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저하?”
“아아, 그래.”
능글맞게 입꼬리를 틀어 올린 이안은 몇 번이고 공작저로부터 온 편지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공작저에서 올 소식은 제가 알기로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죠.”
“그래. 좋은 소식이 왔군.”
“…다행입니다.”
반쯤 확신하여 물었던 것이었지만 적중한 듯싶었다.
공작저에서 편지를 보내올 사람은 마탑 관련 업무나 공작저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시엘과 시종장인 로베시트뿐이었다.
‘역사서를 찾은 건가….’
하지만 역사서를 찾았다는 흡족함 이상으로 이안은 기분이 들떠있는 듯 보였다.
“아, 그렇지.”
그때 하르힌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이안이 짧게 덧붙였다.
“네?”
“이틀 후에 리제와 공작저를 방문할 예정이다.”
“네? 하지만….”
하르힌도 데벤시아 공작저의 충실한 보좌관이었기 때문에 이안의 프로디터 체포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까지 알고 있었으니 이안의 돌발 계획에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는데 그 후가 더 바빠질 것 같아서 미리 다녀오는 것뿐이야. 그 미심쩍은 눈 좀 거두지?”
“….”
그의 말에도 하르힌은 불신 어린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이안이 눈썹을 얕게 찡그렸다.
“왜, 또 뭔가가 불만인가?”
“아, 아니거든요.”
언제나 약속한 시간을 항상 칼 같이 지키는 이안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아 매번 노심초사하는 하르힌이었다. 이안의 눈치를 살피던 하르힌이 계속 궁금하던 것을 물어왔다.
“저… 저하, 혹시 네르….”
“난 간다.”
하르힌이 미처 네르아의 이름을 모두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먼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은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를 고하며 문 너머로 사라졌다.
단호한 그 뒷모습에 하르힌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르아….’
정보를 알아봐 주는 길드에 의뢰해보기도 하고 황제에게까지 직접 서신을 통해 물어보았지만, 한결같이 답은 같았다. 그들도 네르아의 행방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라졌는데 이안 님은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못내 이안이 미워졌지만 지금은 집중해야 할 것이 있었다.
프로디터 체포 계획. 황제가 직접 명령한 중요한 일이었다.
‘집중하자, 하르힌.’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 하르힌은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네르아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 ⚜ ⚜
이틀이라는 시간은 눈 깜빡할 새 없이 지나가 버렸다.
오늘만큼은 훈련도 쉬기로 했다.
일찍 일어나 준비하기로 약속했었기에 이안와 리제아나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하르힌은 홀로 마탑을 지키게 되었다.
같이 가자고 몇 번이고 설득해보았지만 하르힌은 단호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혹여나 네르아가 돌아올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마탑을 지켜야 하니까요.”
하르힌은 함께할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리제아나는 약속대로 이안을 기다리기 위해 마탑 건물 앞으로 나왔다.
아직 새벽이었기 때문에 사위가 고요했다.
리제아나는 털이 솜이 달린 베이지색 케이프 코트에 검정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머리도 매만져 빗으로 빗겨주었다.
“으…. 추워….”
우뚝 선 마탑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안의 손을 잡고 마탑에 들어섰던 날이 떠올랐다.
그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이안이 마련해준 방에서 시간을 보냈던 리제아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유를 만끽하기 충분했다.
그가 마련해준 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있었다. 고전 책과 역사책, 심지어 소설책까지 마련되어 있어 리제아나에게는 다른 오락거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이지.’
하지만 홀로 밤을 맞을 때면 아직 떨쳐내지 못한 아비드의 기억들이 아직 그녀를 괴롭혔다.
“아직인가….”
입에서 흰 입김이 흘러나왔다.
벌써 겨울이었다. 처음 텐젤에 왔을 때보다 비교도 할 수 없게 추워졌다.
리제아나는 벌써 앙상해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지나간 시간을 체감했다.
“리제, 일찍 나왔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데 또렷하고 선명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안.”
리제아나는 곧바로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따로 말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이안과 리제아나의 옷차림은 어딘지 비슷했다.
그는 나풀거리는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베이지색 털실 코트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베이지와 어울리는 검은색 바지는 그의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목에는 새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뭐… 무얼 입어도 잘 어울리는 얼굴이니까.’
리제아나는 그녀와 맞춘 양 비슷한 그의 옷차림을 보며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를 맞이 했다.
그는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더욱 빛이 났다.
“우리 착장이 비슷한데?”
그녀의 옷차림을 훑은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게요.”
리제아나 역시 입에 호선을 그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준비됐어?”
그가 리제아나에게 가가이 다가왔다.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럼요.”
“….”
이윽고 이안은 답 대신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리제아나를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다는 듯 웃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응? 아냐 아냐. 가자. 자, 내 손 잡아.”
그의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눈치챈 리제아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푸른 새벽빛에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제비꽃같이 맑아 보였다.
이제는 이동 마법 중 느끼는 메슥거림에 익숙해진 그녀는 이안이 내미는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역시 다시 한번 같이 가보자고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르힌?”
“네. 요즘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게 아무래도 챙겨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들의 발아래로 검은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리제아나가 하르힌의 우울한 낯빛을 떠올리며 물었다.
“하르힌은 괜찮을 거야. 나와 있을 때는 나를 신경 써.”
이안이 짓궂게 답하며 다른 한쪽 손으로 그녀의 콧잔등을 건드렸다.
“여기 앞에 있잖아, 내가.”
그 말을 끝으로 빛이 그들을 덮었다. 동시에 주위의 배경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 ⚜ ⚜
이동 마법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제아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잡고 토기를 참아냈다.
“욱….”
리제아나는 황급하게 이안을 잡았다. 아직 식사 전이었는데도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이제 적응 좀 하지…. 체력도 키웠잖아, 정말로….”
이안이 놀리듯 말했다. 리제아나가 그를 가자미눈으로 째려보았다. 마침 두 사람 뒤로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한 공작저의 문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공작저의 안에서 우르르 시녀장 시엘과 시종장 로베시트가 앞장서서 걸어왔다. 뒤로 다른 사용인들이 나와 한 줄로 서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공작저에 오신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아가씨.”
“아가씨…?”
델리사도, 리제아나도, 손님도 아닌 호칭에 아리송하고 있을 때 이안이 낮게 속삭였다.
“마음 같아선 리제라고 알려주고 싶은데 그대의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야 해서. 그렇다고 남의 이름을 붙이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친절한 이안의 설명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환대가 어색했지만 눈치껏 미소를 지으며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희는 어디 가요?”
공작저 안으로 발걸음하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그들을 맞았다.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꼬르르륵
배가 고팠던 차에 음식 냄새가 풍기니 리제아나의 배가 울부짖었다.
덕분에 얼굴이 붉어졌다. 리제아나는 아닌 척, 헛기침을 내뱉었지만 붉은 얼굴은 감출 길이 없었다.
다행히 크게 울려 퍼지지는 않았던지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 가까이 서 있던 이안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크큭.”
그의 웃음소리가 리제아나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럴 땐 예의 있게 모른 척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쥐구멍에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리제아나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모른 척하라며 이안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전했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푸흡, 왜,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더 보기 좋은데.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