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서서히 하늘에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열 바퀴밖에 돌지 못했는데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은 제 모양새를 잃어버리고는 헝클어지고 있었다.
“못 해…. 절대 못 해….”
존댓말과 격식 따위 차릴 여유는 없었다.
이안은 열 바퀴 내내 그녀와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헉헉…. 제가 언제요? 이렇게 힘들 줄… 제가 어떻게 알았냐고요.”
“힘들어야 체력 단련이지.”
대화가 통하지 않은 이안을 제쳐두고 몇 걸음을 어기적어기적 나아가던 리제아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안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뒤에서 잡아주었다.
“물…. 물… 없어요?”
타는 듯한 갈증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물을 찾으며 갈증이 나는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있지.”
이안이 미소와 함께 이공간에서 물병을 꺼내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에게서 물을 받고 리제아나는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물의 냉기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문득 리제아나는 허리를 감싸는 손에 고개를 들었다.
‘어라?’
그제야 아직까지 이안이 자신의 등을 받쳐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리제아나가 재빠르게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등에 땀 범벅인데요. 더러워요.”
“하하. 괜찮아. 뭐 오늘은 첫날이니까 어차피 열 바퀴만 뛰려고 했거든.”
“아까는 열다섯 바퀴라면서요?”
리제아나의 물음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열 바퀴라고 하면 그대는 다섯 바퀴에서 못하겠다고 말했을지도 몰라. 목표를 크게 잡아야 반이라도 이루지.”
“….”
리제아나가 어이없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이안이 유쾌하게 웃었다. 이윽고 그가 손뼉을 치며 리제아나의 주목을 끌었다.
“그렇게 매섭게 바라볼 것까진 없잖아? 이제 진짜로 검술을 시작해보자.”
그 말에 리제아나는 힘을 주었던 주먹을 풀었다. 이대로 그가 다른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면 리제아나가 그대로 얄미운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날 위한 것이었다는 거죠? 알겠어요. 이제 검술 시작해봐요.”
다른 나라라도 검술의 기초적인 자세와 동작은 대부분 비슷하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점이 있으나 기본적인 검술의 틀은 바뀌지 않았다.
“그대가 이전에 배웠다는 기본자세를 먼저 취해볼래?”
이안은 훈련장에서 꺼내든 목검을 리제아나에게 건네주었다.
“네.”
그녀가 배운 검술은 먼저 왼발을 내디디고 두 손으로 검을 맞잡은 다음, 기합 소리를 내며 뒤에 있던 오른발을 끌어내어 앞서 나가는 방식이었다.
검술을 배운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기본적인 자세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흐음….”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이안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 어린 얼굴을 했다.
‘틀렸나…? 오래전에 배운 걸 겨우 떠올린 거라 변명할 말은 없지만…’
이안의 표정을 바라보니 다시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리제.”
이윽고 그가 생각을 마친 듯 고개를 부드럽게 주억거리며 다가왔다.
“잘하네. 기본기가 나쁘지 않게 잡혀 있어.”
“저, 정말요?”
그의 한마디에 리제아나는 놀라며 자신의 자세를 되돌아보았다.
떠올린 것도 용할 정도로 오래된 기억인데 칭찬을 들을 줄이야.
그의 칭찬에 자신감을 가진 리제아나가 어깨를 펴며 제 손의 목검을 힘있게 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안이 리제아나가 자신감 있게 든 목검을 다시 가져갔다.
순식간에 그에게 검을 빼앗긴 리제아나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목검을 받아간 그는 자세를 다잡았다.
“텐젤의 검술도 기본 자세는 아비드와 같아.”
그는 한 손으로 검을 들어 보였다. 리제아나와 달리 그는 검을 휘두르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여유롭게 검으로 바람을 가르며 그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검을 든 자세는 손색없이 좋은데, 검을 휘두를 때 무작정 좌우로 베는 것보다 아래로 내려 베는 쪽이 상대에게 더 위협적일 거야.”
가볍게 걸음을 내딛던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내려 베었다.
목검일 뿐인데도 그가 휘두른 검에서 굉장한 소리가 났다. 리제아나는 그의 검술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뿌듯한 얼굴로 리제아나를 돌아보았다.
“어때?”
“과연…. 깔끔하네요.”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불필요한 동작 없이 깔끔하게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모습.
다른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그런데….”
리제아나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응?”
“전 누군가를 베기 위해 검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땀을 흘리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검술의 매력이라 여겼던 리제아나였다.
물론 그녀에게 검술을 배우게 한 공작의 의도와 다르더라도 말이다.
“리제아나.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이안이 단호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전 저를 지킬 정도면 됩니다. 이 칼에 피를 묻힐 생각은 없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물론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지금까지 충분해요.”
“아니, 내가 반드시 지킬게. 그렇게 하게 해줘.”
리제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의 이안에겐 어떤 말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계속해볼까. 더 조언해주고 싶은 게 있어.”
