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제아나는 먼저 경계했다. 이안의 편지에 적힌 당부 때문이었다.
- 똑똑.
조금 더 큰 소리의 노크 소리가 마탑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리제아나가 마지못해 편지에서 눈을 떼고선 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쾅쾅쾅.
소리가 더 크게 변하자 리제아나는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구….”
마탑을 방문할 자는 없었다. 마탑은 사람의 손길이 더는 닿지 않은 탑처럼 황폐한 모습으로 홀로 서 있으니.
“누구세요?”
집무실 밖으로 리제아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떼 계단 아래로 한걸음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문 건너편에서 용케도 리제아나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가느다란 목소리는 그녀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리제아나는 문 앞에 서서 이안의 편지를 손에 쥔 채, 날이 선 목소리로 문 너머의 상대에게 되물었다.
“누구세요?”
“문부터 열어주시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말씀해주세요.”
리제아나의 단호한 요구가 이어지자 상대 쪽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저도 어쩔 수 없죠.”
상대는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하게 외쳤다.
“정식으로 먼저 제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데벤시아 공작 저하의 부름을 받고 온 데벤시아 가의 하녀입니다! 이제 문을 좀 열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하녀?”
데벤시아 공작의 가문 이름이 또렷하게 그녀의 귀에 꽂혀 들어왔다.
“데벤시아 가…? 정말이에요? 확실해요?”
리제아나가 의심스러움을 거두지 못하고 다시 묻자 문 너머의 상대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당연하죠. 급히 배정받은 하녀입니다. 사실은 하르힌 님께서 아가씨께 특별히 전해달라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문을 좀 열어주세요!”
하르힌이 전해주길 부탁한 것이 있다고? 리제아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어쩌면 그 전달해준다는 물건이 이안과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요?”
“그럼요. 물건을 옮기느라 조금 힘이 드네요. 문 좀 열어주시지 않겠어요. 아가씨?”
리제아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투박한 문고리 위로 손을 올렸다. 이안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알고 싶었다.
“…네, 잠시만요.”
리제아나는 이안의 편지를 잠시 접어 의자에 올려놓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보랏빛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하녀라 소개한 상대는 로브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로브 아래로 빙그레 웃고 있는 입꼬리만이 보였다.
그녀는 각 양쪽 팔에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간략한 짐을 담은 가방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떨떠름한 어조로 리제아나는 대답했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을까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온 상대는 마냥 반갑다는 듯 리제아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 걸음걸이가 어딘가 익숙해 리제아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상대를 마주 보았다.
“물건, 주세요. 하르힌이 전해달라고 한 물건이 무엇이죠?”
“어머, 아가씨. 그전에 먼저 아가씨께 차 한잔이라도 대접해드려도 될까요? 여긴 안도 춥군요. 따뜻한 차로 몸을 먼저 녹여드릴게요!”
“…차요?”
리제아나의 물음에 여자가 능글맞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모았다.
“무슨 차를 원하세요?”
“차라…. 글쎄요….”
“그럼 제가 아가씨의 입맛에 맞는 것으로 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
리제아나는 어색하게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가볍게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리제아나는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익숙하게 마탑 안을 가로지르는 하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리제아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정말 그녀 말대로 데벤시아 가의 하녀가 맞을까?
그녀가 이곳에 머무른 지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을 향해가고 있는데, 리제아나 외에 다른 사람을 이안이 마탑에 들여놓을 리 없었다.
또한 중요한 물건이라면 하르힌이 일개 하녀에게 전해달라 부탁할 리가 없지 않나. 마법을 쓰면 간단할텐데.
리제아나는 그녀에게 더 묻기로 했다.
“정말 하르힌에게 부탁받은 게 맞나요?”
잠시 망설인 리제아나가 목걸이를 꽉 쥐며 상대에게 재차 물었다.
“흐음, 이거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해볼까요? 우리?”
언제 차를 다 내렸는지 하녀가 두 개의 찻잔 위로 뜨거운 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리고 능숙하게 리제아나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나열했다.
리제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앞의 찻잔을 노려보았다.
“…고마워요.”
떨떠름하게 상대가 건네준 찻잔을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문득 로브 사이로 삐쭉 나온 주황색 머리가 눈에 띄었다.
‘…주황색 머리?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어두운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뿐이었는데…?’
