력하게 대꾸했다.

“하. 겁쟁이들.”

“이게 진짜!”

“델리사 님.”

델리사가 다시 한번 손을 높이 쳐들자 이번에는 네르아가 막아섰다.

“제가 입을 다물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제아나의 시야가 점멸했다. 네르아가 단번에 손을 휘둘러 기절시킨 탓이었다.

힘없이 쓰러진 리제아나를 바라보던 두 여인은 다시 기절한 그녀를 응시하다 말없이 일어났다.

“이제 어쩔까요?”

네르아가 먼저 입을 열어 정적을 깼다.

“가장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싶어요.”

델리사가 짧게 답했다. 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분노의 깊이는 깊었다.

“제게 남은 광각초가 있습니다. 사용할까요?”

“광각초?”

처음 들어오는 풀의 이름에 델리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광각초를 모르시나요? 아차.”

네르아는 뒤늦게 입을 막아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정보는 델리사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말해. 너 또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고압적으로 팔짱을 끼며 델리사가 딱딱하게 질문을 던졌다.

“광각초는 사람을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마물의 힘을 얻게끔 하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풀입니다.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는 정보지만요.”

물러날 곳이 없었던 네르아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델리사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녀가 손뼉을 맞부딪히며 기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단숨에 쏙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고통스럽게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나.”

델리사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괴로웠던 것만큼 그녀는 고통스럽게 죽어야 해. 반드시.”

그녀의 금빛 눈은 분노에 물들어 탁한 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르아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리어 델리사의 그런 면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요?”

“흠….”

델리사가 리제아나를 거만하게 내려보더니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인지 알아?”

문득 델리사가 물었다.

“네?”

“사람은 말이야 곁에 아무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 죽을 때가 가장 비참하지.”

델리사가 애써 솜을 고르며 소파에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삶을 돌아보게 되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가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았을까 하고.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돼. 스스로의 실수를.”

“그 말은 즉….”

“그래. 리제아나 한때 황태자비셨던 분에게 그녀의 보잘것없는 삶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참혹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해줄 거야.”

“하지만 장소는요?”

“장소?”

막힘없이 술술 계획을 내뱉던 델리사의 표정이 다시 한차례 어두워졌다.

“계속해서 이곳에 놔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마법사들은, 아는 사람 없나?”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전 이곳 사람도 아닌걸요.”

델리사의 물음에 네르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때 델리사의 머릿속에 어느 한 장소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오지 않을 곳. 그녀와 상대 단 두 사람만이 아는 곳.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누구도 찾아가지 않는 곳.한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었던 비밀스러운 장소이나 지금은 참혹하게 버려진 곳이었다.

“내가 좋은 장소를 알지.”

델리사는 마음 한편에서 떠오르는 그 기억을 지르밟으며 중얼거렸다.

“그곳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이야.”

⚜ ⚜ ⚜

한편 이안은 하르힌과 말을 타고 영지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안의 영지는 텐젤 제국의 가장 외진 곳에 외치해 있었다.

그가 직접 택한 영지였다.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영지를 하사할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장 외진 곳을 골랐다.

그 바람에 하르힌의 불평을 일주일 동안 들어야 했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저하. 조금만 쉬었다 가심이….”

“앞으로 더 가면 곧 도착이다.”

“…옙.”

벌써 말을 타고 휴식도 취하지 않은 채로 여섯 시간이 훌쩍 넘은 상태였다.

엉덩이에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찬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서 있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안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안이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걸어 둔 덕에 산적들을 몇 번이나 피할 수 있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지만 피로는 더해져만 갔다.

“그런데 오늘따라 더 날씨가 추운 것 같습니다.”

“그렇군.”

보통 텐젤의 겨울은 때때로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추운 날들을 넘기면 다시 견딜만한 온도로 돌아오곤 했다.

“그거 기억나십니까, 저하?”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하르힌이 말을 붙여 왔다.

“무엇이?”

“설화 말입니다. 텐젤의 겨울이 다른 겨울보다 추우면 그 시기는 여신이 분노한 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신의 분노라니.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마.”

이안은 길을 재촉하느라 대화할 여유가 없는 듯했다.

그는 어서 일을 마치고 리제아나에게 돌아가고픈 마음뿐이었다. 마탑에 홀로 있을 그녀가 더욱이 마음에 걸렸다.

“아시지 않습니까.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사건들은 우연찮게도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던 날들이었죠.”

하르힌이 매서운 눈바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불길한 증조이기도 하고요.”

“….”

이안에게서 답이 없자 하르힌이 휙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하! 그분 생각하고 계시죠?”

하르힌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래.”

목에 감긴 붕대를 어루만지던 그는 점차 알 수 없는 불길함으로 초조해졌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했으니까요.”

“뭐? 부탁?”

하르힌의 말에 이안이 말을 멈춰 세우며 하르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거 사실 비밀이었는데 말이죠.”

“아는 사람 누구?”

“비밀….”

“당장 말해, 하르힌.”

“…저하. 그게….”

“하르힌. 마지막이다. 아는 사람이 누구지?”

이안이 하르힌의 턱을 잡으며 그가 눈을 피하지 못하게 하고 또박또박 정확하게 말을 이었다.

동시에 공기에 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날이 선 그의 분노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그것이.”

붉은 눈이 맹렬히 야수의 눈처럼 빛났다.

하르힌은 주제를 돌리고자 애썼지만 이미 들킨 이상 그에게 도망칠 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이안이라면 끝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하….”

이안과 네르아. 둘 중에서 누구의 손을 들 것인가.

하지만 고민은 비교적 쉽게 났다.

네르아와 많은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그의 주군이 이안이라는 것. 그들을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구해준 이는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것도 모두 이안의 덕이었다.

이안에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었다.

“어찌 제가 감히 주군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르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침내 이안의 손이 풀어졌다. 하르힌이 침착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사실 얼마 전에 저하 모르게 한 사람이 찾아왔었습니다.”

천천히 하르힌이 운을 떼었다.

“그리고 저하께 비밀을 해달라고 부탁했기에 말씀드리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사과는 필요 없다. 누군지 당장 말해라, 하르힌.”

히르힌이 진실을 털어놓을수록 마음속에 쌓여가는 조바심이 한층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네르아입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안은 처음으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리제아나가 위험하다.

“저하다! 저하가 오셨다!”

이안이 저도 모르게 투시 마법을 풀고 말 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영지를 지키고 있던 공작가 병사가 외쳤다.

“이안 공작 저하께서 도착하셨다!”

어느덧 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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