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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17)

62화

멍청하게도 몸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저 멀리서 여전히 떨고 있는 리제아나가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는 다시 이성을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도망쳐. 리제아나…. 도망치란, 말이야….’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끝내 의식은 저 아래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안은 겨우 잡고 있던 나머지 의식의 끝마저 결국 놓아버리고 말았다.

⚜ ⚜ ⚜

“컥- 이…안….”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목을 붙들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당황하며 손을 치우려 애썼지만, 그녀의 위로 올라탄 이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이것 좀…. 이…안…. 정신 차려….”

점점 그녀의 목덜미를 조이는 힘에 리제아나는 말은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붉은 눈이 흥분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초점이 엇나간 그는 먹잇감을 앞에 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안 돼. 내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그의 붉은 눈이 밤하늘 아래 달보다 선명하고 형형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그의 단단한 손을 손톱으로 긁으며 저항해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점점 시야가 붉어지고 있었다.

‘벗어, 나야 하는데.’

리제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리제아나는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때렸지만, 여전히 그의 몸은 돌덩이처럼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숨을 쉴 수 없어.’

점점 짧아지는 숨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희박해져 갔다. 공포심으로 리제아나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울리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끝을 맞이할 줄은…. 지금 내가 해온 것들은…. 대체….’

복수를 꿈꾸며 텐젤로 도망쳐 왔지만, 복수 외에 그녀는 삶에 있어 다른 것을 떠올려보지 못했다.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으로 아비드 제국에서의 지위와 명예가 모두 쓸모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라이핀, 그에게 비참하게 또다시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텐젤에서 이안을 만난 후, 어쩌면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여기서 이렇게 끝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 진심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여기서 죽을 수 없었다.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다고!’

사람이 죽기 직전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주마등이라고 했던가.

어린 날, 어머니와 함께 웃으며 걱정 없이 차를 나누는 모습, 어머니가 악몽을 꾼 다음 날 토닥여주던 때, 그리고…. 그리고 이안.

떠는 자신의 손을 맞잡아주던 이안, 수련을 함께하는 이안, 다치진 않았을까 매번 노심초사하며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이 한데 겹쳐졌다.

‘난 또다시… 믿었던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몸에서 힘을 빼던 리제아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아냐. 이번 생에서 그녀가 분명히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의지가 있다면 그녀의 생은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것.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아비드 제국을 떠나왔지 않나.

그리고 가문과 황실에서 벗어나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누리지 않았나.

어떻게 악착같이 버텨왔는데 이렇게 쉽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문득 리제아나는 새벽 수련을 떠올렸다.

‘벅찬 상대에게서 빠져나가 위해서 급소를 짧고 강하게 치는 것 또한 방법이야.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게 중요해.’

리제아나는 침착하게 그녀의 위로 올라탄 그를 올려보았다. 더 망설이다간 그녀가 위험해질 것이다. 리제아나는 그녀를 붙든 그의 힘을 이동해 몸을 빠르게 틀었다.

그가 비틀거리자 리제아나는 온 힘을 다해 팔꿈치로 그의 가슴 위를 내려찍었다.그가 몸이 멈칫거리는 틈을 타 그녀는 그를 밀어냈다.

“콜록, 콜록.”

그가 억세게 목덜미를 누른 탓에 목 안까지 벌써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당장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오히려 그의 흥분을 부추긴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빠르게 물러났지만, 그가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채어갈 듯이 형형하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이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리제아나가 여태껏 곁에서 보아왔단 이안과 달랐다.

어느새 그의 셔츠가 거칠게 풀어져 있었다.

매번 목 뒤의 문양 위로 묶고 다녔던 붕대도 발에 밟혀 나뒹굴고 있었다.

“으윽… 젠…장….”

“이안! 정신이 들어요?!”

그가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리제아나의 말에도 그는 무력하게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머리를 흔들던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금방이라도 그녀를 덮칠 듯이 살기를 흘렸다.

‘…안 돼.’

그를 부르던 또 다른 호칭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친개’

온몸에 소름이 들었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는 정말 사냥개처럼 보였다.

리제아나는 그의 살기로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정말 도망가야 해.’

지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리제아나는 알 수 없었지만, 그와 그녀를 위해서도 리제아나는 당장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리제아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 그의 발작에 깨진 화분 조각이 눈에 띄었다.

리제아나는 천천히 몸을 굽혀 바닥의 화분 조각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붉은 눈이 그녀를 좇고 있었다. 긴장으로 몸을 굳힌 리제아나는 얼른 그의 발치를 향해 조각을 내던졌다.

-쨍그랑

순간 그의 시선이 발치의 화분 조각으로 향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리제아나는 긴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고 정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공작저를 향해 뛰어갔다.

혹여나 이안이 그 뒤를 따라오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리제아나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이 멀어지고 리제아나는 가빠오는 숨에 더 뛸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정원을 뒤돌아보자 그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저만치로 보였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정원의 입구 앞으로 섰다.

그의 모습을 본 리제아나는 더 멀리 도망가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잠시나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리제아나는 그 자리에서 박힌 듯이 서서 걸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안….’

그의 붉은 눈이 절망과 슬픔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해칠 뻔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이 보였다. 그는 괴로운 듯이 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 위로 문득 흰 무언가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눈이었다.

“….”

거친 바람결에 눈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리제아나는 그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슬픈 얼굴을 한 그를 바라보았다.

달려가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그녀의 목을 조르던 그가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눈바람을 사이에 두고 오래 눈을 마주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한발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거센 바람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오자 리제아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더욱 슬프게 구겨졌다.

눈물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결국 비틀대던 그의 몸이 더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안!”

⚜ ⚜ ⚜

“헉…헉….”

이안은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뜬 곳은 현실이 아닌, 그가 이전에 보았던 참혹한 풍경 한가운데였다.

어린 일곱 살의 몸.

그는 고개를 올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피범벅으로 물든 알현실이 그의 시야에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이게… 무슨….”

어린 목소리가 잔뜩 떨었다.

이안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투성이였다.

‘이 장면은….’

꿈속일 것이 분명한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푸하하! 해냈구나, 해냈어!”

불쾌할 만큼 호탕한 웃음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쇳소리 섞인 웃음소리를 듣고 그는 금방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텐젤의 황제.’

이안은 황좌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자신의 지위는 까맣게 잊은 듯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이 피의 주인은….’

이안은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내려다보았다.

핏자국을 따라가니 그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주름이 많은 인자한 인상의 남성.

어린 이안의 두 손이 충격으로 떨기 시작했다.

언제나 제 등을 뒤에 든든하게 받치던 아버지, 체스펠 렌디 데벤시아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속삭였다.

“네 탓이… 아니야. 내… 소중한 아들.”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지만 이안은 본능적으로 그가 말하는 문장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안의 가장 지독한 악몽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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