공작저의 사용인 중에서 밝은색의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일개 하녀가…. 다른 사용인들이라면 감히 오지 못할 마탑에 와서 이렇게 익숙하게 부엌을 사용한다고?’
리제아나의 본능이 서둘러 그 자리에서 벗어나라 외치고 있었다.
“이봐요.”
리제아나는 차를 받으려던 자세를 풀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정체 모를 사람을 마탑 밖으로 내쫓아야 했다. 이 사람을 밖으로 내보낼 구실이 없을까.
“네 말씀하세요.”
“….”
하지만 갑자기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생각날 리 없었다. 리제아나가 최대한 머리를 굴리려고 할 때 이번에는 상대가 먼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둔하긴.”
상냥한 하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귀에 익은 목소리에 리제아나의 숨이 잠시나마 멎었다.
“…당신.”
“하하! 이제야 깨달은 거야?! 참으로 바보 같네!”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배를 감싸 쥐며 깔깔 웃어대던 상대는 고개를 젖혔다. 그 바람에 모습을 가리고 있던 로브의 모자가 벗겨졌다.
“정말 이런 사람을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건지.”
주황 머리칼에 날카롭게 째진 눈, 오밀조밀하게 모인 이목구비. 얄미운 미소를 짓는 네르아가 있었다.
“네…네르아…?”
리제아나는 말을 더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겨우 내뱉었다.
이전에 차에 광각초를 타 그녀를 해치려 했던 여자가 아닌가.
리제아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행방을 알 수 없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녀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와 내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아가씨?”
네르아는 자신의 정체가 밝혀졌음에도 계속해서 하녀 행세를 할 모양인지 말끝에 ‘아가씨’를 붙였다.
“당신…이군.”
리제아나는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며 이를 악다물며 말했다. 네르아는 현재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리제아나는 아니었다.
“도망치지 않는 거야? 아가씨, 이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기껏 차까지 끓여줬는데.”
반말과 존대를 섞어가며 네르아는 리제아나를 농락했다.
“차에, 설마 또!”
불현듯 이전의 사건을 떠올린 리제아나는 빤히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내 정체를 알아보다니, 이제 좀 상황이 보이나 보죠? 아쉽네요, 조용히 데려가려 그랬는데.”
“뭐라고요?”
“왜 못 들은 척하세요?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뭐겠어요? 제가 정말 하르힌의 부탁으로 왔을까요?”
“….”
여유롭게 미소 짓던 네르아의 얼굴이 이내 분노로 일그러졌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노기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당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한데 당신이 갑자기 무슨 수를 부렸는지 몰라도, 저하의 시선이 당신에게 향하기 시작했지. 그래, 그게 시작이었어.”
리제아나는 아무 말도 없이 네르아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네르아는 입을 열어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도회에서 그날 당신은 죽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그에게 들키지 않았을 거야. 또… 내가 마력을 잃는 일 또한 없었겠지.”
네르아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리제아나를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마력을… 잃었다고?”
“푸하하- 아가씨, 당황하면 말이 짧아지는 귀여운 반전이 있었네.”
“장난은 그만두지?”
리제아나의 날 선 모습에 네르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이안 님께 마력을 ‘봉인’ 당했지. 풀어주실지 말지는 전적으로 저하의 행동에 달렸지만.”
“…그런.”
“다 너 때문이야. 알아? 너만 없었더라면 모든 게 완벽했을 거야.”
갑작스럽게 네르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리제아나와 그녀 사이에 있는 식탁 위로 한 걸음 올라서서는 리제아나를 내려다보았다.
“다가오지 마.”
“그런다고 내가 여기서 멈출 거라고 착각을 하는 건 아니지?”
“오지 마!”
리제아나는 다급하게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네르아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리제아나가 일어나자마자 발로 복부를 거세게 찼다.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의자에 다시 부딪힌 리제아나는 신음도 내지 못한 채로 뒤로 넘어진 네르아에 의해 목이 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거친 손길에 결국 이안에게서 받았던 목걸이도 끊어졌다.
“아직 죽이지 않아요, 아가씨. 잠깐만 눈을 감았다 뜨는 것뿐이니까.”
버둥거리는 리제아나를 힘으로 간단히 제압하며 네르아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끝으로 리제아나의 시야가 완전히 검게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