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17)

55화

[계획을 수정한다. 이번 달의 중순과 끝자락 그 사이의 날짜에 프로디터의 수장을 찾지 못해도 그 잔당들만큼은 잡아들이도록.]

이안은 황궁에서 도착한 서신을 불만스럽게 보았다.

비밀스럽게 전한 것을 보아 중요한 내용의 서신인 줄은 알았으나 잔당을 잡아들이라는 명일 줄이야.

꽤 다급하게 휘갈긴 글씨를 보아하니 황제의 귀에 그들의 어떠한 계획이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혹….

이안은 서신의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황제가 이안에게 직접 명을 내리다니. 그들의 존재가 황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분명했다.

물끄러미 종이 위의 ‘프로디터’란 글자를 바라보던 이안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반역.’

이안은 낮은 침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 황좌를 차지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

지난 세월을 곱씹던 이안이 이내 책상 위에 올려진,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로디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색하던 도중 우연히 손에 들어온 수상한 책이었다.

책은 황실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적으며 황실을 비판하고 있었다.

보기에 피로디터의 사람들이 직접 저술한 책일 것이 분명했다.

무심코 책을 들어 올리며 이안은 미간을 모았다.

‘무엇보다 내 가문의 역사서를 찾아야 하는데….’

본래 황위 계승 2위였던 현 황제는 자신의 형인 황태자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대외적으론 능력이 부족한 황태자 대신 황위에 올랐다고 알려졌지만, 책은 더 신랄하게 그의 잔혹한 성정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죽인 형의 약혼자, 현 황후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런 황제가 유일하게 죽이지 않은 제 혈육이 있었으니, 제 여동생이자 황녀 사브릴이었다.

황제는 지배자의 기질을 가진 것은 분명했지만 잔인하고 혹독하여 자신을 배반하는 일에 용서치 않으며 이득이 되지 않는 사람은 망설임 없이 버리기 일쑤였다.

다만 이용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면 고려했다. 그가 사브릴을 죽이지 않은 이유도 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황녀는 현재 실종 상태로 황제의 분노를 산 채 황실에서 제명당해버렸지만.

‘이렇게 황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가 황실에 반감을 품고 있다면… 황제가 이리 서두를만하군.’

문득 책을 무심히 넘기던 그는 우연히 스친 생각에 미간을 모았다.

“황실에 대해 이리 자세히 아는 자라면… 황실과 관련이 있는 자가 프로디터의 수장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전히 단서가 부족하다.

이안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다가 소파에 맡겼던 제 몸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황제가 이렇게 재촉하다니. 그럼 리제와 약속했던 데이트는… 포기해야 하나.”

한동안 바빠지겠다는 생각이 스치자 이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리제아나와 시간을 보내는 일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으니.

이안은 제 앞의 책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며 생각에 잠겼다.

“반역이라….”

⚜ ⚜ ⚜

주머니에 손을 넣고 리제아나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이안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아직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방문을 서성였을 뿐인데도 귀신같이 알아챈 리제아나에 이안이 어색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나 밖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약간 놀란 눈으로 떨떠름하게 이안이 물었다.

“그동안 입을 닫고 있었는데 방문이 얇아 밖의 기척이 모두 들려요. 그리고 매번 해가 중천에 뜰 시간에 찾아오시니까요.”

“이런, 그랬군.”

깔끔하게 답변하는 리제아나를 보며 이안은 짧게 수긍했다.

“할 말 있으신 건가요?”

언제나처럼 새벽 훈련을 마치고, 식사를 마친 리제아나는 샤워까지 모두 끝낸 상태로 정갈하게 의자에 앉아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이안이 코밑을 멋쩍게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연말에… 함께 공작저로 가기로 했던 일정…. 이번 주의 마지막 날에 가는 것은 어떨까?”

“네? 원래보다 일찍 가자고요? 왜요. 다른 사정이 있나요?”

“으으음….”

사실대로 알려주고 싶었지만 프로디터와 같은 이런 기밀 사항들을 리제아나에게 이안이 멋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데, 이번 주 달 끝자락에는 조금 바빠질 예정이라서 말야. 그러니까 날짜를 앞당겨서 미안하지만….”

“네. 그렇게 해요.”

“어?”

“그렇게 해요. 왜요? 다른 말이 필요한가요?”

약속 자체를 앞당긴 것에 대해 서운하거나 못마땅한 기색을 낼 줄 알았으나 걱정도 무색하게 리제아나는 그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도리어 당황해하는 이안에게 리제아나가 되묻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너무 빨리 수긍하는 것 같아서.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어.”

“물어본다면 말씀해주실 건가요?”

“….”

