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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3/117)

73화

새벽은 고요했다. 겨울 하늘이 덧없이 맑았다.

새벽녘이 감도는 하늘에 아직 어둠이 머물러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직 해가 모습을 드러나지 않아 주변이 푸르스름했다.

새벽의 공기가 코를 시큰거리게 했지만 그마저도 상쾌했다.

이윽고 리제아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몸을 쭉쭉 늘리며 하품했다. 그녀는 몸을 풀며 옷장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익숙한 옷들이 나란히 열을 지어있는 모습을 눈으로 훑으며 섰다. 그제야 그녀는 완벽하게 마탑이라는 곳에 적응했음을 깨달았다.

“벌써… 텐젤에 온 지 반년 정도가 지났던가.”

그녀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벌써 겨울이 다가왔으니 반년이 지난 셈이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리제아나는 홀로 피식 웃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이안과 서슴없이 대화하는 자신이 퍽이나 우스웠다. 아직까지 하르힌은 대하기 어려웠으나 예전에 비하면 많이 친근해졌다.

“오늘은….”

리제아나는 손을 뻗어 이안이 선물해준 바지를 꺼내 들었다. 레이디가 바지라니, 필로렌치아 공작이 듣는다면 뒤로 나자빠질 일이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좋았다.

‘이게 더 편한걸.’

이안과 막 새벽 훈련을 시작했을 때 그가 선물해준 바지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몸이 적응한 탓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머리를 포니테일 모양으로 높이 위로 묶은 리제아나는 이제는 넘길 만큼 자란 앞머리를 뒤로 넘긴 후 옆머리만 조금 내놓았다.

검은 바지와 베이지색 긴 팔 블라우스를 선택한 그녀는 문득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너무… 생기가 없나?’

자고 일어났기 때문일까 양치와 세수를 해도 여전히 조금 얼굴이 부어있었다.

이안에게는 편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동안 눈길도 가지 않았던 그녀의 방 한편의 경대 위, 화장품에 시선이 갔다.

이안이 처음 방을 마련해주었을 때부터 있었던 화장품들이었지만 리제아나는 그 동안 쓸 생각조차 않았다.

리제아나는 거울 앞에 다가가 분홍색 립스틱을 쥐어 천천히 발라보았다.

“이상해 보일까?”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기분 전환을 위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리제아나는 문을 열었다.

“먼저 왔네.”

먼저 도착한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이안에게 선수를 빼앗긴 모양이었다.

그는 마탑의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을 머금은 그는 아름다웠다.

턱을 괴고 응접실 의자에 앉은 그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리제아나는 계단을 내려오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리제아나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이안은 서둘러 표정을 지웠다.

“좋은 아침.”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알고 있던 모습으로 돌아온 이안은 여유롭게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내려왔으면 인사라도 하고 있지.”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오늘은….”

이안은 문득 걸어오다 무엇인가 달라진 점을 눈치챘는지 멈칫했다. 리제아나는 저도 모르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손을 올렸다.

‘알아차린 걸까?’

그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기대가 차올라 그녀도 몰래 숨을 죽였다.

“입술….”

“….”

“입술에 먼저 봄이 찾아왔군.”

그는 능청스레 스치듯 지나가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던 리제아나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려버렸다.

“왜?”

짓궂게 그녀를 바라보는 이안에 리제아나는 말꼬리를 서둘러 돌렸다.

“가…가자고요.”

⚜ ⚜ ⚜

오랜만에 하는 훈련이었다. 그렇기에 훈련장 열다섯 바퀴는 버거울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리제아나는 열다섯 바퀴를 완주하는 데에 성공했다.

“후….”

터질듯한 심장과 함께 숨을 가다듬으며 리제아나는 무릎에 손을 대 몸을 지탱했다. 거칠게 숨을 뱉고 마시길 반복했다.

“잘하는데?”

“그럼요…. 이전에 저 열심히 했잖아요.”

이안은 그녀의 대답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모를 테니까. 이안이 생각했다.

리제아나는 언제나 이성적으로 냉정하지만 필요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그것이 특히 어렵고 고된 일일수록 그녀는 더욱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리제아나와 함께 있는 순간을 즐기며 이안은 진검을 뽑아 그녀에게 칼을 돌려 건넸다.

“진검? 진검으로 대련을 하자는 말인가요?”

항상 검을 맞댈 때면 이안은 리제아나에게 목검을 들려주곤 했다. 진검은 무겁고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가 진검을 건네주니, 리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의 검을 내려보았다.

