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17)

16615179155515.jpg

59화

정원을 끝으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아직 이안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리제아나는 찬 바람을 막아주며 자신의 앞에서 걷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녀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던 그가 떠올랐다.

‘정말 예뻐. 리제아나.’

분명 그는 꽃이 아닌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의 붉은 적안이 일렁이며 그녀를 담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자 절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리제아나는 붉게 물든 자신의 뺨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날이 춥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이 열기는 추운 바람 때문에 나는 것이다. 리제아나는 그렇게 자신을 되뇌었다.

공작저의 앞문으로 향하던 이안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생각에 잠긴 듯 앞문을 바라보던 그가 리제아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여기가 아니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던 이안이 눈을 장난스럽게 반짝거렸다. 리제아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공작저로 들어가려고 하지?”

이안이 느긋하게 답했지만,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른 방향이었다.

“여긴 앞문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잖아요…?”

“그새 길을 외웠네.”

“어려운 길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 저택에 잠시 머물렀던걸요.”

“그래, 여긴 앞문이 아닌 뒷문으로 가는 길이야. 내가 설마 리제를 데리고 어디 좋지 않은 곳이라도 갈까 봐?”

그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끌었다.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결국 리제아나도 마지못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얼마 후 공작저의 뒤편에 다다르자 문 하나가 보였다.

화려한 장식들이 있던 다른 공작저의 문과 달리 그들 앞의 있는 문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오크나무로 덧대어진 문이었다.

“정말 뒷문 맞아요…?”

미심쩍게 문을 응시하며 리제아나는 불신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안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자, 어서 들어가자.”

그는 그녀를 재촉할 뿐이었다.

이안의 손에 떠밀려 문 앞에 선 리제아나는 발을 주춤거렸다.

희미한 등불이 문 앞에 걸려있었지만 문 너머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자, 잠시만요. 이거 정말….”

리제아나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이안은 가볍게 리제아나의 허리를 끌며 문 너머로 발을 디뎠다. 그들이 어둠 속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발자국 더 발을 내딛는 순간, 그들의 발아래로 마법진이 밝게 빛을 뿜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그들을 감싸 안으며 공간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악!”

리제아나의 짧은 비명이 이를 뒤따랐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듯이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스쳤다. 이윽고 두 사람은 허공에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 짧은 순간에 이안이 재빠르게 리제아나를 감싸 안아 다치지 않았다.

“괜찮아?”

리제아나의 머리를 감싸 안은 이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급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리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여기가 어디예요?”

“다락방. 내가 옛날에 쉬고 싶을 때마다 찾던 장소지. 나만 찾을 수 있게 마법 통로를 만들었었지.”

“마법 통로요? 아까 그 문이요?”

“어릴 때니까 아직 마법에 서툴 때였지. 그래서 가끔 이렇게 떨어질 때도 있어.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이안도 어렸을 땐 미숙했군요.”

“당연하지.”

그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리제아나는 아직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품 속의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의 타오를 듯한 적안이 가까이에 있었다. 정면으로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 리제아나가 당황하며 순간적으로 몸을 뺐다.

그 덕분에 엉거주춤 앉은 상태였던 둘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앗.”

“윽.”

-쿵

정신을 차려보니 두 사람은 우스꽝스럽게 몸이 겹쳐진 채로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푸핫.”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이안이 커다랗게 웃었다.

“그렇게 당황해서 얼굴까지 뺄 일이야? 아하하.”

이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털고 일어났다.

“머리는 괜찮아, 리제?”

“애초에 당신이 갑자기 그렇게 가까이 오지만 않았으면….”

그녀 역시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얼떨떨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부딪힌 이마 한쪽을 매만졌다. 그러자 이안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부은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리를 유심히 쳐다보던 이안이 말하자 리제아나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만졌다. 하지만 부은 곳이나 아픈 곳은 딱히 없었다.

“장난이야.”

“이봐요. 이안.”

“푸핫. 미안해. 그대만 보면 자꾸 장난이 치고 싶어서.”

낮게 웃으며 그가 오래된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다락방에 찾아왔더니 좋네. 옛 시절들이 떠올라.”

이안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흐려졌다.

이내 그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좁은 다락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방안의 물건들을 쓸었다.

먼지가 쌓여있는 책장들이나 다락방의 오래된 창문으로 비치는 흐린 하늘은 방안의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어릴 때.”

이안이 손을 들어 책장 위에 쌓여있는 먼지를 얇게 쓸어냈다. 그는 손가락에 묻은 먼지를 입바람으로 날려 보내며 말했다.

“아버지를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빠졌었지.”

리제아나는 다른 말을 붙이는 대신, 조용히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론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리제아나는 그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긴 이야기도 아니야.”

이안이 허망감이 담긴 눈으로 애처롭게 웃었다.

