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전조도 없었다. 약도 분명히 먹었다.
이안은 악다문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덜미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심장이 조각나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게 대체…!’
이안은 가슴을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저주가 발현된 것이다.
이안은 고통 어린 목소리로 심장을 부여잡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추운 한겨울이었음에도, 문양이 그려진 목덜미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이안은 짧은 신음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그는 고통에 몸을 떨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흘렀다.
“이안!”
사색이 된 리제아나가 달려와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받치고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도통 몸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할 때는 꼭… 보름달이 뜰 때였는데…?
이전에 그가 말한 저주를 떠올린 리제아나는 다급하게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괜, 괜찮으세요? 갑자기 이게…? 혹시 이건….”
“난… 후… 괜찮아.”
“하지만….”
“괜찮아. 조금만 이대로 있으면 돼.”
아직까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그녀와 닿을 때면 통증이 잠잠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리제아나가 곁에 있으니 저주로 인한 고통이 서서히 진정될 것이다.
이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색이 어두워진 리제아나는 드레스가 바닥에 끌려 얼룩이 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의 상태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손, 잡을게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땀을 흘리는 이안을 바라보며 리제아나가 굳은 얼굴로 그의 손을 가리켰다.
이안이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제아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려 뻗었다.
‘손을 잡으면….’
보잘것없는 행동이었지만 그의 고통이 치유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안은 그녀의 손을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리제아나와 닿는다면 곧 이 고통도 끝나리라. 천천히 그녀의 손을 맞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이안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 짝.
큰 마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리제아나는 강한 힘에 떠밀렸다.
“어?”
“하…?”
그의 힘에 바닥으로 밀려난 리제아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건 뭐였지?
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자꾸 흐릿해졌다. 그의 손이 두 개가 되었다가 세 개가 되었다.
심장이 자꾸 빠르게 뛰었다. 숨이 가빠왔다.
“이안!”
이안의 상태가 더 급격히 나빠졌다.
리제아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거칠게 내친 그 때문에 팔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안의 손을 맞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이 닿아도 잠시뿐 이안의 몸이 그녀를 거부하는 듯,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 들었다.
‘이전에 아팠던 모습과도 달라…!’
“으윽!”
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안이 신음을 흘렸다.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이안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태양의 문양이 화끈거릴 때면 언제나 저주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왔다. 누군가 심장을 때리는 것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리제아나가 그의 곁에 있어 준 뒤로 그 통증에 오래 고통 받을 일이 없었는데….
‘폐하가… 약을 건네주시기 전까지는… 항상….’
이안은 자신의 옷자락을 금방이라도 뜯어낼 듯 움켜쥐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황궁에 찾아가 황제로부터 약을 받아낸 후면 어느새 그는 잠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잠이 들기까지의 일은 언제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약으로 정신이 말끔히 들면 다시 일상생활을 반복하곤 했다.
‘너무 성급했던 걸까?’
어린 시절 때부터 황제에게 메어 지금까지 그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왔다. 저주로 그를 옮아 매는 황제로부터 이안은 언제나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잔혹한 황제가 이안이 목줄을 끊고 달아나는 것을 그냥 지켜볼 리가 없다.
이안은 황제의 개로 불리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런 이안 앞으로 마침내 리제아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괜찮을 것이라 너무 성급하게 판단했던 것일까.
“하아….”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이안은 이제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성이 의식 저편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안 돼.’
그리고 이내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의식을 놓치면… 앞으로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리제아나.”
쓰러진 그를 두고 걱정 어린 눈망울을 한 리제아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그에게 다가오려 했으나 연이은 그의 거부에 더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 몸이 그녀를 거부하는 거지? 그녀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길게 말할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안은 자꾸 흐릿해지는 시야에 눈을 부릅뜨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리제아나, 나한테서… 떨어져….”
입술을 바득 깨문 탓에 입가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의 말이 그녀에게 전달되었길 바라며 반쯤 흐려진 눈으로 다시 한번 그녀를 보았다.
그에게서 떨어지라니. 리제아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리 아파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어디를 가라는 걸까, 이 남자는.
리제아나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다시 몸을 붙이려고 했지만 이안이 또 한 번 그녀를 밀어냈다.
‘제기랄 더 눈을 올려다볼 기력도 없어….’
이안의 몸에 점점 더 힘이 빠졌다. 흐릿하기만 했던 시야가 이제 어둠 속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리제아나에게 도망가라는 눈빛을 보내며 끝내 의식을 잃었다.
“…이안?”
그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 리제아나는 그제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미동조차 없는 이안에게 리제아나가 다가갔다.
“이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이안…?”
한차례 침을 삼킨 리제아나는 마지막 남은 발자국을 떼며 그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의 눈꺼풀은 아직 굳게 감겨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다량의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안!”
심상치 않은 그의 상태에 리제아나는 그를 자신의 무릎 위로 머리를 대게 했다. 그는 땀에 푹 젖어있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어.”
리제아나는 제 소매로 얼른 그의 땀을 훔쳐냈다. 아까 이안에게 맞은 팔이 아팠지만, 이안이 먼저였다.
이곳은 그의 공작저 안이었다. 저택 안의 사람들은 그의 저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이안은 그의 저주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
생각이 그 지점까지 미치자 리제아나는 더욱 지금의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 이안! 정신 좀 차려봐요!”
리제아나는 불안한 생각들을 털어버리며 이안을 깨우기 위해 흔들었다.
“윽….”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미동도 없던 이안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들어요?”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리제아나가 다급히 그를 깨우며 물었다.
하지만 이안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녀를 향해 치켜뜬 붉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타오를 듯이 붉게 빛나는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빛나는 붉은 눈과 리제아나의 눈이 마주치자 이안이 숨을 가쁘게 들이마셨다.
‘호흡이 불안정해.’
이안의 모습에 리제아나의 불안이 더 깊어졌다.
“흡!”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형형이 빛나며 그가 리제아나의 무릎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며 일어났다.
“이안? 일어날 수… 있어요…?”
리제아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혹, 그가 쓰러질까 두려워서였다.
고통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던 이안이 문득 짐승처럼 포효했다.
이내 그는 그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답답하다는 듯 거칠게 찢어냈다.
그리고 그는 거칠게 제 팔을 휘두르며 정원의 물건을 부수고 깨트리기 시작했다.
정원의 꽃과 화분 그리고 작은 의자들이 바닥을 굴렀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온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짐승처럼 행동하고 있어.’
갑작스럽게 거칠게 물건을 부수는 이안에게 놀라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때 이안이 새빨간 홍채에 리제아나를 담으며 멈추어 섰다.
“이안, 이러지 말아요.”
“크윽-”
“이안! 컥-”
찰나였다.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이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야수처럼 달려들어 그녀에게 올라타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