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시엘이 역사서를 가지러 간 후, 이안이 무심하게 발을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시간의 보내고 있을 때였다.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응, 고마워.”
시엘은 정말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안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도련님.”
그의 마음을 눈치챈 시엘이 착잡한 목소리로 그를 다시 불러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안.”
“뭘요. 앞에 놔두고 가겠습니다.”
그가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시엘은 한 발짝 물러나기를 선택했다.
“시엘….”
그녀가 떠나기 전 이안이 그녀를 다시금 불렀다.
낮은 목소리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지만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네, 도련님.”
“그 사람을 부탁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하르힌을 호출해 보내주어도 좋아. 무엇이든 그녀 마음대로 하게 해줘.”
‘그 사람’이 리제아나라는 것을 알아차린 시엘은 쓴웃음을 짓고 답했다.
“네.”
방문 너머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안은 완전히 시엘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마력을 개방해 문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역사서를 쥐었다.
“윽.”
며칠 굶었다고 몸에 힘이 다 빠진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책이 무거웠던 탓이었는지, 책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안은 숨을 다잡고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다시 문을 본래대로 하고서 머리를 기댔다.
이번에 방에만 머무르며 알게 된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은 나약해져서야 자신의 추악함을 발견한다는 것이었다.
‘마력을 가졌다고… 기고만장해서는.’
길게 뻗은 새하얀 손을 접었다가 다시 펴보았다.
큰힘을 가졌다고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졌던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역사서로 시선을 돌린 이안은 손바닥을 펴 천천히 책을 쓸어보았다.
검은 표지를 지닌 역사서 한가운데에 근엄한 드래곤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그래, 이거.”
잊고 있었던 모든 비밀을 쥐고 있는 책이었다.
아직까지 열어볼 결심이 서지 않았지만 이안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야, 이안 데벤시아. 과거를 마주할 때 준비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안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역사서를 열었다.
그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제일 첫 번째 장에 적힌 단어였다.
‘Devencia’
데벤시아. 그의 가문 명이었다.
책은 본격적으로 그의 가문에 대해 이야기할 모양이었다.
“별로 달갑지 않지만.”
이안은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힘을 쥐었다.
[이 책을 보는 모든 데벤시아의 후손에게 데벤시아의 초기 가주인, 나 케드릭은 먼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역사서란 선대 공작들이 가문의 비밀이나 어두운 일면을 기록해놓은 책이었다.
그래서 가문에 속해있는 자가 아닌 다른 자가 본다면 곧바로 그 손을 잘라내야 했다.
“케드릭 데벤시아.”
초기의 데벤시아 수장인 그 이름을 읽어내리자 이안은 그의 목덜미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찌릿하게 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장을 넘겨 천천히 선대, 선선대, 그보다도 더 오래된 데벤시아 수장들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읽어 내리며 몇 가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나 초대 케드릭 데벤시아는 텐젤 황족과 계약을 맺었다. 나는 위대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먼 미래를 보지 못했다.]
초대의 데벤시아 수장은 강한 마력의 보유자였다는 것, 그 마력은 대대로 데벤시아 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황족과 일찍부터 계약을 맺어 연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점.
[황제는 나에게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질 영원한 부와 명예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나는 그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모든 것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순전히 케드릭의 시점으로 써진 일기 형식의 기록이었다.
이안은 낡은 종이 위의 문장을 하나하나 쓸며 읽어 내려갔다.
[황제와 나는 고대의 종속 맹약을 했다. 오래전부터 내려와 현재는 잊힌 그 고대의 맹약으로 온전히 내 정신과 힘은 황제에게 빼앗겨 버렸다.]
“종속의 맹약?”
의아하게 물음을 내뱉은 이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대의 맹약이라….”
그는 혼잣말을 하며 다음 문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부터 황제를 뜻하는 태양의 문양이 목덜미에 새겨졌다. 그 문양이 새겨진 뒤로 보름달이 떠오는 날마다 나는 황궁으로 불려가 정신을 잃은 채로 그가 시키는 모든 명령을 수행했다.]
[종속 맹약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존속된다는 의미인 줄만 알았지만… 나의 목에 스스로 목줄을 찬 격이었다. 상대방에게 내가 쓴 목줄의 끈을 쥐여주는 빌어먹을 주문이었다.]