그는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일 이후로 시엘이나 로베시트가 내가 어디를 가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따라다녀서.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찾아낸 장소지.”

“아….”

이어 리제아나의 짧은 탄식이 이어졌다.

“사실은 이 장소,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찾아낸 거야. 아마 아버지가 소년이실 적에 만들어놓았던 곳이겠지. 낡은 마법에 내가 마법을 덧씌워 불안정한 거야.”

그는 말을 마치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번째 책장에 다다랐다.

오랜만에 와보는 다락방이었지만 유년 시절, 매일 같이 몰래 찾아왔던 장소인지라 몸이 기억했다.

그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건.”

이안은 책에 쌓인 먼지를 소매로 닦아냈다.

“리제, 이것 봐!”

그가 반가운 듯 그녀에게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금방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

리제아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손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책은 다름 아닌 선대 데벤시아 공작이 이안의 어릴 적 초상화를 담아둔 것이었다.

“내 유년 시절의 초상화들을 모아두었던 책인 듯싶어. 오랜만이네.”

“이안의 어릴 적 모습…?”

“왜? 궁금해?”

“아뇨 그게 아니-”

“좋아, 어차피 하늘이 어두워지기까지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이곳에서 몸을 녹이고 있다가 가면 되겠네. 마침 샌드위치도 가져왔어.”

언제 챙겨온 건지 이공간 안에서 신선한 재료들로 만든 샌드위치를 그녀 앞에 두었다. 그리고 그는 보온 마법을 방안에 뿌렸다.

“이건 또 언제 챙겼어요?”

“내가 얼마나 계획적인데. 그럼 점심 먹으면서 책을 볼까?”

“어, 이건?”

책을 펼치기 무섭게 손바닥만 한 작은 초상화가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책에서 떨어진 초상화를 주워든 리제아나가 그림 너머의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터질 듯한 볼과 새하얀 백발. 이안을 닮은 아이가 세상만사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잔뜩 치켜뜬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귀여운 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어렸을 적 초상화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당황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안을 잠시 응시하던 리제아나가 피식 웃었다.

민망했던지 슬금슬금 초상화를 다시 책 사이에 끼워 넣고 덮는 이안에 리제아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안이 꺼냈으면서 안 보여주는 거예요?”

은근슬쩍 책을 다시 제자리로 넣으려던 이안은 찔끔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니…. 나도 모르게 손이 가서 꺼냈는데 이렇게 어린 시절 때 사진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응?”

“왜요, 귀여운데요? 더 보여주지.”

입을 살짝 내밀은 리제아나가 귀여워 보였던 이안은 순간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다행히 그 전에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손을 도로 내뺐다.

“내가 이렇게 심통 맞게 생겼을 줄은 전혀 몰랐지.”

“하하, 지금과 크게 다를 거 없는데요.”

그는 책을 넘겨주는 대신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리제아나는 그에게서 샌드위치를 받으며 물었다.

“이런 샌드위치는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챙기시는 걸 못 봤는데.”

리제아나는 샌드위치를 받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왜인지 익숙한 맛이었다.

“어라, 이 맛 어디선가 먹어본 기억이….”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저번에 시장에서 함께 먹었었던 샌드위치잖아. 시엘이 그 주인장이랑 인연이 좀 있어서 레시피를 알고 있거든.”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샌드위치를 향해 손을 뻗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시엘 님이 만드신 거예요?”

“맛은? 맛은 어떤데?”

그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답을 기대하는 듯한 그의 눈치에 리제아나는 답했다.

“맛있네요.”

담백한 빵과 연어가 양상추, 양파와 제법 잘 어우러져 맛있었다.

“휴우. 그게 다행이네.”

그 말을 듣고 이안이 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

리제아나가 의문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거 사실은 내가 만들었거든, 어젯밤에. 맛이 없을까 봐 걱정했어. 맛도 안보고 급하게 만들어본 건데. 입맛에 맞았다니.”

그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짐짓 자신을 믿으라는 듯 가슴을 툭툭 쳤다.

“다음엔 더 맛있는 걸 해줄게. 내가 요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그때 다른 것도 만들어줄게. 지금은 샌드위치로 만족하기로, 약속.”

“…딱히 다른 걸 기대한 적은 없는데요….”

“약속.”

“…약속.”

이안의 재촉에 리제아나는 할 수 없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정말로 그 책은 안 보여줄 거예요?”

갑작스러운 리제아나의 말에 이안이 주춤했다. 그 바람에 사레가 들렸는지 그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이안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자 당황한 리제아나는 황급히 바구니 안에 있던 물병을 꺼내 건넸다.

“그렇게까지 보여주기 싫은 거예요?”

리제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요란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결국, 그녀는 그의 초상화를 보기를 포기하고 그가 기침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