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꽃이라도 사가시게요? 원하신다면 들어가서 사시죠?”
라이핀의 걸음이 한참이나 꽃집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자 일라이자가 조심스레 라이핀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그저.”
하지만 일라이자의 물음에 쉬이 입을 열지 못하던 라이핀은 비틀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리제아나를 떠올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꽃집이 리제아나와 어떠한 접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일라이자는 입이 말랐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그인데 더더욱 그를 자극해서는 안 됐다.
“다른 꽃집에도 꽃들이 많을 겁니다. 조금 더 둘러보고 사시죠. 요즘 집무실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니 꽃을 장식해도 좋을 겁니다.”
“…그래.”
“네. 그러니 어서 가시죠.”
일라이자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라이핀은 이제 없는 그녀의 자취만을 좇을 뿐이었다.
예쁜 밤하늘 색 같은 리제아나의 긴 머릿결.
그만을 향하던 애정 어린 보랏빛 눈.
무뚝뚝하지만 이따금 짓던 그 수줍은 미소.
눈을 감아도 이제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잃고 나서야 깨달아버리는 마음이라니.’
라이핀은 허탈하게 자조했다.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의 행동들이 떠올랐다.
그녀를 앞에 두고 델리사와 애정을 나눈 일들.
그녀에게 일을 맡겨두고서 델리사를 찾던 순간까지.
옛 기억이 떠오르자 라이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힘있게 깨문 탓에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왜 나는 그녀가 가고서야….’
문득 그의 코로 고약한 향이 흘러들어왔다.
“윽….”
순간 바람결에 타고 흘러온 델리사의 향수 향에 정신이 혼미해진 라이핀이 비틀거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일라이자가 다가왔지만 라이핀은 부축을 거부하며 한숨을 흘렸다.
“일라이자, 호칭 조심해.”
“죄송합니다.”
라이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일라이자에게 뒤로 물러서란 손짓을 해 보였다.
델리사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리제아나.”
이에 라이핀은 나지막이 입 밖으로 리제아나의 이름을 내뱉어보았다.
그리하면 그녀를 당장 만날 수 있기라도 하듯이.
문득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델리사?”
그녀가 도대체 이곳에 왜 있는 거지?
의아하게 그녀를 보는 순간, 델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델리사는 반가운 빛을 감추지 않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이핀은 싸늘하게 시선을 곧장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그녀를 보아도 이제 더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일지 않았다. 도리어…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라이핀은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일라이자, 돌아가자.”
“존명.”
라이핀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와 멀어지기를 택했다.
“라이….”
그렇게 미련 없이 돌아서는 라이핀을 델리사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나를 보고도 그대로 가버리는 거지? 왜…?”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절망스럽게 외쳤다.
“왜, 왜!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는 건데…?!”
라이핀은 항상 그녀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델리사는 그런 라이핀을 사랑했다.
그를 향수로 유혹한 것은 사실이나 시간이 지나며 그의 감정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진심일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당황한 샐리와 네르아가 다가왔지만 델리사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멀어지는 라이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 만남이 우연일까. 정말 우연히 이 꽃집에서 그를 본 거야?’
그녀는 초조하게 조금 전 보았던 라이핀의 모습을 떠올렸다.분명 그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입술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가 누구의 이름을 읊조렸는지 델리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제아나.
‘리제아나…. 네가 이번에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구나. 끝까지. 어쩜 끝까지….’
분노에 치를 떨며 델리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사라진 그녀가 어떻게 다시 라이핀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있는지 델리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꽃다발, 여기 있습니다. 자작님께서 기다리다가 저희에게 맡기고 가졌지요.”
아그레스틴 자작이 준비해둔 꽃다발을 들고나온 꽃집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델리사에게 건넸다.
곱지 못한 델리사의 시선과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네르아는 대신 꽃다발을 받아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제가-”
그래서 서둘러 꽃다발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델리사가 한 발 더 빨랐다.
“감…사, 합니다.”
