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한편 마탑에서는 하르힌의 눈앞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었다.
눈앞의 인영은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검은 로브를 쓰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걷는 모습이 눈에 익숙했다.
“도대체 무슨 일, 일이 있던….”
떨떠름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고 있던 하르힌이 말을 더듬었다. 다시 말을 뱉으려고 했지만 그의 입은 영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마탑에는 너뿐인가?”
건너편에 거만히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상대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을 건넸다.
“으…응. 저하께서는,”
“됐어.”
짧게 거절로 하르힌의 말을 자른 상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덧붙였다.
“이곳은 잠깐 들린 것뿐이야. 그리고 저하와는 조금 일이 있던 차라 그분이 없을 때 들를 생각이었어.”
“일?”
“그래, 일. 보아하니 나의 소식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네.”
“….”
새초롬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하르힌을 가볍게 무시한 상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디가?”
“아까 말했잖아, 잠깐 들린 것뿐이라고. 사전 조사일 뿐이지.”
“사전 조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주길 바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상대는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넌 아무것도 몰라, 하르힌. 그러니까 내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귀찮게 굴지 말고 나와. 당장.”
“….”
하르힌은 상대의 일침에 잠시 멍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앞에 섰다.
이번만큼은 그도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다짐이 엿보였다.
“너야말로 자꾸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저하께 연락하겠어.”
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상대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하… 젠장.”
결국 길게 한숨을 쉰 상대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고개를 다시 들었다.
“짐을 챙기러 왔을 뿐이야. 멀리 떠날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더 캐묻지 말고 저하께도 감히 이야기도 하지 마. 나에 대해 입이라도 방긋댄다면 넌 그 자리에서 나에게 죽을 거야.”
로브 사이로 감추고 있던 손을 들어 힘을 잔뜩 쥔 주먹을 들어 보이며 상대가 위협하자 그제야 하르힌이 한 발짝 물러섰다.
뒤로 물러선 그를 싸늘하게 바라본 로브의 인영은 휙 등을 돌려 마탑 문 앞에 섰다. 순식간에 발걸음을 옮기자 하르힌이 다급하게 뒤를 따랐지만 이미 마탑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야!”
뒤늦게 문을 열고 상대를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색의 로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녀석, 수상해….”
하르힌은 다시 의자에 앉아 그밖에 없는 공간에서 한숨을 뱉었다.
⚜ ⚜ ⚜
오늘로 벌써 이안이 방 안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금방 털고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방 안에서 홀로 있는 그는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시엘과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리제아나가 매번 이안의 방문에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을 때면 시엘이 음식을 들고 나타나 리제아나를 내려보낸 후 빈 그릇으로 내려오곤 했으니까.
‘그래도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도대체 그때 그가 무슨 기억을 보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저주에 관련된 일일까?
두려움에 떠는 그의 모습을 그날 처음 보았다.
사람을 부르지 말아 달라며 그녀를 잡았던 이안의 손은 무척 차가웠다.
그의 흔들리는 눈을 떠올린 리제아나는 걱정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결국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에게서 다른 소식이 전해오지 않았다.
점차 지쳐가던 몸을 이끌고 시엘이 마련해준 방에 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엘이 찾아왔다.
“아가씨, 당분 보충을 위해 과일을 준비했으니 어서 드셔보세요.”
“정말 괜찮은데.”
“사양하지 마시고요.”
“…그럼, 감사합니다.”
리제아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엘이 내미는 그릇을 받아 턱을 괴고 있던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곧바로 나갈 줄 알았던 시엘은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엘…?”
리제아나가 의문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과일을 가리켰다.
“드셔야죠?”
“음….”
“드시는 거 보고 갈 겁니다. 요새 전하 일 때문인지 몰라도 식사를 전혀 못 하고 계시니까요. 착잡한 마음에는 달고 시원한 멜론이 제격이죠!”
손뼉을 마주치며 기분 좋은 웃음을 내뿜는 시엘이 부담스러웠지만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녀는 가지 않을 기세였다. 리제아나는 마지못해 포크를 집어 한 입 먹었다.
“이안은 그대로인가요?”
아삭하게 씹히는 멜론에서 단 과일즙이 뿜어져 나왔다. 은은히 퍼지는 멜론의 향을 음미하는 동안 리제아나는 은근슬쩍 이안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식사를 드시긴 하나요?”
“예, 뭐… 기분에 따라 드시긴 합니다. 그래서야 그분을 모시는 저만 더 답답할 뿐이지만요.”
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처음으로 시엘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온전히 겉으로 내비치며 쓸쓸히 답했다.