“네, 말하세요.”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물론 내가 그대의 곁에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그대 곁에 없을 때 적을 마주한다고 생각해봐. 머릿속에 한 번 떠올려 보는 거야. 두려움이 앞설 테지만 기본을 잊지 마.”
“기본이라면?”
“기본자세가 흐트러지는 순간, 너의 기강도 흐트러지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적에게 지는 것은 뻔한 결과지.”
그의 말에 리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을 앞에 두고 당황하지 말 것.
리제아나는 가슴에 새기며 그에게서 목검을 돌려받았다.
목검을 힘있게 쥐며 리제아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안, 자세 좀 봐주세요.”
“얼마든지.”
리제아나는 조금 전, 이안이 보여준 것과 같이 검을 휘둘러보았다.
“이게 맞나요?”
“거기서 힘을 조금만 더 빼고 팔을 올려야 해. 이렇게….”
이안은 리제아나의 뒤에 서서 그의 팔을 올리고 다리를 조금 더 벌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느새 이안은 리제아나를 뒤에서 안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게 맞나요?”
자세를 고친 리제아나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두 사람은 몸을 붙인 채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이게 맞냐고요?”
“으, 응.”
두어 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화끈거리는 볼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을 돌리며 뇌까렸다.
“이안? 얼굴이 빨개요.”
“음… 먼저, 내려 베기부터 연습하자. 나는 잠시….”
그는 말을 다 마치지도 않고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안은 리제아나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바닥을 바라보며 수건을 가져온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이안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리제아나는 다시 목검을 들어 올렸다.
반복해서 연습을 하며 베는 방향을 바꾸는 데 전념했다.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며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의 끝을 알리는 포근한 햇빛이 그녀를 비추었다. 고요하지만 드높고 밝게 뜨는 태양을 바라보며 리제아나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 ⚜ ⚜
“훈련 다녀오셨습니까?”
이안은 유난히 기분 좋은 얼굴로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있었다.
문득 하르힌이 노트도 없이 문을 열고 이안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노크 먼저 하고 들어오지?”
“아이- 이미 들어온 걸 어떡합니까?”
이안의 찌푸린 미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르힌은 능글맞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요? 어땠습니까?”
“무엇이?”
“아 왜, 훈련 그분이랑 같이 다녀오신 거 아니에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이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스럽게 그를 보자 하르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번에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요….”
그는 궁금증을 숨기지 않고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보다 어떻게 되셨는지 좀 알려주세요!”
“….”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르힌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
“별거 없었어. 기본적인 검술을 조금 가르쳐준 것뿐이야….”
“호오? 다른 별일은 없으셨고요?”
하르힌은 정말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없어. 그런 거.”
“…쳇 재미없네요.”
“뭐? 기껏 말해줬더니 한숨이나 쉬어?”
입을 삐쭉거리며 한숨을 내뱉자 이안이 짐짓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르힌이 겁을 먹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악 아닙니다! 그냥 버릇이었어요! 버릇!”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은 공포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하르힌은 곧바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백…하고 싶으셨던 거 아니었어요?”
하르힌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그에게 물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녀에게 내 감정은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어.”
이안이 낮게 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섣불리 그녀에게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도망갈 것만 같아.”
리제아나는 바람 같았다.
그녀는 매번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면 바람처럼 홀연히 멀어졌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그녀와 멀어질까봐 가까이 다가가길 망설여졌다.
이대로 영영 떠나갈까 봐 두려웠다.
아직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분의 마음도 아직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더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군.”
다시금 리제아나가 떠올랐는지 이안의 볼이 토마토처럼 익어가기 시작했다.
“백날 고민하면 뭐하겠습니까, 네? 정말 있는 그대로 마음을 전하세요.”
하르힌은 상상하듯이 가슴에 두 손을 올리며 멋대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별이 쏟아지는 멋진 곳에서 좋아한다고 고백하시는 겁니다. 오오온 마음을 다해서 말이죠!”
“하… 하르힌, 참 헛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어.”
“예쁜 말도 좀 사용하시고요!”
하르힌은 답답해하며 가슴을 때렸다.
“어쨌든,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라….”
그의 말도 분명 맞는 이야기였다.
그가 행동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바뀌지 않을 터였다.
이안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턱을 문질렀다.
문득 하르힌이 떠올랐다는 듯, 그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낯선 이가 저희의 뒤를 밟던 눈치더군요.”
“뒤를 밟아?”
“팬텀…이라는 무리 같았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잘 처리해놓았으니.”
“그렇군.”
하르힌이 턱을 두 손가락을 톡톡 치며 말했다.
하르힌의 실력을 알았기에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뒤를 밟는 자라…. 감히 이 텐젤에서 데벤시아 가문을?
이안을 유심히 살피던 하르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헌데… 네르아는 어딨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벌써 몇 달째 얼굴도 비추지 않고 있습니다.”
“네르아?”
뜻밖의 이름에 이안은 눈썹을 구기며 무신경하게 답했다.
"모르겠군. 하지만 이대로 계속 나타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마탑을 떠난 게 아니겠어.”
간단히 답을 마친 이안이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하르힌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사라지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