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다시 악몽의 파도가 거칠게 덮쳐왔다. 그동안 심연 속에 있었던 기억들이, 다시는 생각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가 죽던 그날. 유일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황궁을 다녀온 것뿐이었다.
⚜ ⚜ ⚜
17년 전.
“아, 아버지. 뒷목이 너무… 너무 아파요….”
어린 이안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그의 어린 몸이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이안!”
처음에는 듣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어린 아들의 애절한 외침이 결국 그를 움직이게 했다.
이안의 목소리에 황제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방향을 틀어 칭얼거리는 이안을 소중하게 꼭 껴안았다.
거대한 창 너머는 어둠뿐이었다
검은색 하늘에 차오른 달만이 보일 뿐이었다.
“괜찮다, 괜찮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조금만 더 참으면 모든 게 다 잠잠해질 거야.”
저 멀리 황좌에 앉아있는 황제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체스펠이 그의 아들을 다독였다.
“아버지?”
그의 품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라릴 듯이 아팠던 목덜미의 통증도 잠잠해지는 듯했다.
이안이 이대로 잠시나마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하아아암-”
황제의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지루해지기 시작하는데, 체스펠.”
“폐하, 매번 말씀드리지만 기다리셔야 합니다. 제가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황제의 독촉에 체스펠이 이안을 안았던 자세에서 살짝 몸을 뗀 후에 답했다.
그의 말 끝에서 배어 나오는 자그마한 떨림을,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이안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항상 체스펠의 견고하고 강한 모습만 보아왔다. 이안은 태양같이 빛나는 아버지의 나약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었다.
그의 두 눈동자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듯했다.
“아얏!”
또다시 통증이 느껴져 이안은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
고통에 눈물이 맺혔다. 체스펠은 그런 이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안고 있던 자세를 풀어 두 무릎을 꿇었다.
“거부하지 말렴, 이안. 그럴수록 힘든 건 너니까.”
황제는 이 모든 상황이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두 번이나. 하하, 두 번이나 데벤시아의 수장이 바뀌는 것을 보다니.”
그는 낄낄거리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이안은 점점 자신을 잡아 삼키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더는….”
그 말을 끝으로 어린 몸으로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통증에 이안이 그대로 풀썩 알현실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졌군.”
황제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맥없이 쓰러진 이안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황제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가 재밌는 시간이니까.”
“폐하.”
황제의 혼잣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체스펠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왜 그러지, 공작?”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약속? 그럼 지키고 말고.”
체스펠의 단호한 목소리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폐하.”
“그래, 알겠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 없어지더라도 이안을 잘 보살핀다는 약속,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어차피 데벤시아, 자네들은 그 발작이 일어나면 그 전일도 기억 못 하지 않나.”
심드렁한 황제의 태도에 체스펠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다시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폐하의 앞에서 이 의식을 진행하는 대신, 이안을 절대로 처형대의 집행인으로 세우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주십시오.”
하지만 그의 말에 황제는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두 사람 뒤로 이안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이안!”
“…이안.”
황제가 눈을 빛냈다. 체스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두 주먹을 힘줄이 보일 정도로 꽉 쥐었다.
“자, 텐젤 티베라 황가의 피가 잘 통하는지 알아보도록 할까.”
황제는 한 손으로 턱을 문지르더니 또 다른 손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앉아있는 체스펠을 가리켰다. 체스펠이 몸을 굳혔다. 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황제가… 그를 지옥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모양이었다. 짐승처럼 울부짖던 이안이 황제의 손짓에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안을 보며 황제가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지. 저주가 발현되는 순간에는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을 해야 한다니. ”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보이더니 황제는 선물을 받은 아이같은 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죽여라.”
체르펠이 절망스럽게 그에게 외쳤으나 황제는 명을 무를 생각 따윈 없었다.황제의 말에 이안이 붉은 눈을 번뜩였다.거친 울음소리를 허공에 내뱉으며 체스펠에게 달려든 이안은 거침없이 마법을 내뿜었다.
‘제발… 그만둬….’
꿈속의 이안은 그 장면을 홀린 듯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뒤늦게 멈추라고 외쳐보았지만 어린 자신에게 들릴 리 없었다.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체스펠은 비틀거리며 피를 쏟아냈다. 그런데도 이안은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맥없이 체스펠의 몸이 쓰러졌다.
“헉…헉….”
심장에 담겨있던 마력의 힘은 고스란히 이안에게로 옮겨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언제 봐도 놀랍고 신기하단 말이야.”
황제가 흥미로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번에 많은 힘을 소비해버린 이안은 그대로 휘청거렸다.
‘아버지….’
그들의 모습을저 멀리 꿈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이안이 중얼거렸다.
제 손에 쓰러져버린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뱉었다. 당시 어린 이안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눈물을 흘리고 싶은데, 빌어먹을 눈물조차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아버지….’
“큭큭. 결국 새로운 데벤시아 가주가 탄생했군.”
황제는 거침없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이안이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정신마저 혼미하게했다.
“네, 탓이, 아니야, 내, 내, 소중한, 아들.”
체스펠은 마지막 말을 겨우 마치고 그대로 숨을 멈췄다.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을뿐더러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를 부를 뿐이었다.
어린 이안이 허망하게 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무너졌다.
⚜ ⚜ ⚜
악몽과도 같은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린 이안의 몸에서 잠깐 눈을 깜빡이자 그는 열다섯 살 때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살려주세요.”
별 한점 없는 새카만 까만 밤이었다.
이안은 밧줄에 묶인 채 황제 앞으로 무릎이 꿇린 죄인을 알아보았다.
황제의 정치 방식이 부당하다며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당시 ‘혁명군단’ 이라 불렸던 조직의 수장인 바시티스 남작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죽여라.”
하지만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바시티스 남작을 가리켰다. 저주로 정신을 잃은 듯해 보이는 이안이 황제의 명령에 빠르게 달려들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컥….”
그는 그대로 곧바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가 뜨자 이안은 또 다른 밤에 알현실에 서 있었다. 그는 비리에 대한 벽보를 붙인 죄로 끌려온 평민 빌시를 마주하고 있었다.
“죽여.”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몸이 남자를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흩뿌려지는 피,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쓰러져가는 사람들.
“죽여.”
또 한 번.
“죽여.”
다시.
“죽여.”
물 흐르듯이 황제의 명령이 반복되었다.
황제는 이안이 성년식을 치르고 나서야 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했다. 그제야 이안은 발작 이후의 상황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황제의 개였다.사냥감을 곧바로 물어뜯어 죽이는 사냥개.그것이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