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안은 황궁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황궁을 오가던 그였으나 근래 입궁을 하지 않은 탓일까 부쩍 낯설어 보였다.
리제아나를 만나고부터 이안은 황제의 도움 없이도 저주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 후 굳이 황실에 찾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저택 혹은 마탑에 머물던 이안에게 황제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편지 안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어서 이안에게 입궁하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분명 공작이 아닌 황실의 앞잡이로서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이안은 그의 집무실 뒤쪽에 있는 순간 이동 마법진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는 마법진이 밝게 빛이 나는 것을 지켜보며 와이셔츠 깃을 끌어 내렸다. 역시 그는 제복이 불편했다.
“후.”
이안은 자연스레 황궁의 정원으로 이어져 있는 길로 걸어갔다.
여러 색의 장미가 핀, 굽은 길을 따라 걸어 이안은 황궁 안의 복도로 다다랐다.
알현실로 이어지는 복도였다.
알현실 앞을 지키던 경비원이 이안을 알아보고 자세를 고쳤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께서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경비원은 허리를 숙이며 알현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너머로 왕좌 위에 나른하게 앉아있는 황제가 그를 맞았다. 이안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편지를 보고 입궁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이안을 내려다보며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요새 황궁을 전처럼 잘 찾아오지 않는구나.”
아쉬운 얼굴을 하며 황제가 주변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짓에 보좌관 일레네와 호위 병사들이 모두 자리를 비켰다.
이안만이 남아 그를 독대하게 되었다.
“게다가 전처럼 저주 때문에 직접 찾아오는 일이… 없구나.”
“….”
주름 사이로 황제의 눈이 번뜩이며 빛났다. 날카로운 황제의 시선에도 이안은 망설임 없이 준비한 답을 꺼냈다.
“제가 몇 차례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저주가 일어나는 날짜가 불규칙해졌습니다. 저조차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르힌을 보내 약을 가져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
황제가 낮게 목소리를 깔며 고개를 저었다. 알현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안 공작, 자네의 뒤에 있는 태양 문양로부터 통증이 느껴지지 않던가? 그것만으로 저주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길게 늘어뜨린 흰 수염을 매만지며 어조 하나 바꾸지 않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네가 마지막으로 저주로 황궁을 찾았을 때가 벌써 서너 달 전이다. 네 저주가 아무리 불규칙하다 해도, 세 번이나 그리 갑작스럽게 저주가 발동되다니?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지 않은가?”
“….”
그를 추궁하기 위해 부른 것일까. 그는 혹, 황제의 의심을 불러올까, 더 입을 열지 않고 적안을 번뜩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황제가 비릿하게 웃으며 스스로 납득했다.
“하지만… 저주란 것은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없지, 안 그런가?”
이안이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지 않자 결국 홀로 황제가 혼잣말을 곱씹었다.
“옆을 지켜주는 가족이 이럴 때 있다면 참 좋지…. 그렇지 않은가, 이안?”
“또, 다른 가문의 여식과의 결혼을 부추길 생각이십니까.”
“생각 없네. 그럴 때마다 거절하지 않던가.”
“피로 이어진 가족 또한 의미가 없다는 걸 가르쳐준 폐하십니다.”
그의 말에 짐짓 눈을 크게 뜬 황제가 폭소했다.
“아하하! 그랬지. 그랬어…. 피로 이어진 혈육…. 사브릴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천불이 들끓으니.”
그는 금반지를 낀 손을 쥐며 그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사브릴 황녀님은….”
“그 아이는 황녀도, 텐젤 제국민도 아니다. 그저 반역자일 뿐이지. 감히 국혼을 앞에 두고서 그런 일을 벌이다니! 황실의 권위가 땅으로 꺼질 일이었어!”
황제의 언성이 분노로 높아졌다.
사브릴 텐젤 티베라.
그녀는 텐젤의 번영을 위해 동대륙 제국의 황제와 국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황녀는 거사를 앞두고 석 달 전, 갑작스레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를 찾기 위해 황실 기사단이 제국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 시기에 텐젤을 방문한 아비드 사절단이 의심을 받으며 텐젤과 아비드 제국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로 누구도 황궁 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그녀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후.”
황제는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낮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절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주 때문이십니까? 아니면 또 결혼 이야기를….”
“아아 그랬지. 공작을 부른 이유는 발작도 결혼 이야기 때문도 아니야. 드디어 찾았단 말이지, 프로디터들의 본거지를 찾았어.”
“!”
황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황제의 말에 이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프로디터’
그들은 황실을 적대하는 극단적인 반황제파였다.
