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돌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후….”
네르아는 아직 쓰러져 정신을 되찾지 못하는 리제아나를 등 뒤에 업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리제아나가 그렇게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했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네르아는 처음 텐젤에서 아비드를 넘어갈 때 썼던 통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델리사가 준 물건 덕에 네르아는 더욱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델리사의 연줄을 통해 투명 로브를 얻은 것이다.
네르아는 리제아나를 업은 채 로브를 썼다.
‘단 이틀. 빨리 가야 더 안전하다.’
네르아는 몸을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이. 거기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이제 지하에 있는 그 토끼굴을 지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한차례 중심을 잘못 잡아 삐끗하는 바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투명 로브는 겉모습을 감추어주는 데 손색없이 훌륭했지만 소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로브를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덤불 속으로 숨은 네르아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리제아나가 지금 깨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멍청아 또 잘못 들은 거 아냐?”
한 병사가 의하해 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다행히도 보초를 서는 병사들은 그다지 경계심이 높지 않았다.
“아니야 정말 발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그럴 시간에 술이나 더 훔쳐 오라고. 언제부터 그리 열심히 보초를 섰다고 그래.”
“쓰읍… 알, 알겠어.”
네르아가 숨어있는 덤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병사가 이내 몸을 돌렸다.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다른 병사들이 서 있던 곳으로 돌아간 병사는 주위를 휙휙 두어 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다른 병사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신나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멍청이들.”
그들의 어리석음 덕분에 네르아는 나머지 길을 서두를 수 있었다.
“정말 금방 왔잖아?”
이후부터는 수월했다. 토끼굴의 길을 따라가면 아비드의 국경선을 넘을 수 있었다. 토끼굴을 빠져나오자 익숙한 길이 나왔다.
익숙한 길을 걸어 단숨에 크로덴느 백작저의 뒷문으로 넘어간 네르아는 기다리고 있던 샐리의 안내를 받아 델리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델리사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헉…. 헉….”
네르아는 가삐 숨을 몰아쉬며 그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결국 잡아 왔구나?”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리제아나를 근처에 있던 소파로 내려놓으며 네르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자 델리사가 입을 가리며 감탄이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 드디어…!”
델리사는 리제아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무릎 위에 있던 베개를 옆으로 치워놓고 다리를 꼬았다.
“샐리, 네르아에게 물 한 잔 갖다주렴.”
“네.”
델리사는 부모님과 저택 사용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휴식이 필요하다며 방에만 머물렀다.
애초에 크로덴느 백작 부부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라이핀과 연인 사이가 되어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봐 주었다.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델리사가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그들은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귀족들이 사교계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전부 가짜라는 것을. 델리사는 어릴 때부터 알았던 것이었다.
델리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리제아나의 턱을 가볍게 쥐고 돌리며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대화는 할 수 있는 상태겠지?”
“그럴 겁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네?”
그녀의 의견을 물을 줄이야. 네르아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델리사가 비웃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긴. 그래도 네가 잡아 왔으니까 물어본 거란다.”
“저는….”
메마른 입술을 잘근 씹던 네르아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이 여자가 이안에게서 떨어지기 위해선, 아니 이안 앞으로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이 여자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면 네르아가 다시 이 같은 초조함을 느낄 일도 없을 터였다.
이미 그녀는 손에 피를 묻혔다. 지하 감옥에서 처음으로 광각초를 이용해 죄수를 죽인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멀리 와버렸다.
“윽-”
그때였다. 리제아나에게서 신음이 들려왔다.
네르아와 델리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다급하게 네르아가 델리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델리사는 황궁에서 문전박대당한 일로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라이핀이 이제 자신을 뒷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럼.”
델리사의 말에 네르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제아나의 입을 가로막고 있던 헝겊 천을 벗겨내었다.
두 사람이 가장 고대했던 순간이었다.
⚜ ⚜ ⚜
“….”
너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리제아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네르아가 갑작스레 하녀로 변장하여 들이닥쳤고 그녀를 기절시켰다.
그녀를 거칠게 흔드는 손길에 리제아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그녀는 손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꺼풀 사이로 들이치는 빛에 그녀는 잠시 눈살을 구기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내 곧 눈앞에 선 인물에 리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델리사가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껏 비웃음을 머금으며.
“황태자비 마마.”
