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17)

69화

어둠이 드리우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검은 로브들을 입은 다양한 체격들의 사람들이 비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소곤거리며 대화했다.

몇 개의 촛불이 어두운 지하실 안을 밝혔다. 그들은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입을 뻥긋거렸다.

“황제의 움직임이 요새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다.”

“이럴 때 그분이 계셔야 하는 건데….”

“그분이라면… 누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들의 대화가 지속될 무렵, 둘러앉은 테이블 사이로 가장 구석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듯 물었다.

“그분을 모른다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이야? 당신 첩자 아니야?”

‘그분’을 모른다는 말에 사람들은 하나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의심의 화살은 당연하게도 바로 전에 손을 든 사람에게로 향했다.

“뭐, 뭐요! 나도 정당하게 내 뜻을 밝히고 들어온 사람이거늘! 절 의심하는 겁니까?”

주목받은 사람은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고 수군거림은 한 차례 더 심해졌다.

“자자.”

그리고 그때,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침착한 목소리의 남자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처음 왔다면 당연히 ‘그분’을 모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더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만.”

“텐젤의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모인 자리입니다. 서로를 의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멸하는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다.”

그는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온화하게 그들을 타일렀다.

“….”

그제야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하나씩 그에게서 의심 어린 눈을 거두었다.

“그, 그래요. 크흠. 의심해서 미안하오. 그분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큰 은인이시라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소.”

“괜, 괜찮습니다.”

그들은 다시 본래 회의의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치고 들어갈 순 없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분하다는 듯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웅얼거렸다.

“물론 다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가득할 테지만, 알잖아요. 우리에겐 전력으로 쳐들어갈 만한 병력도 없다는 것을. 조바심 낼수록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는 말씀입니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시죠.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황제가 당장이라도 우리를 박살 내고자 벼르고 있는 듯 보이긴 합니다만.”

“하….”

이곳저곳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황제에게 잡히는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니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에게 그들이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계획해온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노크 소리가 고요한 지하실을 울렸다.

-똑, 똑, 똑.

노크는 부드럽게 정확히 세 번 울렸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로브를 쓴 사람들이 술렁였다.

“더 오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뇨 명단에 적힌 이들은 모두 왔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내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황제일 리는 없을 겁니다. 황제였다면 곧장 우리들을 죽였을 테니.”

“그럼 도대체 누구라는 겁니까! 빠진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알 수 없는 정체에 불안감은 더욱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어요?”

“있을 턱이 없지!”

“그래서 …열겁니까, 말 겁니까.”

가장 중요한 질문이이었다. 모두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섣부르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또다시 정확하게 세 번 명쾌하게 울려 퍼지며 그들을 재촉했다.

“…열어줍시다.”

처음 싸움을 중재하던 이였다. 그는 고심 끝에 결국 결정했다.

“누군지 알고요?”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확신을 가진 것도 아닌데 어째서 열겠다는 겁니까?!”

“….”

이렇게 입씨름해봐야 해결되질 않은 문제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럼 제가 열도록 하겠습니다.”

오랜 연륜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심호흡을 두어 번 들이마신 후 문을 열었다.

“이제야 열어주는군.”

늦게 문을 연 것에 대해서 불평을 토로하던 키가 훤칠한 남성은 문이 열리자마자 답답하다는 듯이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어 정체를 드러냈다.

문 너머에 있던 사람을 본 순간 중년 남성의 눈이 커졌다. 그는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좀 빠릿빠릿하게 열 수 없나? 이곳을 알아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는데 내 피지컬이 워낙 좋아서 눈에 띄기 쉽잖아?”

능글맞게 웃으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가 입을 뗐다. 그가 빛나는 하얀 머리카락을 뽐내며 손을 흔들었다.

“전혀 예상 못 했겠지.”

이안이 여전히 자신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남성을 가리키며 웃음 섞인 어조로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당…당신이 여길…. 여길 어떻게…?”

“걱정하지 마. 당신들을 잡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그럼…?”

“조금, 대화를 하기 위해서?”

놀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안이 두 손을 들어보였다.

“회유라면….”

“회유라니, 그런 착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내가?”

그는 한쪽 눈썹을 구기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노인은 장난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의지를 다진 듯이 뚜렷했다.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않습니까, 체스포레스 백작.”

