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네르아는 어릴 적 자신의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버려졌기에 더러운 길바닥이 첫 번째 기억이었다.
겨울, 이맘때 즈음이었다.
길거리에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뿐이었다.
“으에에엥-”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울려 퍼졌다.
나이가 지긋한 한 여인 노숙자가 그녀를 거두어들였다.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네르아를 보살폈다.
그녀는 돈을 위해서라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식당의 잡일부터 시작해서 청소, 술집, 심부름일까지 그녀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네르아 또한 그녀를 위해 어린 나이에도 거리를 다니며 동냥하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해 푼돈을 모았다.
그 사람을 단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그 늙은 여인은 네르아에게 틈만 나면 그리 말했다. 네르아에게, 또 자신에게 말하듯.
“나는 그저 너를 가엾게 여겨 거두어들인 것뿐이야. 그러니 은인님이라 부르거라.”
늙은 여인은 길거리를 헤매는 처지지만 말투가 단정했다. 네르아는 제대로 먹지 못해 광대뼈가 튀어나온 여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나 배고파요.”
“쳇. 괜히 거두었나.”
여자는 쌀쌀맞은 말투와 달리 언제나 네르아를 우선으로 챙겼다.
그녀의 말이라면 최대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들어주려 노력했다.
가령 구걸을 해서 얻은 돈으로 사두었던 빵을 아껴두었다가 네르아가 배고픔에 배를 곯아 할 때면 무심하게 툭 던져주곤 했다.
네르아라는 이름 또한 늙은 여인이 붙여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마벨링.”
다른 노숙자들은 그녀를 ‘마벨링’이라 불렀다. 그래서 네르아도 곧장 그녀를 마벨링이라 불렀다.
하지만 마벨링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은인님이라 불러. 그렇게 안 부르면 도로 가져가 버린다?”
“아, 아 알겠어요. 은인님!”
네르아와 마벨링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돈독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즈음, 네르아는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병으로 앓아누웠다.
겨우 병상에서 일어난 네르아가 나아진 몸을 이끌고 일을 나갔다 돌아올 때였다.
이제는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뒷골목 안쪽으로 향하던 네르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은인님!”
고된 일을 마치고 수당을 얻은 돈으로 빵을 사가던 네르아의 눈앞에 마벨링이 쓰러져 있었다.
어렸던 그녀는 놀란 마음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단숨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마벨링!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네르아….”
온몸에 상처를 입은 마벨링은 힘겹게 네르아의 기척에 눈을 뜨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의료원… 의원에게 가야 하는데!”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웠니….”
“톰이 알려줬어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의원을 불러올게요!”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르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린 마벨링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너를 위한 약을 훔쳐서라도 얻으려다 그만….”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게다가 이것 봐요, 저 열이 많이 내려갔어요. 그런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요!”
네르아는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굳이 의원을 부를 필요는 없어. 늙었어, 난. 이대로 눈을 감아도 될 정도로 지친 것 같구나.”
“나는 어떻게 하라고, 마벨링! 나는…!”
“너는….”
마벨링이 고개를 돌려 겨우 눈을 뜨고선 입을 뗐다.
“잘 살아야지. 늙고 힘없는 사람일 뿐인데도 너를 거두어들여서 미안할 뿐이었단다.”
갖은 고생 탓에 처음 만났을 때보다 주름이 늘고 머리가 희끗해진 마벨링은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차가운 눈송이가 마벨링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네르아는 다시 한번 혼자가 되었다.
“윽…. 흑…. 아파…. 아파….”
심장 근처에서부터 참을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네르아는 차가워진 마벨링의 손을 붙잡은 채 그녀의 곁으로 툭 쓰러졌다.
어느새 눈이 쌓이고 있었다. 얼른 눈을 피해 따뜻한 곳을 찾아 일어나야 했지만 네르아는 그저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대로 마벨링을 따라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녀라면 왜 왔냐고 짜증을 내겠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받아줄 테니까.
네르아는 미동도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 곁에 심장을 움켜쥔 채로 웅크렸다.
“여기 맞아?”
그때였다.
노숙자들도 꺼리는 골목으로 웬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귀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분명 이 바닥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제가 들은 거로는요, 맞습니다. 저하.”
잇따라 또 다른 남자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조금 전 들려온 목소리보다 낮은 음성이었다.
“으악 저거 사람 맞는…거죠?”
그리고 그 낮은 목소리의 남자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소리도 이어져서 들렸다.
“호들갑 떨지 마라, 하르힌. 죽은 건가?”