“아니?”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부정의 뜻을 나타냈다.

“그…럼요?”

리제아나가 검을 돌려보며 물었다.

“스스로를 지키는 법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이미 가르쳐 주셨잖아요?”

“이번은 달라. 항상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내가 없을 땐 그대 홀로 지켜야 해. 그대 스스로를.”

리제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리로 와.”

이안은 손바닥을 펴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대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해. 이제부터 할 훈련은 두려움을 버리고 진검을 휘둘러 보는 거야.”

“우위에 있다는 확신?”

누군가보다 우위에 있다…. 리제아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녀에게는 진검의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이안은 뒤에서 리제아나의 자세를 고쳐주며 답했다.

“물론 그러려면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해야 해.”

“?”

알아들을 수 있게 더 설명해달라는 듯이 리제아나의 눈썹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하하, 어렵지 않아. 자 잘 봐.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줄게.”

이안은 자세를 고쳐주던 위치에서 벗어나 검을 뽑았다. 리제아나와 달리 손쉽게 한 손으로 들었다.

“나야 마력이 있으니 조금은 마력을 주입할 수도 있지. 없어도 상관없어, 그저 거칠게 상대를 베는 거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잃지 않고 말이야.”

“!”

“눈앞에 있는 적이 쓰러질 때까지 그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리곤 이안은 칼을 휘둘렀다. 완벽하게 그와 한 몸이 되어 칼은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며 바람을 갈랐다.

이어서 그의 앞에 있던 나무가 가볍게 넘어졌다.

리제아나는 손쉽게 넘어가는 나무를 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처럼 나무를 한번에 넘어뜨릴 정도로 큰 힘은 없지만 적어도….

“지켜줄게.”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가 마냥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려주고 싶었다.

⚜ ⚜ ⚜

“리제.”

항상 아침을 방으로 들고 왔던 하르힌 대신 이안이 문을 두드렸다.

“이안?”

“오늘은 다 같이 응접실에서 아침 먹을 예정이야. 그대도 와줬으면 좋겠는데.”

“네, 그래요.”

오랜만에 다 함께하는 식사였다. 리제아나는 흔쾌히 응했다.

“갈까?”

“지금요?”

“에스코트 정도는 괜찮잖아.”

“아직 머리도 안 말랐는데….”

훈련이 끝나고 곧바로 몸을 씻었던 터라 여전히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리제아나는 젖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망설였다.

“상관없어. 말려줄까?”

리제아나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내미는 이안의 손을 맞잡은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며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전과 같이 행동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에 깃든 초조함을 모를 리제아나가 아니었다. 리제아나는 이전에 그녀를 찾아온 이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리제아나. 나, 떠나야 해.”

리제아나는 그날 이후 깊은 의구심을 품고 또 품었다.

“이안. 혹….”

“리제.”

“네?”

“하나만 약속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뭔데요?”

이안이 말머리를 빼앗아 가버렸다. 그녀가 무엇을 물을지 짐작하고서 리제아나의 말을 가로챈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말을 빼앗겨버린 것은 자신이니까, 단념한 채로 이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시장에서 선물해주었던 그 곰 인형 있잖아.”

“네, 아직 가지고 있어요.”

리제아나는 책상에 놓여있는 선반에 진열된 곰 인형을 떠올리며 기억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내가 없는 동안에는 그것과 목걸이를 함께 몸에 지니고 다녀줘.”

“네?”

“이런, 이상한 뜻으로 말한 건 아니야.”

이안이 황급하게 횡설수설하며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게… 부적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대 곁에 있지 않은 이상 몸에 지녀. 내 부탁은 그뿐이야.”

“부적이요?”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곰 인형 안에 보호 마법 비슷한 것을 걸어두었거든, 혹시 위험이 닥치면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게 말이야.”

보호 마법 비슷한 것은 뭘까. 리제아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니고 다녀줄 거야?”

“글쎄요….”

“리제아나….”

뜸 들이는 그녀의 답변에 울상을 짓는 이안이 버림받은 강아지같이 보여서 리제아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해줄 거지, 응?”

반복되는 그의 물음에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이 리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고마워.”

마침내 표정을 풀고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침을 굳이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배부른 미소였다.

도착한 마탑 1층 응접실에는 하르힌이 없었다.

그저 식탁에는 팬케이크와 시럽, 샐러드와 과일이 차려져 있을 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양피지에 무엇인가가 쓰여 있었다.

[배고파서 먼저 먹고 갑니다. 먹고들 오세요. 두 분. - 하르힌]

이안와 리제아나는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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