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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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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손에 희생되어왔던가.

어두운 기운이 그를 덮어오고 있었다.

“욱-”

황제의 명령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사람들이 쓰러질 때마다 이안의 정신은 점점 무너져 내려갔다.

지독한 토기가 치밀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이건…?”

그제야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안이 당황하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왜인지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이윽고 이안은 그 목소리가 어릴 적 자신의 것임을 눈치챘다.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지만 어린 이안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어린 이안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야.’

‘…하지만!’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어린 이안의 목소리에 이안은 말문이 막혔다.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그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과거를 돌이키며 괴로워하는 것뿐이었다.

‘깨어나. 깨어나서 역사서를 읽어. 그래야만 답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이제 깨어나.’

그 말을 끝으로 어린 과거의 이안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주위의 배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자신의 앞으로 쏟아지는 배경의 파편에 눈을 질끔 감았다.

이안은 현실 세계에서 깨어났다.

“허억.”

이안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는 마치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내뱉던 이안은 제 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시선을 위로 두었다.

“이안, 이안!”

그가 정신을 잃은 동안 리제아나는 그의 몸을 따뜻한 정원 온실 안으로 온 힘을 다해 옮겼다. 그녀는 그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 때까지 경과를 지켜보던 중이었다.

이안은 곧바로 걱정으로 일그러진 보랏빛 눈과 마주했다. 그의 붉은 눈과 마주한 리제아나는 일순 몸을 움찔 떨었다.

조금 전, 그녀에게 달려든 이안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선 탓이었다.

“이안.”

그녀가 나지막이 이안을 불렀을 때였다.

이안은 보는 사람이 숨이 찰 정도로 숨을 몇 번이고 헐떡였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셔요. 이안, 괜찮아요.”

그러나 이안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숨을 가쁘게 쉬었다. 그의 눈가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람을…. 사람을 불러올게요.”

상태가 좋지 않은 이안을 이대로 온실 안에 내버려 둘 수 없다.

하지만 리제아나 혼자의 힘으로 이안을 저택에까지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가 막 일어나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안 돼….”

“하지만 당신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리제아나가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겠다는 눈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그 단호한 눈빛은 그의 아버지, 체스펠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손목을 잡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리제아나는 온실 주변을 살폈다. 엎친 데에 덮친 격으로 정원 쪽을 지나는 사용인도 하나 없었다.

“내가 사람을 불러올 수밖에 없어.”

리제아나는 코트를 벗어 그의 몸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리제…아나….”

“쉬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가 리제아나를 향해 힘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제아나는 정원을 나섰다. 그녀는 세차게 부는 바람을 등지고 공작저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시엘!”

그녀는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며 그녀를 불러보았지만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시엘!”

조금 더 소리를 크게 내어 부르자 그제야 리제아나를 눈치챈 시엘이 깜짝 놀라며 뜨개질 더미를 내려놓았다.

“아가씨?”

“시엘! 당장 저를 도와주세요! 힘이 센 사용인분들 몇 명만 데리고 따라와 주세요.”

다급하게 그녀에게 다가오는 리제아나에 시엘 또한 놀란 눈치였다.

“왜… 그러시는데요? 도련님은요?”

“이안, 그에게 가야 해요!”

“…도련님 문제라면 제 혼자로 충분합니다.”

시엘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하던 뜨개질을 바구니에 도로 넣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안내하시죠.”

⚜ ⚜ ⚜

“이안 도련님!”

시엘은 다급하게 정원 온실로 뛰어가는 리제아나의 뒤를 따랐다. 힘없이 쓰러진 이안의 모습에 시엘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이안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아, 아닙니다. 저택 사람들 몰래 도련님을 옮기셔야 한다, 이 말씀이신가요?”

시엘은 단번에 리제아나가 몰래 자신을 찾아와 이안에게 데려간 이유를 알아챘다.

잔뜩 깨지고 어질러진 정원, 리제아나의 목덜미에 난 손자국. 그리고 쓰러진 이안.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시엘은 이안을 믿었다.

무엇보다 그를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리제아나의 모습을 보면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변고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힘이 센 사용인들을 데려오셔야 해요. 하다못해 마탑에 연락을….”

“아뇨.”

시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게 맡기세요.”

깊이 심호흡한 시엘은 단번에 축 늘어져 있는 이안을 둘러업었다. 리제아나는 그녀의 힘에 잠시 놀랐으나 시엘은 늙은 몸으로 단번에 이안을 옮겼다.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의 방에 도착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치료하실 수 있는 약품과 붕대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시엘 님도 옆에 자리를 지키는 편이 좋지 않나요?”

“아뇨. 지금 도련님께 필요한 것은 아가씨이십니다. 무엇보다 그 상처… 치료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엘은 말을 마치고 방문을 나섰다. 그제야 리제아나는 자신이 다쳤다는 것을 떠올렸다. 상처를 인지하니 그제야 통증이 느껴졌다. 리제아나는 목 부위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윽.”

손이 조금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목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그녀의 신음을 들었는지 이안 역시 인기척을 내며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이안의 방이에요. 시엘이 당신을 옮기는 것을 도와줬어요.”

“….”

“아무도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그대로 둘 수 없었어요. 당신이 너무 아파 보여서….”

이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리제아나는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윽….”

하지만 이안은 신음하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를 뿐이었다.

“또 안 좋은 건가요? 시엘을 불러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오게 할게요.”

“…리제아나….”

이안이 멍하니 누워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네?”

“아무도 들이지 말아…줄래? 혼자 있고 싶어.”

그의 말을 알아차린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아무도 들이지 말고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은, 그녀 또한 방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에게 무심코 시선을 돌린 이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리제아나…?”

그가 손가락으로 리제아나의 목을 가리켰다.

“그… 목에… 상처….”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상처를 손으로 가린 리제아나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이안, 이건….”

“내가 이젠… 너까지 다치게 하다니…!”

이안은 괴로운 얼굴로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당신만은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이안….”

“지금까지 그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나뿐이잖아. 그러니 분명….”

리제아나는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리제아나의 부정에 이안은 더욱 괴로워 보였다.

“나는 어째서….”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울음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마음대로 말을 전할 수 없었다.

“다… 내 잘못이야.”

“네?”

“나는… 그의 개였어. 큭큭 그래, 멍청한 개일 뿐이었군. 나는 지금까지 대체….”

그는 리제아나의 말도 듣지 않고 마음속에 생각나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속 안에서부터 죽어 나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

아버지마저도 지키지 못했는데 제 손으로 이젠 그가 사랑하는 여자까지 죽일 뻔했다. 얼마나 무력한가. 저가 사랑하는 것들을 직접 손으로 해하다니.

이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팔로 눈을 가렸다.

“…이안.”

“….”

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리제아나는 말을 이어갔다.

“이안, 당신은 강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선해요.”

“….”

“전 알아요. 저를 인질로 데려온 것도 실은 위태로워 보이는 저를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거잖아요. 당신이 일전에 시장에서 보았던 소매치기 아이도 뒤에서 도왔다는 걸 알아요.”

“….”

“이 일도 당신이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난 알아요.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몇 번이고 구해줬잖아. 난 당신의 선함을 믿어.”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담았다. 이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리제아나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너무 자책 말아요.”

아무래도 그에겐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리제아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서 손을 뗐다. 소리 없이 리제아나가 방문을 나가서야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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