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음식이 식었을까 걱정했지만, 걱정도 무색하게 음식에서 아직 김이 나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리제아나는 저절로 침이 고여 입맛을 다셨다.
“배고프지?”
다정하게 웃는 이안에게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한발 빠르게 더 걸음을 내디뎌 의자를 빼주었다. 리제아나는 마다하지 않고 편안히 앉았다.
하얀 입김이 서렸다.
그들은 준비된 따뜻한 캐모마일차를 마시는 것으로 새벽 훈련으로 힘들었던 몸을 노곤히 풀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식기를 들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리제아나가 활기차게 외치자 이안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내 고개를 돌려 나지막이 따라 했다.
“잘 먹겠습니다.”
식기를 부딪치던 두 사람이 문득 눈을 마주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웃음이 나는 것이,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먼저 리제아나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팬케이크를 한 조각 썰었다. 그리고 바나나 한 조각을 올려 먹었다.
팬케이크가 바나나의 단맛과 어우러져 입안에서 달콤하기 녹았다.
“음…!”
팬케이크를 맛보던 리제아나가 음미하는 듯한 신음을 냈다.
“맛있어?”
이안 역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팬케이크를 썰다 멈추고 리제아나를 보며 물었다.
“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려나….”
“네?”
“아, 아니야.”
너무 작게 중얼거린 나머지 그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시럽으로 손을 뻗은 그녀는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동그랗게 한 바퀴 돌리며 뿌렸다.
“잘 먹네.”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예요. 팬케이크, 과일.”
“그렇군.”
이안은 되새기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색깔은? 무슨 색을 선호해?”
“음… 저는 검정이요.”
“검정?”
썰어놓았던 팬케이크에 시럽을 부어 한 입 먹으며 이안이 되물었다.
“어두워서 숨길 수 있잖아요. 뭐든지.”
이안은 들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팬케이크를 먹으며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답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 아픈 대답이었다.
리제아나의 과거들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이안은 은은하게 퍼지는 차향을 음미하며 질문을 이었다.
“그럼… 어떤 말을 제일 좋아하지?”
“말이라면….”
“평소에 듣고 싶었던 말은 없어?”
반복되는 이안의 질문에 리제아나는 기꺼이 고민해주었다.
평소에도 항상 질문이 많았던 그였던지라 별다른 의심이 들지 않았다.
“다녀왔어.”
“다녀왔어?”
“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기 때문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딘가를 향해 떠났고, 안전하게 곁으로 돌아왔다는 거잖아요. 돌고 돌아도 결국 나한테로 돌아왔다는 말 같아서. 어딘가 포근하고 애잔한 이상한 기분이 들거든요.”
리제아나는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마무리한 후 식기를 내려놓으며 냅킨을 들어 입 주변을 닦았다.
“그러는 이안은요? 어떤 말을 제일 좋아해요?”
“음….”
질문이 자신에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이안은 잠자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겨우 내뱉었다.
“음…. 내가 좋아하는 말이라.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해주는 모든 말이라면 뭐든지 좋아.”
리제아나의 말문 막힌 모습을 즐기며 이안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 ⚜ ⚜
식사가 끝난 후, 이안은 기꺼이 그녀를 다시 방으로 데려가 주었다.
사실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무척이나 컸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해야 할 일들을 끝내야 했다.
그녀와 계속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이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이만 가볼게.”
“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새처럼 리제아나는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리 오랫동안 한 공간에만 있으면 외출하고 싶을 만도 하지만 리제아나는 조금 달랐다.
햇빛을 좋아했지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소량의 빛을 쬐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리제아나는 이 조용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안이 다량의 책을 준비해준 덕분에 텐젤에 대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책들과 소설들이 갖춰져 있어 딱히 심심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안은 리제아나가 외출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닫히는 문 사이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문이 닫힌 후에도 그는 서성거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는 돌아섰다.
“준비되셨습니까?”
하르힌이 자신의 짐을 여행 가방에 한가득 담아 낑낑거리며 끌고 왔다.
“…그래.”
공작령으로 내려가는 날이 오늘이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으나 새벽 훈련을 위해 조금 미루어진 참이었다.
짐은 딱히 챙길 것이 없었다.
제복 몇 벌과 와이셔츠와 블라우스, 바지 몇 개를 빼고는 전부 이공간에서 꺼내오기 때문에 이안은 하르힌보다 작은 여행 가방이면 충분했다.