“한 달 중 하루라면, 태양 무늬라면.”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한 달 중 하루, 그것도 달이 가장 밝게 빛나는 밤. 이안 역시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항상 황제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측근으로부터 내가 변했다는 말을 듣고 조급히 기억을 되짚어본바, 의식 아래로 가라앉았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을 필사적으로 황제로부터 숨기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오늘 나는 죽으러 간다.]
초대 데벤시아 가주인 케드릭 데벤시아 공작의 일기는 그 기록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혹여나 어두운 방 안에 있기 때문에 미처 살피지 못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법으로 빛을 내 종이에 가져갔다. 다행스럽게도 종이 끄트머리에서 다른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종속 맹약의 가장 치명적인 점은 내 힘이 데벤시아 피를 이은 직계 혈통에게 넘어가기 위해선 그 선대인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벤시아의 아이들은 일곱 살이 되면 그 힘이 발현되었다.]
[아비를 죽이고 그 업보를 이어받는 그 아들. 그것이 데벤시아 가문의 영원한 저주일 테지.]
그 문장까지 모두 읽고 나자 그제야 현실감각이 깨어났다.
너무 어려서, 스스로의 방어 기제로 인해 아버지의 죽음은 황제의 탓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끝내 황제의 명으로 그를 죽게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래….”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내가…. 내가….”
신은 죄를 지은 자를 돕지 않는다는 전설은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 뒤에 케드릭의 아들인 로렌시 데벤시아의 기록으로 넘어갔지만 대부분 그가 남긴 기록들은 케드릭의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안은 익숙한 이름 앞에서 넘기던 책장의 페이지를 멈췄다. 드디어 그의 아버지인 체스펠 렌디 데벤시아 공작의 기록 앞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불러보아도 대답 없는 그 이름을 부르며 장을 넘겼다.
[황제가 데벤시아 역사서를 찾기 시작했다.]
체스펠의 서술은 앞선 데벤시아 공작들의 기록과 달랐다.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두서 없이 글을 남긴 선대 공작들과 달리 체스펠의 서술은 담담했다
황제가 데벤시아 역사서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작으로 정갈한 글씨체는 또박또박 있었던 사건을 서술하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일에 쓰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숨기고자 황제에게 감히 거짓말을 했다. 잃어버렸다고.]
[황제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자 결국 수긍했다. 나는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데벤시아 공작저 가장 깊숙한 곳에 이 책을 숨길 예정이다.]
역사서에 날짜가 기록되지 않아 정확히 언제 쓰인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체스펠은 정말 그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기록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안은 다시 한번 여러 장을 펼쳐보았지만, 텅 빈 백지뿐이었다.
이제 마지막 장만이 남았다. 이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지만 한 줄기의 희망만은 놓칠 수 없어 마지막 장을 넘겼다.
“하아….”
그의 간절함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장문의 글이 남아 있었다.
우아한 글씨체는 누가 보아도 체스펠의 것이었다. 이안은 혹여 글자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종이 위의 글자를 매만졌다.
[이 글은 내가 남기는 마지막 글이다. 다시는 역사서를 펼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픔에 감히 적는다. 이안, 정말 미안하구나.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나마저 네 곁을 떠난다니 어린 널 어쩌면 좋으냐.]’
첫 번째 문단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벌써 가슴이 쓰라렸다.
[…하지만 기억해주려무나. 나는 영원히 네 마음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황제에게 너를 데려가는 대신 부디 살인에 가담하게 하지 말아달라 부탁했으나 황제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실 걸 안다.]
그 사실은 정확했다. 이안은 황제의 잘 길들인 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눈물이 앞을 가리나 운명은 운명이니 받아들인다. 오히려 네 손에 내 뒤를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처음 모든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죽고 싶었다. 내 손으로 감히 나를, 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찾을 때 즈음, 너도 똑같이 느끼고 있겠지.]
[사람을 해친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나는 네 엄마를 만났고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안이 눈살을 구겼다. 그가 집중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는 반역에 가담했다.]
“…반역?”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이안은 다시 한번 목뒤의 문양이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선대가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을 시작했다. 종속의 맹약은 몸의 주도권을 하루 넘겨주는 것뿐, 그 이상의 제약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나는 다른 일을 꾸몄다.
그래서 나는 프로디터들의 수장이 되어 황제를 끌어내리는 일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것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죽인 사람들을 향해 사죄하고 싶었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듯하구나. 그러니 이안, 앞서 나가렴. 못난 아비로서 네 죄까지 내가 모두 가져가 지옥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대신 받을 테니.
이상으로 체스펠 렌디 데벤시아의 모든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