‘하르힌’이라 불리는 남자아이와 다르게 저하라 불린 남자아이는 천천히 한 발짝 네르아에게 다가갔다.
“저하 조심하세요….”
“조심할 게 뭐가 있어. 너야말로 그 행동은 실례고 무례다. 거기, 살아 있는 건가?”
네르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 아이들은 누구지. 일어나야 하는 건가, 죽은 척해야 하는 건가. 이런 곳에 왜 찾아온 건가.
그러나 이 고민들이 모두 쓸데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이 몸에 힘이 없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고통으로 몸에 더욱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아…있는데….”
이대로라면 죽을 것이 너무나도 뻔했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벨링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녀의 마지막 말이 불현듯 머리에 스쳤다.
‘너는… 잘 살아야지.’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일어나 힘껏 소리 내었다.
“살아 있었네?”
하르힌이라는 남자아이가 놀라며 다가왔다.
“내가 조용히 좀 있으라 했지 하르힌. 벌써 마력 발현이 시작된 것 같네.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전에 데려가야 해. 너 움직일 수 있겠어?”
네르아는 붙들고 있던 마벨링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이안과 네르아의 첫 만남이었다.
하얀 눈송이 사이로 새하얀 머리카락과 함께 찬 바람에 붉게 달아오른 볼이 보였다. 오뚝한 코와 또래보다 큰 키. 흰 머리칼에 어울리는 붉은빛 눈동자.
네르아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못… 움직여요.”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네르아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웅크렸다.
“이런….”
이안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보았다.
“아프겠구나. 고통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줄게.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그 사람도 아픈 거니?”
“…죽었어요. 조금 전에. 내 약을 구하려다가 그만….”
차갑게 식은 마벨링의 손을 내려다보며 네르아가 중얼거렸다.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르힌.”
“네, 저하.”
그때 저하라 불린 남자아이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옆의 남자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에 서늘함이 더해졌다.
“분명 약품 파는 놈들이 패거리를 사용한 걸 거야. 조금 혼내주고 오도록 해. 이 여자아이는 내가 책임질게.”
“예?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소문만 들었을 뿐이잖아요!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시려고!”
“하르힌. 조용히 해. 이 아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나. 이 기운은 분명 마력이 틀림없어. 열이 났다고 했으니 분명 마력 발현이 시작된 거다. 하르힌, 어서 가도록 해.”
하르힌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한차례 숙인 다음 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안 렌디 데벤시아 라고 한다. 말은 아껴둬, 잠시만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다.”
스스로를 이안이라 소개한 그는 네르아에게 가까이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상냥한 손길에 네르아는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처음 보는 호화스러운 침대 위였다.
“일어났어?”
잠든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고통은 가라앉았지? 내가 마력으로 잠재웠으니까 괜찮을 거야.”
“…마력이라고요?”
“저하!”
그때 하르힌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해. 놀라잖아. 그래서 처리했어?”
“네!”
“그래, 수고했다. 하르힌. 이제 이 아이가 쉬어야 하니까 자리를 좀 비켜줄래.”
“저, 저하…!”
이안은 마법으로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그를 방 밖으로 단숨에 내보냈다.
“우…우와!”
처음 보는 마법에 네르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정히 말했다.
“너도 곧 쓸 수 있을 거야. 너에게도 마력이 있으니. 너와 함께 있던 노인 분은 잘 묻어주었어. 물론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도 다 처리했으니 이제 네가 걱정할 건 없을 거다.”
“제…제가 뭐라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네르아에게 이안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너는 앞으로 우리 마탑의 일원이 될 거다. 무척 강인해 보였어. 그 겨울바람 속에서 버티던 너의 모습이.”
“전 그냥 볼품없는 고아일 뿐인데요….”
마탑? 마법? 네르아가 듣기에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지만 이안이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재능이 있다. 그 마력의 기운이 그것을 증명하지. 설령 출신이 미천한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넌 분명 마법사로서 재능이 있어.”
“…!”
“얼른 나아서, 나와 함께 그 노인 분을 보러 가자.”
이안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 순간 네르아는 그녀가 사랑에 빠졌음을 직감았다. 그때부터 네르아는 다짐했다.
이 한 몸을 모두 바쳐서라도 이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그랬는데….’
밧줄에 묶인 채로 곤히 눈을 감고 있는 리제아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네르아가 회상을 마치고 일어났다.
이안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었다. 아직까지 그 각오는 마음 한편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은 이안을 위해서였다.
“전 저하를 도와주는 거예요.”
네르아가 뇌까렸다.
“저 여자는 저하한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이제 방해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