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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17)

54화

“열다섯…. 드디어 열다섯 바퀴 완주 성공이네.”

처음으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열다섯 바퀴를 완주했다. 이안이 리제아나를 보며 기쁘게 웃었다.

“열다섯… 바퀴…. 성공…! 맞죠…. 헉…헉….”

리제아나는 이안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숨을 진정시켰다.

다리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굽히고 차오르는 숨을 겨우 삼켰다.

“좀 쉴까?”

“정말로 쉬고 싶어요…. 후아….”

수많은 헐떡임 사이로 겨우 내뱉은 단어를 알아들은 이안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어느덧 함께 새벽 수련을 해온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변덕이 심한 날씨도 어느새 서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훈련장 한편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아래의 그늘을 향해 무거운 다리를 끌고 나아갔다.

이안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부축해줄까?”

“아니요…. 됐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해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비틀거리는 게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툭 치지만 않으시면 되거든요?”

“에이.”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보아온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매번 살갑게 구는 이안에 녹아들었던 건지, 사람을 경계하자고 다짐했던 리제아나도 경계심을 서서히 늦추고 있었다.

“그래서 완주한 소감은?”

“저랑 같이 뛰셨는데도 이안은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아서 분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데요.”

“큭, 정말 솔직하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말이죠.”

리제아나는 눈을 감고 그녀를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바람에서 시원한 냉기가 느껴지는 것이 벌써 겨울이 다가온 듯했다.

“이 나무에는 아직 잎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네.”

이안이 나른하게 웃으며 거대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그도 리제아나를 따라 바람을 맞았다.

“저는 겨울을 좋아하거든요.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어떤 점이 좋은데?”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다는 점이 좋아요. 그리고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의 온기를 느끼는 것도 좋아요.”

아비드 제국에서 그녀는 인형처럼 생활했다. 언제나 집무실에 틀어박혀 주어진 일만 했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리제아나는 집무실 창문 너머로 새하얀 눈을 마주했던 때를 떠올렸다.

시녀들과 황궁 사용인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재잘대며 눈을 구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리제아나에게는 소박한 행복이었다.

“오….”

이안은 리제아나의 말을 들으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도, 그런 거 좋아해.”

“어떤 거요?”

“눈 오는 거 말이야. 물론 눈이 올 때까진 아직 멀었지만.”

“눈 깜빡하면 지나가 버리는 것이 시간인걸요.”

“부정은 못 하겠네.”

두 사람은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다.

“리제.”

잠시 찾아온 정적을 깨고 이안이 리제아나를 불렀다.

이맘때쯤 데벤시아 공작저에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곤 한다.

데벤시아 공작저의 정원 온실에는 황제가 그에게 하사한 동양 대륙의 꽃이 있었다. 동백꽃이라는 꽃은 추운 겨울에도 아름답게 활짝 피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안은 정원에 있는 그 꽃을 떠올렸다.

그 꽃을 보고 좋아할 그녀의 모습이 벌써 선명했다.

‘이번 년이 지나기 전에, 네가 좋아하는 계절에….’

“네?”

천천히 바람을 느끼며 땀을 식히고 있던 리제아나가 이안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내 마음을 말하고 싶지만…. 지금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이안은 그녀의 보랏빛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마음을 억눌렀다.

“날이 더 추워지면, 흰 눈이 예쁘게 떨어지는 날에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줄래?”

“보여주고 싶은 곳이요?”

“응. 가자. 그대도 좋아할 거야. 아름다운 꽃들이 있는 곳이거든.”

“겨울에도 꽃이 피는 곳이 있단 말이에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리제아나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그러니까 약속해.”

이안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새끼손가락을 보고 리제아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 아직도 텐젤에서는 이런 걸 하나요?”

“다른 언약보다 이게 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

리제아나는 키득거리며 그녀 역시 새끼손가락을 들어 이안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유치하지만 확실하다는 말은 인정할게요. 말로 하는 약속은 쉽게 저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럼.”

순간 어두워지는 리제아나의 낯빛에 이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리제아나가 의문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일어나서 검이나 마저 연습하자. 오늘은 연습 상대도 있어.”