제국의 고어로 반역자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들은 황실의 오랜 골칫덩이 중 하나였다.
“아직 저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일레네가 고생을 좀 했지.”
제국 안의 모든 일은 황제의 손을 거쳐야 했으며 누구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데벤시아 공작가까지 황실을 지지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황제는 강한 법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때로는 그는 법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황제를 거역할 수 없었다.
현 황제인 아담이 어떻게 지금의 황위에 올랐는지 아는 이라면 황제의 잔혹한 성정을 모를 수 없다.
‘그러니 감히 반역을 꿈꿀 수 없었지.’
황제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는 역모죄로 몰려 끌려가기 일쑤였다.
프로디터는 이러한 황제에게 앙심을 가지고 그를 끌어 내리기 위해 모인 자들로 지금까지 그 정체를 철저히 숨겨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두를 잡아들이고 싶지만, 문제가 있어.”
“무엇입니까?”
“그들의 수장을 찾지 못했어. 세간에 알려진 프로디터들이라면 아무리 고문해도 자백하지 않을 테지. 그렇게 되면 수장은 새 조직을 꾸려 더 치밀하게 공격해올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주름진 눈썹을 모았다.
“기다려야지. 프로디터로 의심되는 이들의 명단을 줄 테니 그자들을 중심으로 몰래 뒤를 조사해라.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바로 알려주고, 수장을 발견할 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살하도록.”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들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군. 먼저 수장을 잡아라.”
“알겠습니다. 헌데 저번에 말했던 데벤시아 가의 역사서는….”
“이만 들어가 보도록. 다음에 저주가 일어날 때는 직접 찾아오길 바라지.”
“…네 알겠습니다.”
단호한 황제의 말에 이안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또 찾을 수 없는 건가….’
데벤시아 역사서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알현실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시엘에게 공작저에 남은 선대 데벤시아 공작의 방에서 역사서를 찾아달라 부탁했지만, 시엘 또한 역사서를 찾지 못한 눈치였다.
‘황실에도, 공작저에도 없다면…. 영지에 내려가서라도 찾아야 할까.’
이안은 그의 앞으로 굳게 닫힌 알현실의 문을 바라보며 눈썹을 구겼다.
떠오르는 생각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알현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일레네에게서 받은, 프로디터로 의심되는 자들의 이름과 가문이 적힌 명단이었다.
명단에는 저명한 가문의 후작이나 백작도 있었다. 또한, 오랫동안 황제의 곁을 보좌해왔던 자들도 다수 있었다.
“과연 황제답군. 그의 사람들조차 의심하다니.”
이안이 비뚤게 웃으며 조금 전 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문득 길을 걷던 이안은 걸음을 멈춰섰다.
“어라, 이 향기는.”
바람에 불어온 장미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장미 향기에 이안은 리제아나를 떠올렸다.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꽃 향기가 났다.
“그때가 벌써 몇 달 전이라니… 내가 이렇게 그녀에게 빠져들 줄이야.”
자조하며 이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마탑으로 돌아갔다.
아침 일찍부터 왕을 알현했기 때문에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했다.
밝은 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일출을 맞는 마탑 안은 고요했다. 기척을 조용히 느껴보니 하르힌은 어딘가로 외출한 듯했다.
어느새 발걸음이 당연하다는 듯이 리제아나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똑똑똑.
세 번 두드린 후에 이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리제? 들어가도 돼?”
“….”
“리제아나?”
“….”
몇 번을 불러도 리제아나가 답이 없자 불안한 마음에 이안은 무례를 무릅쓰고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이런.”
문을 열자 책을 베개 삼아 책상에 누워 곤히 자는 그녀가 있었다.
“정말 책밖에 읽을 줄 모르는 건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도 된다고 했는데.”
그녀가 껴안은 책을 슬쩍 들어보니 ‘체력 단련하는 법 101가지’라고 적힌 표지가 눈에 띄었다.
검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함께 체력을 기르는 법에 대해 적힌 책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온 후에 그다음 날 몸살로 앓아누웠던 리제아나였으니.
그녀가 찾을 법한 책이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 없는데. 지켜준다는 말은 대체 어떻게 들은 건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이제 표지에서 리제아나로 옮겨갔다. 새까만 흑색 머리칼과 짙은 눈썹, 길게 뻗은 속눈썹까지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고왔다.
그 모습을 보니 아까지만 해도 답답하게 가슴을 조이던 여러 생각이 날아갔다.
“그대에게….”
이안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대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이렇게까지 내가 변할 줄은 몰랐으니까.”
잠든 그녀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이안은 깨달았다.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리제아나란 사람이 그에게 스며들어 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