“그나마 아가씨라도 잘 드셔서 다행이죠. 적어도 과일 만이라도요. 그분이 아가씨를 부탁하셨으니까요.”
“이안이… 저를 부탁했다고요?”
처음 듣는 소리에 리제아나의 고개가 완전히 시엘을 향해 돌아섰다.
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곤 오른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물론 비밀이라고 하셨지만요.”
“….”
항상 이안은 리제아나에게 도움만 주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렇게.
“이번 저녁 식사는 제가 가지고 올라가도 될까요? 이안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당연히 거절할 줄 알면서도 물어본 질문이었지만 시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응했다.
“당연하죠!”
⚜ ⚜ ⚜
이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역사서를 읽고 또 읽고, 읽기만을 반복했다.
가끔 눈이 너무 피곤해질 때면 책을 던져두고 지그시 눈을 감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오히려 더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근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
이안의 한숨 소리가 규칙적으로 방 안을 가로질렀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리기를 선택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발작이 일어난 후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황궁에서는 분명 프로디터의 체포 계획을 이번 주 내로 계획하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는 이안에게 의문을 품을 터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는 현재 황제를 제대로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만일 그를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발톱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황제를 죽이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이로군.’
아까 점심으로 먹은 야채로 만든 라자냐가 소화되지 않았으니 딱히 배고프지도 않았다.
“오늘 저녁은 건너뛸-”
그가 한숨을 쉬며 적당히 시엘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멈칫했다.
“이안.”
높낮이 없이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
일주일 정도 떨어져 있어도 듣자마자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제.”
이안은 그녀의 이름을 곱씹으며 툭 내뱉었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 이름이었지만 내뱉자마자 입에 감기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도대체 언제 나오실 거예요?”
“…리제아나. 난….”
웅얼거리는 어조로 이안이 착잡하게 뇌까렸다.
마음이 너무 심란한 탓에, 그조차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하고 싶은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도대체 무슨 기억을 보셨길래 그러시는 건데요?”
리제아나가 다시 한번 큰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자극했다.
“복잡해.”
오랫동안 뜸을 들이던 이안이 짧게 답했다.
출구가 없는 미로처럼 복잡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말주변이 없어 위로에 서투른 건 사실이지만 들어주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요. 혼자 끌어안지 말고 가볍게 말해 보세요. 아무 말 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으니까요.”
리제아나가 덤덤하게 말했다.
“가끔은 입 밖으로 꺼내야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말로 이야기하다 보면 어쩌면 이안 스스로 답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는 그대도 한 번도 과거를 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으면서.”
방문 너머로 이안의 얕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그대도 항상 고민을 끌어안고 나에게 이야기 안 하잖아. 안 그래? 나만 내 비밀을 말하긴 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데.”
“….”
대화를 하다 보니 가슴을 자꾸만 압박하던 기운이 조금은 사그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체 모를 기분에 대한 의문을 넘기며 이안은 입을 재차 열었다.
“우리 가문의 이야기야. 그대도 당신의 가문 이야기가 아닌가…?”
“…좋아요. 이렇게 된 거 그럼 저도 다 말해드리죠. 뭐.”
“뭐?”
생각지도 못했던 리제아나의 답변에 되려 이안이 당황했다.
이안은 단숨에 기대고 있던 방문에서 벌떡 등을 떼고 일어나 고개를 돌려 닫혀있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이런.”
하지만 그곳에는 굳건히 그의 앞을 가로막는 문뿐이었다. 이내 스스로 한 멍청한 짓에 자조적인 웃음을 씁쓸히 내비치던 이안은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도 나만큼이나 복잡하나?”
“저보다도 더 복잡한 가정사는 없을걸요. 가족이라 부르기 싫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작자들이었거든요.”
“푸흡.”
리제아나가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소리에 결국 이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생각은 없었는데 리제아나의 한탄이 담긴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미안.”
“됐어요. 제가 제 집안 욕하는 건데요, 뭐. 아무튼 약속하시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모두 들으시면, 똑같이 이안도 다 털어놓고 방문을 열고 나오시는 거로요.”
리제아나도 방문에 등을 기댔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문을 열고 나오는 건… 약속에 없었는데.”
“뭐 좋아요. 우울한 기분 이겨내기 정도로만 해요 그럼. 됐죠? 저부터 얘기해드릴게요…. 긴 얘기가 될 거예요.”
리제아나 역시 라이핀과 얽힌 필로렌치아 가문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긴장했지만,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날따라 밤하늘의 어둠이 짙었다.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