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네르아는 아직도 기억했다. 처음 광각초를 실험했을 때를 말이다.
리제아나에 의해 만들어진 광각초를 실험하라는 명에 네르아는 황궁을 찾았다.
그녀는 지하감옥 앞에 섰다.
사형을 앞둔 범죄자들이 있는 장소였다.
큰 범죄를 저지르거나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사형을 선고받고 그 끝을 기다리고 있는 곳.
누구도 그곳을 섣불리 빠져나갈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이 탈옥하려고 해도 감옥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결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닥에 곰팡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피어 온갖 벌레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일말의 자유조차 없는 지옥이었다.
“따라오시죠.”
보좌관인 일레네는 황제가 명령을 내리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네르아를 데리고 알현실을 나갔었다.
그는 곧장 지하 감옥의 가장 끝쪽으로 걸어가 황제에게서 방금 전 하사받은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열쇠 구멍에 이를 집어넣고 돌렸다.
잔뜩 녹이 슬어버린 쇠문이 시끄럽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의 어두운 공간을 보던 일레네가 네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죠?”
“이후로는 어둠뿐입니다. 발을 헛디뎌서 광각초고 뭐고 다 허사로 만들고 싶으시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그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계단을 가리켰다.
네르아는 탐탁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일레네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폐하께서 절 이곳으로 보내셨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광각초를 마음껏 실험해보시라는 뜻이시죠.”
어둠 속을 걸어 내려가면서도 일레네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한편 네르아는 온몸의 근육들이 긴장하며 팽팽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착했습니다.”
일레네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쓰레기장에 몇 달이나 묵힌 쓰레기 냄새가 났다. 네르아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코끝을 잡았다. 하지만 코로 냄새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윽.”
“냄새가 많이 지독해도 적응하려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럼,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반면 일레네는 익숙하다는 듯이 네르아의 나머지 한쪽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복도 끝으로 걸어간 그들은 발로 차면 부서질 것 같은 문 앞에 섰다. 네르아는 눈을 치켜떴다. 문 앞으로 결계가 있었다.
‘이렇게 촘촘한 결계라면, 저하께서 친 결계인가.’
이런 고위급 마법에는 섬세한 기술과 함께 큰 힘이 필요하다.
이안의 생각에 저절로 네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을 여시죠.”
네르아의 말에 일레네가 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결계가 비켜 서서 황제의 보호 아래 있는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길 허락했다.
“살인마 제파르토입니다. 내일 사형이 확정된 죄수지만 광각초의 위력을 시험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뭐라고? 나를 감히 실험체로 쓰다니! 나 제파르토가 그리 하찮게 죽는다는 거냐!”
일레네가 말을 마치자마자 팔과 다리가 모두 묶여있는 남성에게서 호통이 들려왔다.
네르아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이안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살인자 제파르토, 라고 했나.”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차라리 나의 목을 거리에 매달아라! 나는 그저 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 것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식구들이 죽을 것이었다고!”
“하찮은 살인자 따위가.”
생각을 마친 그녀가 굳은 결심을 한 듯 메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을 방식까지 멋대로 선택하는군. 참으로 대담하기도 하지. 보좌관님은 잠시 나가계시죠. 광각초를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시선에 일레네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너, 뭐 하는 짓이야.”
네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연중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Liberatio(해방)”
그녀는 광각초 향의 봉인을 풀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네르아는 몸이 묶여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파르토를 끝까지 바라보지 않았다.
제파르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네르아는 재빠르게 방을 나오며 냄새 하나 흘러나오지 않게 문을 단단히 막았다.
몇 분이 지나고, 방안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문을 부술 듯이 강하게 치는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비명이 더 커졌군요.”
일레네의 말에 네르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어가 볼까요?”
“광각초의 향이 남아있을 겁니다. 광각초의 위력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요.”
문을 열려던 일레네의 손을 저지한 네르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아까 들려온 부러지는 소리는 필시 살인마를 묶어두던 제어 장치일 겁니다.”
