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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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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두 사람은 새벽에 일찍 공작저에 방문하고서 밤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날, 이안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결국 하루 머물고 오기로 했다. 덕분에 리제아나의 짐이 더 늘어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시엘에게 짧게 인사를 한 리제아나는 그녀에게 옷이 담긴 가방을 넘겨주었다. 리제아나는 이안의 안내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공기 중에 풍겼다.

“앉지.”

“네.”

이안이 먼저 의자를 빼내어 리제아나에게 고갯짓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리제아나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못 먹는 거 있어?”

“아뇨, 다 잘 먹어요.”

“오늘 식사는 뭐지?”

이안은 자리에 앉아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뒤에 서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오늘의 식사는….”

시종이 막 입을 열어 답하려고 하자 주방과 연결된 식당 문이 열렸다. 뒤이어 시종들이 음식을 들고나왔다.

“크흠…. 먼저 에피타이저로, 단호박 수프입니다.”

음식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말이 끊겼던 시종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들 앞에 음식이 놓이기 시작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호박 수프는 둥근 접시에 담겨 있었는데, 탐스러운 노란빛 위로 파슬리가 뿌려져 있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입맛을 다시며 리제아나가 숟가락을 들었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많이 먹어.”

간단하고 속 가벼운 음식들이 연이어 등장했는데, 잘 달구어진 토스트와 함께 선홍빛 소시지, 계란 요리 그리고 샐러드가 나왔다.

이안이 디저트로 무엇을 먹고 싶냐 물었지만 이미 충분히 배가 불러 리제아나는 거절했다. 이안은 간단히 핫초코 한 잔을 부탁했다.

배가 채워지자 몸이 따뜻해졌다. 거실로 나온 두 사람은 난로 앞 소파에 앉았다.

리제아나는 이리저리 저택 안을 살폈다.

저번에 왔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실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저번 가을에 보았던 것과 달랐다.

이안은 시엘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리제아나는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보던 것과는 다른데…?”

“눈치챘어?”

시엘과 이야기하던 이안은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낮게 웃으며 답했다.

“아, 이야기하시던 중 아니셨어요?”

“다 끝났어. 아무튼, 잘도 눈치챘네.”

“네? 뭐가요?”

이안은 잠시 입을 닫고는 손가락으로 가구들을 가리켰다.

“?”

“데벤시아 공작저는 계절마다 가구의 색이나 장식들을 바꾸니까요.”

이윽고 시엘이 짤막하게 답하며 고개를 숙이곤 물러갔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한 번 더 방을 크게 둘러보자 그녀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전에는 갈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검은색 바탕에 빨간 체크무늬의 카펫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가구들도 모두 바꾼 모양이었다.

“궁금증은 다 풀렸어?”

“아뇨. 하나 더 있어요.”

“응, 말해. 혹시 이제 어디 갈 거냐는 질문이었어?”

이안의 물음에 리제아나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쉽게 읽을 줄이야.

“온실 정원. 이전에 말했지, 예쁜 꽃이 많은 곳이 있다고.”

이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단단히 챙겨입어. 그 안은 따뜻하지만 가는 길은 추우니까.”

⚜ ⚜ ⚜

결국 그를 따라 공작저 뒤편에 위치한 거대한 온실로 향했다.

시엘이 따라나서겠다고 했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이 거절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정원 온실을 향해 걸었다. 코트 따위는 막을 수 없다는 듯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와 차가운 기온이 스며들었다.

“으으….”

정말 그의 말대로 밖은 매우 추웠다.

온실까지 거리가 조금 있어 두 사람은 걸어야 했다. 애써 이안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코트를 꽉 여몄다. 하지만 바람을 막아내기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겨울이 좋아.’

리제아나는 찬공기를 들이마셨다.

겨울의 시린 기운은 몸을 경직되게 하지만 정신만은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작은 온기마저 소중하게 하는 이 냉기가 리제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추워?”

몸을 잔뜩 움츠린 리제아나와 다르게 이안은 추위를 타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는 외투조차 입지 않은 채였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온실을 향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억울해져 그녀 또한 몸을 피려 했으나 곧바로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자세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리제아나는 강인한 척 어깨를 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리제아나가 뒤에서 그를 따라가고 있던 도중이었다.