“지금 가실 거죠?”
리제아나에게 도저히 얼굴을 맞대며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 이안은 어젯밤에 고민 끝에 적은 편지를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꺼냈다.
“설마.”
하르힌은 팔짱을 끼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그 편지 한 장만 남겨서… 손님께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떠나시겠다는 그런 나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죠?”
“뭐? 나쁜 생…각?”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아이 진짜, 제가 많이 봐줬습니다, 저하. 어서 늦으시기 전에, 작별 인사하고 오세요!”
하르힌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이안을 강제로 단숨에 리제아나의 방문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을 쾅쾅 두드리더니 복도를 내달려 그녀가 나오기도 전에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달깍 열리고 조금 전에 보았던 리제아나가 다시 빼꼼 문틈 사이로 나타났다.
“이안?”
“휴…. 하르힌.”
이안은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리제아나가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촉박해서, 오늘 떠나게 됐어.”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리제아나는 침착해 보였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했을 만도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미리 전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대에게 작별 인사… 같은 건 할 준비는 하지 못했거든.”
황제와의 대결이었다. 황제에겐 많은 병력과 실력이 뛰어난 장군들이 많았다.
이안이 강한 마법사라고 하나 이 반란이 성공할지 그도 짐작할 수 없었다.
“꼭 돌아오실 거죠?”
그제야 리제아나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글쎄.”
마지못해 웃는 이안의 모습이 그녀가 보는 마지막 모습일 것 같아 두려워졌다. 리제아나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문을 마저 열어젖혔다.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세요.”
“….”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아요. 네?”
“…응. 노력해볼게.”
이안의 말을 듣자 조금이나마 리제아나는 마음을 놓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안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이죠?”
더 가까워진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이 너무 달콤해서 이안은 잠시 홀린 듯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요히 그녀를 들여다보던 이안의 입에서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아 왔던, 수도 없이 목구멍 너머로 삼켰던 말이었다.
“나, 그대를 좋아해.”
“…이안.”
의외의 말에 리제아나가 놀라 입을 벌리고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그의 마음을 전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아마 그대가 처음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었을 때부터일 거야. 이전에 고백은 완벽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온전히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저는…!”
리제아나가 말을 꺼내려다 도로 입을 오므렸다.
절대 이안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도 그의 진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친구라 선을 그었던 것도 커지는 그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섣불리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저주에 이성을 잃은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리제아나는 이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으라 해도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그 마음을 쉽게 거두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고백을 받아야 하는데…. ‘네’라고 말해야….’
“리제아나. 난….”
이안이 리제아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그 순간, 기억하기 싫은 공포의 기억이 불현듯 리제아나의 몸을 잡아챘다.
잔혹하게 웃음을 지으며 목을 조르던 이안. 그녀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그의 핏빛 눈동자.
그 모든 게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그 기억은 더 또렷해질 뿐이었다.
“…응.”
이안도 조용히 답하며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녀를 더 몰아붙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일절 손대지 않은 채로 무릎을 조금 구부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조급해서 답할 필요는 없어. …다녀올게. 곰 인형은 꼭 몸에 지니고 다녀. 마탑 안이더라도 조심해. 특히 외부인은.”
이번에도 이안은 굳이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에게 부담이 될 것이니까.
“다녀올게. 리제아나.”
서글픈 눈빛으로 이안이 애써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그녀의 보랏빛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어나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 하르힌이 기다리고 있던 거실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향했다.
“이안.”
등 뒤로 리제아나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계단에 기대고 있단 이안의 등 뒤로 멈추어 섰다.
“다치지 말고, 오래 걸려도 상관없으니까 안전히 오세요. 이안. 이건… 제 손수건이에요. 꼭 돌려주러 와야 합니다.”
아까보다 조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이안을 붙잡은 리제아나는 그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이안은 손수건을 꽉 쥐었다. 그녀의 온기가 그에게로 스며드는 듯했다.
“시간이 있으면 집무실 첫 번째 서랍을 열어봐. 그대에게 쓴 편지가 있으니까.”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향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했다.
복도 맞은편에 뚫린 창문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 좋아하던가?”
“네.”
리제아나가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녹기 전에 꼭 돌아올게.”
더 지체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애써 몸을 돌리고 이안이 말했다.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