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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117)

75화

이안과 리제아나가 마지막 새벽 훈련을 한 새벽, 하르힌 역시 깨어있었다.

그도 그 나름대로 찾아올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샤워를 말끔히 마친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울에 저 자신을 비추었다.

“흐흥-.”

오늘따라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그도 이안과 리제아나가 새벽 훈련을 나간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그 시간을 노려 방문객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과 리제아나가 연무장으로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온통 신경을 그쪽으로 쏟아붓고 있었던 터라, 하르힌은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제 방문을 열고 달려 나가 마탑의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시간을 정확히 맞췄군.”

“당연하지. 내가 매일 지각만 하는 줄 알아?”

시큰둥하게 맞받아친 방문객은 그에게 눈을 흘기며 콧방귀를 뀌었다.

“빨리 말해. 이 이른 새벽에 부른 이유가 도대체 뭐야?”

방문객은 마탑 안을 익숙하게 걸으며 응접실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곤해 죽겠다고. 빨리 말해. 편지로 써도 될 법도 한데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직접 와서 들으라는 건지 정말.”

“그게 말이야. 일단 차 한잔하면서 들을래?”

하르힌은 그 방문객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빙그레 웃었다.

“됐어. 난 계속 할 일이 많다고. 그러니까 빨리, 바로, 지금, 말해.”

하지만 방문객은 하르힌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 바람에 하르힌은 입을 삐쭉거렸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앙탈은 통하지 않았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뭐.”

하르힌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앉았다. 단정한 외모의 하르힌이 초록빛 머리칼을 쓸어올리니 보기에 싱그러웠다. 방문객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 떠나.”

“뭐?”

하르힌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방문객이 깜짝 놀랐다. 줄곧 보여주던 여유로운 모습을 잃고 방문객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나만 떠나는 게 아니라, 저하도 함께.”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똑바로 얘기해. 두서없이 결론만 말하지 말고.”

중요한 정보라는 것을 깨달은 방문객은 거만하게 꼬았던 다리를 진지하게 풀더니 눈썹을 한데 모으고 음성을 조금 낮추었다.

“자세히는 얘기 못 해. 중요한 일이라.”

하르힌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호흡을 내뱉었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게 됐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네가 저하를 보지 않는다고 얘기했지만 이번이 어쩌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뿐이야.”

“…알고 있었구나, 내가 저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면 바보지.”

하르힌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잠시만. 너랑 저하만?”

대화를 곱씹던 방문객이 멈칫하더니 이내 되물었다.

“응. 사실 널 부른 데에는 다른 이유가 또 있어.”

“뭐?”

그의 말에 방문객이 눈썹이 찡그렸다.

“다른 이유?”

“마탑에 남는 사람이 있어.”

하르힌의 문장에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슬며시 방문객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이라 …응.”

단어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하르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뭘 해주길 바라는데?”

“네가 하는 행동을 보니 이곳에서 여기 오래 있을 예정인 것 같은데.”

“그렇지?”

“할 일 없으면 가끔이나 마탑 관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봐줬으면 해.”

“웃기네. 어째서 나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겨?”

방문객은 어이없다는 듯이 마탑이 떠나가라 커다랗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방문객은 너무 웃은 탓에 흘린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하르힌을 가소롭게 보는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하르힌은 그런 방문객을 떨떠름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아, 아니야. 그래서 내가 가끔 그녀가 무사한지 봐달라는 이야기네.”

“응. 불편하지만 않으면.”

새벽녘의 어스름한 빛이 하르힌의 모습을 비췄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받고 반짝였다.

방문객은 하르힌이 안타까워 더 크게 웃음을 내뱉을 뻔했으나 입을 오므리는 것으로 애써 삼켜버렸다.

‘불쌍해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하르힌이 그저 가여울 따름이었다.

⚜ ⚜ ⚜

그녀는 이제 마탑에 혼자였다. 이안이 떠나가고 리제아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벌써 이안의 고백에 두 번이나 답하지 못했다.