이안의 입에서 단번에 자신의 정체가 나오자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난 체스포레스 백작은 떨리는 동공으로 말을 이었다.

“그…그렇습니다.”

“그럼 뭐 하십니까?”

“예?”

“나를 안내해주셔야죠.”

“어디…로?”

쉽게 끝나지 않는 대화에 답답하다는 듯이 이안이 미간을 구겼다.

“이런, 제가 의심스러운 겁니까?”

황실의 가장 충실한 개라 소문나있는 이안을 앞에 두고 제 아지트를 소개해줄 만큼 체스포레스 백작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못 믿겠다는 그의 눈빛에 이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확실히 해드리지, 뭐.”

“?”

“나 이안 렌디 데벤시아는, 프로디터의 수장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너희들의 반역 계획에 참여해 뜻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 ⚜ ⚜

이안이 직접 프로디터를 찾아오기 하루 전.

아직 밖은 어두웠다.

방 밖으로 나온 이안은 곧장 마탑을 찾았다.

시엘은 아침이 밝으면 떠나라 거듭하여 말했지만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었다.

당장 할 일이 있었기에 하르힌과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그의 측근 중에 가장 오랫동안 마탑에 남아 그를 충실하게 따르던 하르힌에게, 이안은 알려주어야 했다.

어렴풋이 하르힌도 그의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이안이 마탑으로 돌아오자 하르힌이 이안을 맞았다.

“하르힌.”

“네.”

“할 얘기가 얼굴에 많아 보이는데, 먼저 따라와.”

“흥.”

하르힌은 리제아나에게 정중히 인사하곤 그를 따라 집무실로 올라가기 바빴다.

이안은 이공간에서 집어 든 잔에 위스키를 조금 담고 크고 동그란 얼음을 담아 한 모금 짧게 마셨다. 그는 하르힌을 향해 잔을 흔들어 보였다.

“음… 뭐,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이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떨떠름하게 하르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또 다른 위스키 잔을 건넨 이안은 집무실 의자를 가리키곤 그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행동에 따라 하르힌도 마저 앉았다.

“하르힌.”

이안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얼굴을 봐서는 딱히 고백을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고백? 이런 전혀…. 잊고 있었군….”

“예?!”

이안의 반응에 하르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계획을 가장 중요시하는 이안이 고백이라는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 버렸다니.

하르힌으로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어.”

“들어보죠,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으셨길래 천하의 저하께서 고백도 까먹으셨는지.”

비아냥이 가득한 목소리에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하르힌은 이를 가볍게 넘겼다.

그동안 이안에게서 살기와 함께 무언의 협박을 여러 차례 받아본지라 이 정도 살기는 이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

그런 하르힌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이안은 행동을 멈추고 입을 뗐다.

“나 말이야.”

이안은 최대한 이야기를 간결하고 빠르게 끝내기로 다짐하곤 입을 열었다.

그 일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내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리제아나에게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얼마나 많은 식은땀을 흘렸던가.

“사람을 죽여왔어.”

“예? 그거야 항상 범죄자를 처단해 오셨으니….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너무 결론부터 말했군.”

너무 긴장하다 보니 결론부터 나간 모양이었다.

이안은 금방 제 실수를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피곤한 눈을 쓸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저주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잖아?”

그는 하르힌이 눈치챌 수 있을 만한 주제부터 꺼내며 제 목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붕대를 감지 않으셨군요?”

그제야 하르힌은 항상 이안이 목에 두르고 있던 붕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곤 몸을 조금 앞으로 뺐다.

앞으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길어-”

어두운 이안의 얼굴을 보며 하르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모르게 고조되는 분위기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렇게 이안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새 이야기를 끝마치자 하르힌은 울먹이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너 울어?”

당황한 이안의 말에 하르힌이 코를 훌쩍이며 답했다.

“…당연하잖아요! 그런 일이 있으셨다니 ….”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난날 마탑에 돌아오지 않은 이안을 향해 짜증을 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여서 더욱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프로디터에 대한 계획은 수행할 수 없어. 난 그들과 합류할 셈이니까. 물론 난 너에게도 강요할 생각 없다.”

무엇보다 제국에 반기를 드는 일이다.

일이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하르힌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눈물이 맺힌 얼굴로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안을 바라보던 하르힌이 주먹을 쥐고 말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하를 따를 겁니다. 무조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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