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안의 방문에 등을 기댄 리제아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노을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사브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이어서 필로렌치아 공작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이유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가 그토록 라이핀을 혐오하는 이유까지 전부.
다만 그녀가 회귀해 왔다는 이야기만은 털어놓지 못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말했다.
“저는 지긋지긋한 아비드 제국에서 도망치려 했고, 이안은 그때 제가 내민 손을 잡아 주었지요.”
리제아나가 씁쓸한 웃음을 살짝 머금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안은 그녀가 모든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하물며 동정도 하지 않았다.
리제아나가 동정을 바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라서 털어놓을 수 있었어.’
벗어나려고 할수록 과거는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무엇을 하던 제자리걸음 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 했다.
“….”
이야기의 끝을 알렸음에도 그 뒤로 이안은 조금 더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이윽고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어?”
“복수…라고 해봤자, 덕분에 했죠.”
리제아나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저는 그 뒤로 한 발자국 정도 나아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 발자국밖에?”
“얽히고설킨 과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으니까. 과거는 무엇을 하든 끈질기게 뒤따라붙을 테죠.”
“후회는 안 해?”
“어떤걸요?”
“복수라든가. 왜, 그런 말 있잖아.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면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된다고.”
“푸흡.”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야, 웃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이안이 의아해하며 당황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생각보다 순수한 이안의 생각에 감탄했달까요.”
평소에 듣던 리제아나의 목소리와 달리 약간의 조롱이 섞인 목소리였다.
“순수?”
“착하게 살았다면 전 진작 죽었을 거예요.”
운명의 여신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녀를 가장 큰 불행 속에 몰아넣어 목숨을 빼앗고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마음대로 버려놓고는 다시 운명 속에 비집고 끼워 넣다니.
“난 황실과 가문으로부터 버려졌고 감히 봐줄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과감하게 복수했고 후회하지 않아요.”
“….”
“나도 물론 그들 아래에서 여러 악행을 해왔어요. 그러니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의 꼭두각시놀이에 놀아난 나 때문에 피해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속죄하려고요.”
“….”
이안의 낮은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잘못한 게 왜 없겠어요. 누구보다 잘 아는데.”
리제아나는 죄책감 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라이핀의 명령으로 한순간에 재산을 몰수하거나, 라이핀에게 방해되는 자들의 죽음을 사주하던 손이, 바로 이 손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리제아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주먹을 쥐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죠. 힘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러 왔잖아요.”
“!”
“그러니까 힘을 키우고 복수해서 시원하게 한 방 먹여줘야죠. 그리고 한마디 할 겁니다. 당신들 인생 헛살으니까 같이 지옥 가서 속죄나 하자고.”
“푸핫.”
이번에 웃음보가 터진 건 이안이었다.
가만히 리제아나의 말을 들어보니 묘하게 수긍이 갔다.
한편으로 그런 강한 마음을 가진 그녀가 부러웠다.
역시 그녀는 강한 사람이구나. 이안은 낮게 웃으며 문에 머리를 기댔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내 이안이 위태로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제 이안 차례죠?”
“응?”
“자, 이제 이안 차례에요. 말해주세요.”
약속은 약속이었으니 이안은 잔뜩 가라앉은 눈동자로 공허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이안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야 했다. 분명 리제아나의 이야기보다 더 길어질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리제아나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그가 걱정되었다. 그가 쓰러졌던 모습이 여전히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안은 리제아나와 함께 온실을 보던 중에 일어났던 저주의 발작에 대한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번 말을 시작하니 그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괴로움까지 그는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털어놓지 못할 것만 같았다. 리제아나 또한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으니 그녀에게 모두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대의 목에 상처를 낸 기억이 없어. …미안. 당신을 다치게 하다니.”
사과를 끝으로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리제아나가 끊어지려던 대화의 흐름을 이었다.
“선대 공작님께서는 이안을 끝까지 사랑하셨군요.”
“사랑?”
“네, 그런 말을 남기셨잖아요.”
책장 위에 적혀있던 아버지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
[다만 나는 여기서 걸음을 멈춘다. 그러니 이안, 앞서 나가렴. 못난 아비로서 네 죄까지 내가 모두 가져가 지옥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대신 받을 테니.]
앞서 나가는 것이 내게 허락되기는 한 걸까.
이안은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그래…. 뭐, 뭐?”
리제아나의 말에 그저 수긍하려던 그는 단정적인 그녀의 말에 당혹스러워했다.
“선대 공작님의 말을 따라요. 선대께서는 이안이 언젠간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 죄책감을 지지 않고 나아가길 바라시는 거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장에 그런 편지를 남겨 두시진 않으셨을 거니까요.”
“하지만.”
“결론은 간단해요. 죄책감에 억눌려 당장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
리제아나가 웃음기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어둠에서 한 발자국만 나오세요. 제가 옆에 있어 줄 테니. 마탑과 공작저의 사람들 모두 이안의 곁을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푹 늘어뜨렸다. 그는 나지막하게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걸로… 내가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인생은 하나의 거대한 모순이라고 하는데. 그의 운명은 기구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그는 그 답을 찾아야 했다.
“모르죠. 그렇지만 이제부터 알아보시면 되는 거죠. 하지만 이안에게는 당신을 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목표를 이루기까지 그들이 당신을 지지할 겁니다. 물론 저도요.”
“….”
‘그러니까… 그만 나와주세요.’
그러나 마지막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켰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이제 그의 의지에 달렸으니 리제아나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였다.
이안은 여러 감정이 담긴 숨을 내뿜으며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는 손을 가볍게 들어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바깥으로부터 그를 차단하고 있었던 커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창문 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다.
그의 몸을 감싸 안고 있던 담요도 허공으로 들려 이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이안은 한 발자국 달빛을 향해 나아갔다.
오랜만에 보는 빛은 참으로 밝고 맑았다.
“나는,”
창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창문 너머의 자신을 건너보았다.
“나는 나아가고 싶어,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아.”
지금까지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왔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를 위해 죽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멈춰 설 순 없었다.
어쩌면 답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복수.
아버지를 위한 복수.
진실을 마주한 그는 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다.
하지만 리제아나가 그를 다시 밖으로 이끌어 주었다.
‘도움을… 받았군.’
붉은 눈동자에 확신이 차올랐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며 그가 허리를 폈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었구나.’
리제아나는 문 너머의 있을 그를 기다리며 문 위로 손을 얹었다.
‘그가 나올까?’
하지만 그의 말을 끝으로 안에서 더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힘없이 문으로 몸을 기댔다. 그녀의 위로가 부족했던 걸까. 혹은 그가 겪은 상처가 너무 컸던 걸까. 문에 기댄 채로 리제아나는 애꿎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리제아나의 몸이 기울여졌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어라?”
눈을 살짝 뜨니 이안이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이안…?”
순간 헛것이라 착각하며 눈을 비비려고 하자 이안이 낮게 웃으며 리제아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래 나야.”
“네?”
“덕분이야.”
언제 갈아입었는지 검은 제복 차림의 그가 요염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리제아나의 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이안의 입맞춤에 당황한 리제아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제가 한 거라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밖에 없는걸요.”
“나를 끌어내 주었잖아.”
“제가요?”
“그래, 용기를 내주고 이렇게 다독여 주기도 했잖아.”
능글맞은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후련해 보이네요.”
“그야 물론이지.”
리제아나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이안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일들을 너무 미뤄뒀어.”
“일이요?”
“물론 그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리제아나는 그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려다 그의 짙은 빨간 눈동자에 담겨 있는 확신을 보고 그저 웃었다.
그는 회복했다. 더 단단해져서.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