눈을 껌뻑거리며 최대한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하는 리제아나를 보니 웃음을 찾을 수 없었다. 델리사가 살짝 입을 가리고 히죽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반년만이던가요?”
“델리사…?”
“드디어 그 소문의 비 전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게 무슨.”
“아비드 제국에서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힘을 쓰고 있었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폐하의 애정을 얻지 못해서 관심을 끌고자 벌인 일이었다면 성공이었습니다.”
미처 리제아나가 답할 새도 없이 델리사는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는 듯이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영애?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왜 영애가 이 여자랑…!”
“그건 비 전하께서 아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리제아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침착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어디 계셨나 했더니, 아비드를 떠나셨었더군요. 떠나신 김에 조용히 어딘가에 처박혀서 살지 왜 심기를 거슬리게 하십니까. 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아가씨.”
이번에는 델리사의 분노를 이어받은 네르아가 입을 열었다.
“왜 저하 옆에 계셔서 자꾸 그분을 혼란스럽게 만드시는 겁니까?”
“…하.”
네르아의 말에 리제아나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라이핀을 사랑한 델리사. 그리고 이안을 연모했던 네르아.
그들의 감정을 돌이켜보자 이내 리제아나는 그들이 자신을 이리 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화풀이를 하기 위해 나를 잡은 거라는 말씀들이군.”
리제아나의 헛웃음으로 경직된 공기의 흐름이 더 험악해졌다.
“화, 화풀이?”
델리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었다.
“아닌가요?”
되돌아온 리제아나의 답변은 흔들림이 없었다. 델리사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자 리제아나가 마저 입을 열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손수 짚어주지. 델리사 크로덴느 영애.”
처음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전개에 델리사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델리사의 입에서 또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리제아나가 먼저 가로채 갔다.
“애정이라, 하! 그래, 한때는 그의 애정을 바라던 때가 분명 있었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하?”
“겨우 그런 남자를 위해 나를 납치까지 한 건가?”
델리사의 삐져나오려는 비웃음을 틀어막은 리제아나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번엔 내가 버렸다. 그가 지독히도 혐오스러워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어. 하지만 그 기회를 잡지도 못하고 이렇게 여기 백작저에 있는 걸 보니 너도 별 수 없-”
리제아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분에 못이긴 델리사가 결국 손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손이 묶인 리제아나는 제대로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델리사 손의 반지가 뺨을 스쳤다. 반지가 스치고 지나간 곳에 상처가 났는지 피가 흘렀다. 뺨이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고통에 눈물까지 차올랐지만 그럴수록 리제아나는 더 악에 받쳤다.
“그리고.”
델리사의 손찌검에도 리제아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붉은 볼을 한 채 고개를 치켜올린 그녀의 두 눈에 지독한 독기가 서렸다.
“네르아 당신도 마찬가지야. 어째서 자신의 마음만을 위해 나를 해치려 들 수 있지? 그것이 정말 이안이 원할 거라 생각했어?”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정당화할 수 있어.”
잠자코 델리사와 리제아나의 대화를 듣던 이윽고 네르아가 힘을 주어 답했다.
“어떻게 말이지?”
“당신은 무려 텐젤의 비잖아! 텐젤의 여인이 이안 님 옆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이야기가 황제에게 전해진다면 이안 님이 곤란할 게 뻔하잖아?! 무엇보다 그 옆자리는 그를 잘 아는 사람만이 차지해야 해. 그러니까 당신 같은 건 그저 방해만 될 뿐이야.”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리제아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헝크러진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보랏빛 눈은 그날따라 더 섬뜩한 빛을 담고 있는 듯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옆자리라…. 정작 네르아 당신은 몇십 년의 세월을 살았는데도 그 벽을 허물지 못했지. 그를, 이안을 이름으로 부른 적은 있긴 해? 그 사람이 당신을 사교계 파트너로 데려간 적은 있어? 온실을 보여준 적은? 불꽃놀이를 보여준 적은?”
“그만해!”
“당신들이 하는 짓은 비겁하기 짝이 없어.”
“그만하라고!”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네르아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리제아나는 노기로 얼굴이 붉어진 두 여인을 올려다보며 낮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다른 이만 탓하는 꼴이라니.
적어도 그녀는 다른 이를 탓하기보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리제아나는 피식 비소를 흘렸다.
“너희들.”
리제아나가 운을 뗐다.
“언제까지 이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릴 셈이지? 그렇게 억울하면, 죽여. 너희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나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