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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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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이안은 옆을 돌아보았다. 함께 다락방 벽에 등을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언젠가부터 그녀에게서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이안이 그녀를 향해 돌아보았다.

“….”

이번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앉아있던 자리에서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안은 그제야 그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 깜짝 놀랐잖아. 정말.”

이안은 낮게 숨을 내쉬고는 조금 더 그녀 옆으로 붙어 앉았다.

딱딱한 다락방의 바닥이 불편했지만,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낡은 오두막의 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다리를 끌어 안은 이안은 천천히 리제아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매일 같이 보는 얼굴이었는데도, 볼 때마다 더 보고 싶어지는 이유는 뭘까.

“윽….”

리제아나가 잠결에 작게 신음을 냈다. 그러자 이안이 흠칫 놀라며 그녀를 살폈다. 그러자 그녀의 작은 입에서 신음과 함께 작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이지 마….”

간절한 목소리에 그가 멈칫했다.

“죽이지 마….”

잠꼬대는 다시 또 이어졌다.

“이대로….”

이안은 눈썹을 접으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웅얼거리며 말하는 탓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이안은 그녀에게 귀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이대로… 사라질 테니까….”

“…?”

“잊어줘. 라이….”

그 말을 끝으로 리제아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듯 입을 더 열지 않았다.

이안은 새근거리며 잠에 빠진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대는….”

이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 아래로 흘러 내려온 그녀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헝클어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내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도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

당연히 답은 없었다.

불안한 얼굴로 미간을 구기며 잠에 빠진 그녀를 그는 조심스레 머리를 쓸어주며 생각했다.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어.’

조금 전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이안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쓸며 폈다.

“조금 더 자둬.”

속삭이듯 말하며 그녀가 더 편하게 몸을 누일 수 있도록 자신의 어깨에 몸을 기대게 하던 찰나였다. 문득 목 뒤로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 젠장.”

고통이 느껴지자 그는 익숙하게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약병의 마개를 따고 입안으로 흘려 넣은 그는 손바닥의 빈 약병을 내려다보았다.

리제아나가 끙 신음을 흘리며 잠결에 몸을 뒤척이자 그는 약병을 내려놓고 자신의 어깨에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다.

리제아나가 낮게 숨을 고르는 소리에 자꾸 심장이 뛰었다.

⚜ ⚜ ⚜

“-제, 일어나. 리제!”

언제 잠들었던 건지 이안이 잠결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리제아나를 내려보며 그녀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안…?”

리제아나는 짧은 하품과 함께 흐릿한 시야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이안을 응시했다.

“너무 곤히 자서 못 깨웠어. 어서 일어나. 벌써 하늘이 어두워졌어.”

정말 그의 말대로 해가 지고 어둑해진 하늘이 창 너머로 보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난 모양이었다.

“정말…이네요.”

“다락방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 모양인데?”

“네, 따뜻하고 아담해서 좋아요.”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그가 낮게 웃었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샌드위치를 먹은 것까지는 또렷하게 기억났지만, 정확히 언제 어떻게 잠에 빠져들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보여줄 게 있어.”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락방에서요?”

“응? 아니 정원. 밤이니까 더 추울 거야. 내 코트라도 줄까?”

리제아나는 이안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밤이잖아요. 이안도 춥잖아요.”

“어디 걸리거나 하진 않고?”

하늘이 새카맣게 어두워진 것을 보니 벌써 저녁이 다 된 모양이었다.

마치 큰 베개에 편안히 몸을 누인 것처럼 생각보다 몸이 가뿐했다. 그래서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아나, 정원으로 갈까?”

“정원이요?”

“응, 밤에 가면 또 다르거든.”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가 밤에 정원을 방문하자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동의의 의사를 표했다.

이안이 그녀의 손을 끌며 다시 한번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바닥에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일 없이 밖으로 나왔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리제아나를 보며 이안이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은 다시 정원을 향해 걸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정원 온실 안은, 곳곳에서 반짝이는 마법석 덕에 그 분위기가 더욱 돋보였다.

리제아나는 조금 전 보았던 두 번째 구역의 꽃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파리밖에 보이지 않았던 줄기에서 달빛처럼 빛나는 꽃망울들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와…!”

리제아나가 꽃에 홀려 감탄을 내뱉었다. 아름다운 꽃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그녀를 이안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리제아나.”

“꽃이 너무 예뻐요.”

“응. 그대도 예뻐.”

“…네?”

“리제아나.”

그녀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그가 한걸음 그녀를 향해 바짝 가깝게 다가섰다.

“나, 그대가 좋아.”

담담한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안?”

그가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그녀의 턱 끝을 올렸다. 그의 붉은 적안이 타오를 듯이 반짝였다.

“나.”

그녀의 턱 끝을 매만지던 그가 이윽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볼을 감쌌다.

“그대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

“복잡하게 생각하라고 내던진 말이 아니야. 그냥 내 진심을 고백하고 싶었을 뿐이야. 답은 늦게라도, 아니 주지 않아도 돼.”

그게 더 어려운 일 아닌가요.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리제아나는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처음이라.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군.”

다시 손을 내린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멋들어진 사랑 고백 같은 건 더더욱 모르겠어.”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침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아나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이안이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르힌이 거대한 꽃과 케이크를 주면서 고백해보라 전하더군. 케이크는 없지만 예쁜 꽃이 한가득 있는 곳은 어떨까 했어.”

“하하.”

장난기 섞인 말투에 리제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자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타들어 갔던 마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정말 그녀를 원하고 있던 것이다.

“이안….”

리제아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요?”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챈 그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진심이야.”

그는 마치 변하지 않을 사실을 말하듯 이야기했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내 마음은 앞으로 변할 일 없어.”

이어지는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그의 진지한 얼굴에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상처가 많다는 건 옆에서 지켜봤기에 알아. 그래서 섣불리 나를 받아달라고 말할 생각도 없어.”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이 일순 떨었다.

매번 여유롭게 미소짓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그는 그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에 불과했다.

“당신이 나를 받아들 수 있게. 내가 노력할게. 내 마음을 행동으로 증명할게.”

손을 뻗은 이안이 그대로 리제아나의 손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 위에 입맞춤했다.

간절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리제아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갔다.

사랑.

사랑이 뭘까?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처절하게 배신 당했다. 리제아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다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일도, 누군가를 사랑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는….”

멍하니 서 있던 리제아나는 시선을 조금 내려 달빛처럼 빛나는 꽃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윽-”

그때였다.

리제아나가 그가 내뱉은 고백에 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이안이 괴로운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이안이 고통스럽게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목덜미를 잡으며 찌르는 듯한 아픔에 못 이겨 무너지듯 천천히 몸을 굽혔다.

어느새 그의 목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안?”

리제아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걱정스럽게 그를 불러보았지만, 고통 속을 허우적거리는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이안!”

그녀는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보다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그의 몸을 받쳐 들긴 무리였다.

저주가 발현될 때마다 그의 손목이나 신체 부위를 닿으면 잠잠해졌기에 다급히 그를 잡으려 들었다. 이안이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휘둘러 그녀를 밀쳤다.

“악!”

리제아나의 짧은 신음과 이안의 거친 숨소리가 한 데 어울려 동시에 울렸다.

뭔가가 이상했다.

이전에는 닿는 것만으로도 진정되었는데 그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리…제아나.”

이제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며 이안이 쇳소리가 섞인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서…당장 … 떨어져….”

왜인지 약이, 효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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