“그럼 제가 굳이 수고를 들여서 알아낼 수 없는 거잖아요. 저는 한낱 망명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

얼굴색, 어조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는 리제아나를 보고 있다니 살짝 가슴 한쪽이 아려왔지만 이안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이안에게 함께 지낸 시간과 경험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과거에 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리제아나와 함께할수록 이안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정원의 꽃을 가만히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책을 가장 좋아하는지, 또, 대체 어떤 상처가 있어서 이따금 그런 얼굴을 하는지.

그녀와 이안 사이에는 묘한 경계선이 있었다.

그녀는 이안에게 곁을 내어주는 듯했지만, 과거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지독한 원망을 가졌다는 것 외에 그녀의 과거에 더 듣지 못했다.

‘숨기는 것인지…. 그만큼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리제아나를 바라볼 때마다 이안은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안은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리제아나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었다.

“리제.”

“네.”

“내가 시장에서 주었던 인형, 잘 가지고 있어?”

이안의 물음에 리제아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곤 허리를 굽혀 침대 옆의 서랍장을 열어 그 안에서 곰 인형을 꺼내 들었다.

“이거요?”

곰 인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모습에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에게 곰 인형을 꺼내 보이는 리제아나에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약속 하나만 해. 그 인형,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언제나 지니고 있어 줘. 지금 걸고 있는 목걸이와 함께.”

그리 말하며 이안이 곰 인형 위로 손을 펼쳤다.

기묘한 빛과 함께 곰 인형의 크기가 점차 작아졌다.

리제아나는 의아한 눈으로 제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아진 곰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약속이지만 이안이 그녀에게 해가 갈 무언가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리제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순순한 대답에 이안이 잘했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짓으로 토닥였다. 리제아나는 저도 모르게 목에 걸린 이안이 선물해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어째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얼굴에 띄워진 이안의 미소가 보기 좋아 리제아나는 그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 ⚜ ⚜

데벤시아 공작저.

시녀장인 시엘이 늙은 몸으로 공작저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사용인들은 모두 혹, 늙은 그녀가 다치기라도 할까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시엘 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다 못한 하녀 중 하나가 묻자 시엘은 단호한 표정으로 검지를 꼿꼿하게 피며 입을 오므리고 말했다.

“쉿! 내 생각 말고 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시엘의 단호한 말에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모두 이안으로부터 온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어느 날, 데벤시아 저택을 방문한 하르힌이 비밀스럽게 시엘을 찾았다.

하르힌이 내민 편지는 이안이 직접 친필로 쓴 편지였다.

“하르힌 님?”

“시엘 님. 이안 전하의 부탁 때문에 이렇게 왔습니다. 제가 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꼭 홀로 이 편지를 보셔야 합니다.”

미처 시엘이 알겠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르힌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챈 시엘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편지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먼저 평범하게 시엘의 안부를 묻는 것을 시작으로 데벤시아 공작저의 역사서를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가 왜 역사서를 찾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벽난로에 편지를 던지고 일어나 곧장 선대 데벤시아 공작의 방으로 발걸음했다.

선대 공작이 죽은 이후로 누구도 그 방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안의 물건들은 모두 그대로일 터였다.

오랜 세월 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구석구석 찾아보아도 역사서 비슷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으….”

결국, 그의 방에서 시엘은 이안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

‘에구구…. 존재하기는 한 건지….’

시엘은 몇 차례 더 방 안을 살폈지만 결국 이안에게 찾지 못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 후, 시엘은 다시 한번 낡은 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에서 들이치는 햇빛 아래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시엘 님? 그 방은….”

복도를 지나치던 하녀가 그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인 없는 방이라고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말이야. 오늘은 내가 청소할 테니 이쪽 구간은 나에게 맡겨두렴.”

“하지만 시엘 님. 시엘 님이 청소라뇨.”

“몸이 근질거려서 그렇단다. 맡겨줄래?”

“시엘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하녀를 보내고 난 후 시엘은 책장에 있는 책을 모두 하나하나 뺀 후에 걸레로 일일이 닦고는 다시 꽂는 일을 반복했다.

총 다섯 개의 책장의 모든 책을 뺀 후에 다시 집어넣는 중, 드디어 마지막 책장에 도달했을 때였다.

책장 끄트머리에 꽂힌 책을 꺼내자 그 속에 비어있는 공간 사이로 또 다른 책 한 권이 떨어졌다.

분명 이전에도 이곳을 살폈건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어라?”

그 숨겨진 책 겉면에는 틀림없이 블랙 드래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데벤시아 공작가의 역사서였다.

“드디어 찾았다!”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기쁜 목소리로 외치며 책을 높이 쳐들었다.

이것으로 이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시엘은 더욱 기뻤다.

시엘은 더 망설이지 않고 편지를 보내기 위해 다급하게 낡은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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