“그렇다면.”
“네, 광각초가 아무래도 성공한 모양이군요.”
만족스럽지 못한 성공이 더 찝찝한 법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비록 자신이 광각초를 제조했지만 결국 모두 그 포로라는 여자가 말한 대로 되었다.
네르아는 생각에 잠기며 그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이상 더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불현듯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 ⚜ ⚜
리제아나는 거대한 온실을 채운 가지각색의 꽃들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동양의 제국에서 들여온 온갖 희귀한 품종들이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들을 뽐내며 서 있었다. 꽃들은 모두 건강하고 싱싱해 보였다.
“겨울… 맞죠?”
“응, 겨울이야.”
깜짝 놀라며 꽃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리제아나가 문을 닫고 있던 이안에게 물었다.
“안이 더울 정도로 따뜻하네요.”
“꽃들에게 맞는 온도로 내가 마법을 걸어서 그래.”
“우와….”
어디선가 본 듯한 꽃들도 눈에 띄었다. 리제아나는 온실 안을 거닐며 꽃들을 구경했다.
외곽에 있는 첫 번째 화단에는 붉은빛의 꽃들이 있었다. 두 번째 화단에는 아직 잎이 피지 않은 굽어진 줄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저긴 뭐예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첫 번째 화단이 있는 자리였다.
“저곳은 내 보온 마법이 필요하지 않은 곳. 동양에서 특별히 공수한 동백꽃이야. 겨울에 자라는 꽃이라는군.”
“겨울에 피는 꽃이라고요?”
“이쁘지?”
“네, 예쁘네요.”
겨울에 피는 꽃이라는 말에 리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생명력이 강한 꽃인 모양이었다.
“궁금한 게 더 있는 모양인데. 천천히 보도록 해.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이따가 밤 산책하러 한 번 더 들르자.”
무엇부터 구경해야 하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리제아나를 보며 이안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요?”
“응. 아까부터 시선이 저쪽에 가 있던데. 동백꽃 말고도 저게 궁금했었던 모양이지?”
언제 눈치챈 것인지 이안은 리제아나가 눈여겨보던 두 번째 화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을 할 것 없어. 그대 눈에 다 쓰여있던걸. 저 꽃은 아직 필 시기가 아니야. 필 시기가 되면 그대를 저 꽃이 더 많이 심어진 내 영지의 다른 저택으로 데려다줄게.”
“약속하신 겁니다.”
그녀의 심드렁한 눈빛으로 짧게 입을 삐죽거리다 도로 시선을 꽃들에게로 돌렸다.
‘어디서부터 보지? 너무 예쁜데.’
먼저 제일 가까이 있는 꽃 팻말로 걸어간 그녀는 쨍한 노란빛을 머금고 있는 꽃을 관찰하다 다시 팻말로 눈을 돌렸다.
“어, 이건 메리골드네요. 눈 건강에 좋은 꽃이라는 사실을 아세요?”
메리골드. 이름도 어쩜 이리 잘 어울리는지, 예쁜 꽃들이 한곳에 모여있으니 눈이 즐거워졌다.
그다음 칸에는 스토크라는 꽃이 있었다.
겉잎은 수수한 분홍색이나 안쪽의 꽃잎이 연노란색인 꽃이었다. 리제아나가 잘 아는 꽃이었다.
“이건 스토크라네요. 향이 좋고 모양이 예뻐서 장식용으로 자주 쓰이지요. 이렇게 모아두시기만 하니, 몰랐죠?”
‘마지막으로 꽃놀이로 나들이를 나갔던 게…. 언제였더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이었나?’
그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한껏 추억에 젖어있던 리제아나는 그제야 이안을 돌아보았다.
기껏 알려주고 있는데 집중조차 하지 않다니.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응 예쁘네….”
이안이 조용하게 뇌까렸다.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리제아나는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마주했다.
“정말 예뻐. 리제아나.”
그녀의 눈을 천천히 응시한 이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