“최악이다.”

리제아나는 허공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말 최악이구나 나. 사람의 진심을 두 번이나 쉽게 걷어차 버리다니.”

그녀는 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질끈 씹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이안의 눈빛이 아직까지 눈에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의 온기가 아직까지도 그녀와 함께하는 듯했다.

섬뜩한 그 붉은 눈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라서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편지를 보라고 했었지.”

그가 편지가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책상 위의 크기가 작아져 버린 보라색 곰 인형을 들어 올렸다.

곰 인형의 윗부분을 가위를 들어 조금 힘을 주어 뚫었다. 그리고 조금 두꺼운 실을 이용해 간이 목걸이를 만들었다.

목뒤로 목걸이 줄을 연결하는 것은 조금 힘이 드는 일이었나 어렵진 않았다.

리제아나는 구겨진 드레스 뒷자락을 탁탁 피고 일어나 조심스레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이안의 집무실이 어딘지 알고 있었으나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찾아갈 이유도 없었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 적응하는 것도 그녀에게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한 층을 걸어 올라간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안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책장에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의 고풍스러운 책상과 의자는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천천히 집무실 안의 거대한 탁상 앞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리제아나는 그가 남겨 두었다고 한 편지를 찾을 수 있었다.

[리제아나 디 필로렌치아, 그대에게.]

편지 봉투 위로 유려한 글씨체가 적혀져 있었다.

손을 뻗어 편지를 든 그녀는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뜯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편지를 꺼냈다.

글자가 빼곡히 적혀져 있는 편지였다. 그의 진심이 적힌 특별한 편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녕, 리제아나.

이 편지를 볼 때 즈음이면 나는 아마 영지를 내려간 후일 거다.

미리 언질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앞서지만, 이 결단 역시 갑작스럽게 내려진 터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에 양해를 구하고 싶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지난날부터 나는 그대의 몸짓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있었어.

공작저에 갔다 온 이후로 나는 그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앞서기 시작했지. 고백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으니까.

바로 답해달라는 건 아니야. 정말이야. 당신의 마음이 우선이잖아.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대가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돼주어서 정말 다행이야.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난 그저 당신을 나의 저주를 막을 도구로만 보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알고 있었을까, 그대는?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가 사랑스럽다는 거.

뭐든지 열심히 해내는 모습도, 책을 읽을 때 집중하는 눈썹까지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는 걸.

새벽 훈련에는 막 일어나 부은 눈이, 아침에는 샤워하고 나온 모습이, 점심에는 식사를 하는 모습이, 저녁에 노을을 받으며 책을 읽는 모습 하나하나, 모두.

축제에 함께 나갔을 때 불꽃놀이에 비친 그대와 무도회에서 함께 춤추던 모습까지도.

그래서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말해, 고마워 리제아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어깨가 되어주어서.

내가 없는 동안, 나는 그대에게 하나만 바라고 있어. 잘 지내고 있어 줘.

조금 욕심을 부리면 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를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정말 그대를 만나고 나서 욕심만 느는 것 같네.

마음의 속도가 맞지 않아도 돼. 속도가 같지 않다면 난 언제든 멈춰 서서 기다릴 자신 있으니까.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안 렌디 데벤시아.

추신. 곰 인형과 목걸이는 정말 잘 가지고 있어야 해. 몸 조심히 기다려줘. 마탑 안이라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

이안의 편지를 다 읽자 가슴이 뭉클해진 리제아나는 아직 그의 향기가 남아있는 편지를 손에서 아스러지지 않도록 조심히 들었다. 그녀는 그의 편지를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이안이 그동안 그녀에게 보여줬던 모든 행동이 머릿속을 스쳤다. 드디어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리제아나는 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받고 있던 것이다.

이런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리제아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분명 그녀는 이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안.”

나지막이 이안이 남겨둔 편지를 향해 그에 대한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쾅쾅쾅

그때 마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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