“연습 상대요? 정말요? 누구요?”

“바로 나. 자 빨리 일어나! 곧 있으면 해 뜨는 시간이야.”

리제아나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이안이 먼저 훈련장으로 달려나가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겨울이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제아나가 홀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녀의 혼잣말이 이안의 귀에 닿을 리는 없었다.

한 달간 그녀의 훈련을 위해 애써온 그였다.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분명히 느껴졌다.

그녀를 이상하리만큼 신경 쓰는 고마운 사람.

그에 대한 생각이 매번 바뀌고 있음을 이젠 부정할 수 없었다.

⚜ ⚜ ⚜

아비드에 내려온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네르아는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일투성이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델리사가 리제아나에게 강한 원한을 품은 줄만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저 라이핀만을 원할 뿐이었다.

네르아는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윽고 그녀는 시녀를 통해 가져다준 허브차 한 모금을 마시며 불타는 속을 진정시켰다.

“후….”

점점 서늘해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속은 뜨겁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곳 아비드 제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없었다.

네르아는 초조하게 탁자 위를 두드렸다.

“나 왔어.”

때마침 네르아가 말했던 마법 약 재료를 구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려 나갔던 델리사가 우아한 몸짓으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네르아가 벌떡 일어나 다그치듯 그녀를 재촉했다.

“재료들은요?”

“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재료나 찾다니 너무한데.”

“….”

“그래 알았어.”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는 네르아에 델리사는 피식 김새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케이프 코트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양귀비라고 했던가. 가장 중요한 재료가?”

“네. 구하셨어요?”

“아니. 텐젤에서 수입해오는 약초라며? 아비드 제국으로 들어오는 수량이 적어서 구하기도 힘들다던데.”

양귀비가 희귀한 꽃은 맞으나 아비드 제국에서 이렇게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을 줄은 몰랐다.

네르아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양귀비가 없으면 그녀가 원하는 약을 만들 수 없었다. 그동안의 델리사를 보아 그녀는 네르아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내쫓을 것이 분명했다.

“양귀비가 없으면 아모리스 향수의 효과가 더 미비해질 뿐입니다.”

“나도 그 정도는 네가 귀 딱지가 얹도록 이야기해서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제가 전에 제조했던 향수를 쓰는 것이 더 효능이 좋을 것이라 누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지금 새로운 향수를 만들 능력은 없지만, 전에 만들어드렸던 향수의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고요.”

“다 틀렸어. 그날 날 보고도 지나쳤잖아. 분명…! 날 보았는데…!”

델리사가 절망스럽게 외쳤다. 델리사는 진열대 너머로 그녀를 보고도 등을 돌리고 떠나던 그를 떠올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그녀를 찾던 그였다.

그녀만을 사랑한다던 그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지.

정말 향수가 아니면 그를 가질 수 없는 걸까.

델리사는 머리를 쥐고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는 델리사를 보며 네르아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델리사를 더 부추긴다면 나에게 더 유리해질지도 모르겠어.’

네르아는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정말 바쁘다는 이유로 델리사 님을 보지 않는 걸까요?”

“뭐?”

“듣기로 황궁에서는 항상 델리사 님을 찾는다고 하셨죠. 지금 폐하가 델리사 님을 찾지 않는 이유가 정말 향수 효과가 떨어져서라고 생각하나요?”

그녀가 마주하지 않으려 했던 진실을 꺼내며 네르아가 비릿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델리사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폐하가 왜 갑자기 변하셨을까요? 델리사 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누구 때문에 이리 태도가 변하셨는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야?”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는데도 벌써 델리사의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델리사 님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랑스러운 외모에, 엄청난 위력을 가진 향수까지 있는데, 실패하실 리가 없잖아요.”

“본론만 말하라고 했지? 그래서 요점이 뭐냐고.”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네르아에 델리사가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델리사 님. 황제 폐하가 지금 사라진 황태자비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황제 폐하가 그 여자를 찾으면 델리사 님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네르아의 말에 델리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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