델리사는 꽃다발을 낚아채듯 잡고는 재빠르게 꽃집 밖으로 향했다.
그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옆 골목으로 들어선 그녀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로 엮어진 꽃다발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델리사 님!”
그녀의 행동에 놀란 샐리가 다급하게 델리사를 저지했지만 이미 꽃들은 처참하게 골목을 뒹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네르아가 숨죽여 웃었다.
‘나쁘지 않은 흐름이야.’
네르아는 리제아나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델리사는 리제아나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그래서 그녀를 자극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라면 더 힘쓰지 않아도 되겠군.’
네르아가 히쭉 미소를 지었다.
⚜ ⚜ ⚜
동이 타오르며 하늘이 오묘한 빛을 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감돌았지만 마탑의 훈련장 한쪽에선 거친 숨과 함께 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리제!”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진검을 들기 위해선 먼저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고!”
검술을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위해 두 사람은 마탑 뒤의 훈련장에 나와 있었다.
이안은 그녀에게 준비운동을 시키기 위해 그녀에게 여러 체조 자세를 알려주던 차였다.
그녀의 자체를 고쳐주며 여러 동작을 가르쳐준 이안이 짐짓 훈련장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자. 이제 뛰자.”
“예…?”
“검술의 기본은 체력이라고! 일단… 뛰어!”
리제아나는 와이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훈련을 위해 그가 준비해준 옷이었다. 긴 포니테일로 머리를 가볍게 묶은 그녀가 황당하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다시 외쳤다.
“뛰어!”
그의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리제아나는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이안은 해가 뜨기도 전에 그녀의 방을 찾았다. 약속대로 새벽 훈련을 나가자며 그는 그녀를 억지로 이끌었다. 그는 아침부터 기운이 넘쳐 보였다.
“몇 바퀴나 뛰어요?”
“계속 뛰다 보면 알아.”
“예에?”
운동이라곤 숨쉬기만이 전부였던 리제아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헉… 헉….”
“리제…. 아직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벌써 숨이 찬 거야?”
“먼저 가세요…. 따라갈게…요. 헉, 헉….”
아직 훈련장 반 바퀴밖에 돌지 않았는데 턱까지 차오르는 숨에 리제아나의 다리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는 뛰는 것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천천히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쫓아오던 이안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리제아나는 아직 숨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먼저 가라며 손짓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해 버렸다.
“오늘은 그대를 위한 훈련 시간인걸. 검이라도 쥐기 위해서는 몸에 힘이 남아있어야지. 그때 시장에서 그 아이를 잡던 순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차오르는 숨에 끝내 그녀는 손을 내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푸핫. 리제, 무조건 뛰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흐름에 몸을 맡겨봐. 바람을 자연스레 느끼면서 몸을 맡기는 거야. 그러면 뛰기 편할걸.”
“그게 말처럼 쉽냐고요.”
“자, 휴식 끝. 이제 다시 갈까?”
“벌써요?!”
“자자, 어서!”
이안은 그녀의 등을 밀며 그녀가 다시 움직이게 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이끌며 그녀는 이안이 말한 것처럼 바람을 느끼려 애썼다.
몸을 바람의 흐름에 맡기며 달리자 차가운 공기가 부드럽게 그녀를 품었다.
높이 묶은 그녀의 흑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시원해….’
아직 새벽이었기 때문에 해가 뜨지 않았다.
새벽 바람이 불어와 코끝이 시렸다.
“어때?”
어느새 뒤에서 달리고 있던 이안이 조금 더 속도를 내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속도를 맞추어 뛰며 빙그레 웃었다.
“숨이… 차지만…. 재밌네요! 시원하기도 하고….!”
리제아나가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 이제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몇 바퀴 뛸 건지 알려주죠?!”
“흠… 글쎄.”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답했다.
“가볍게 열다섯 바퀴?”
“열다섯 바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다섯 바퀴쯤 돌지 않았나요?!”
이 기세를 몰아 리제아나가 의욕 넘치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자 이안이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답했다.
“…리제 이제 두 바퀴째야. 정신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