이안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추자, 리제아나의 발걸음도 따라서 멈추어 섰다.

“왜요?”

“거짓말 좀 하지 말래도. 그대는 왜 자꾸 아닌 척하는 거지? 힘들 땐, 힘들다고. 추울 땐 춥다고 말해도 돼.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대라고.”

이안은 돌아서서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리제아나의 고개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들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리며 웃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리제아나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번에는 함께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다가 추워서 걸음이 느려진 거잖아. 추울 땐 몸을 움직여서 열을 내야지.”

“설마… 여기선 안 돼요, 이안.”

“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안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자 직감적으로 그의 생각을 눈치챈 리제아나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서 이안이 뛰기 시작했다.

“아, 정말!”

뺨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부딪혔다.

이안의 손에 이끌려 리제아나도 뒤따라 뛰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펼쳐졌다.

리제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 ⚜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제가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방 밖에서 대기하던 샐리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며 델리사를 불렀다.

“아니…. 절대 들어오지 마…! 난 괜찮아.”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는 끝내 샐리에게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녀인 그녀에게 들어갈 권한이 없었다.

결국 문고리를 잡으며 입술을 짓씹을 뿐이었다.

‘도대체 저번부터 영문 모를 여자랑 왜 자꾸 이야기하시는 거야…. 불안하게…’

어려서부터 델리사를 모셔왔던 샐리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밖에서 그녀를 걱정하는 샐리를 두고 델리사는 네르아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나보고, 살인을 하라는 거야?!”

네르아를 뾰족하게 바라보며 목소리에 날을 세운 델리사가 재차 되물었다.

“살인이라니요,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깜짝 놀라겠습니다. 살인은 아닙니다.”

“그럼?”

“조금 분탕질을 쳐보자는 이야기라고요.”

아무리 델리사를 살살 굴려보아도 네르아의 계획대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답답해진 네르아가 먼저 말을 꺼내버린 것이었다.

네르아는 황제의 연인인 델리사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누차 말했지만 네르아, 난 사라진 그 여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라이핀 그를, 폐하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부추기는 거지?”

“….”

델리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네르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네르아는 그녀의 시선에서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정말 그것으로 만족하시냐고 벌써 여러 번 물은 것 같은데요.”

“나 역시 이미 여러 번 답을 준 것 같은데. 이미 난 결론 아니야? 뭐가 더 알고 싶은 건데.”

“그때는 제가 준 향수가 효과가 있었을 때였으니까요.”

“!”

네르아는 더이상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델리사였다.

“현재 폐하께서는 델리사 님을 만나주지 않잖아요? 그러니 향수로 그를 매혹할 수도 없지요.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

“….”

델리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네르아는 연이어 그녀를 다그쳤다.

“게다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황비를 찾으려는 걸까요? 그 여자가 사라졌다면 델리사 님을 황비를 세울 수도 있으니 그로서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만약 정말 델리사 님을 사랑하셨다면요.”

“그건…!”

“그건? 뭔데요? 황제로서의 위엄과 예의를 차리기 위해? 그렇다면 폐하는 왜 그렇게까지 그녀를 찾으려는 걸까요, 도대체 왜?”

“….”

“그날 꽃집에서 보았던 남자가 틀림없는 폐하라면서요. 델리사 님을 그리 아끼셨던 분이 왜 그리 가셨나요?”

“네르아 잠시만….”

속절없이 몰아치는 네르아의 뾰족한 질문에 델리사가 그녀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자꾸 도망치시기만 하면 뭐가 남는데요?”

“그만…!”

“뺏겨서는 울기만을 반복하다 그때가 돼서야 후회할 건가요?”

“그만!”

“정말.”

“….”

“모든 것을.”

“….”

“잃어버리고 나서야?”

네르아의 은근한 속삭임에 델리사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

델리사가 머리칼에서 손을 떼며 멍한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죠.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희는?”

“빼앗은… 사람에게… 똑같이 돌려줘야지. 이 절망감을.”

델리사는 침을 삼키며 다시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똑같이 돌려주는 수밖에, 없어.”

네르아가 비릿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확해요. 이제 우리 다시 계획을 세워 볼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한번 결심한 이상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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