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안이 자신이 산 물건을 누군가에게 직접 주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첫째, 이안은 물건 자체를 잘 사지 않았다.
두 번째, 그는 정말로 필요한 물건만 샀다.
“이게 웬 떡이냐!”
마지막으로 그에게서 받은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 즈음, 드디어 하르힌에게 콩고물이 떨어졌다.
이안이 도와준 보상이라며 당근 케이크를 넘겨주자 감탄사를 내지르며 하르힌은 곧바로 케이크를 들고 방으로 왔다. 그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 포크를 들었다.
그의 지론대로 그는 케이크를 칼로 잘라 먹지 않고 그대로 먹기로 했다.
거기에 우유까지 곁들인다면 더욱 금상첨화였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가 힘차게 외치고 포크로 한술 크게 퍼 올려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의 방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아잇 깜짝이야! 저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마치 제 방인 양 당당히 걸어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안이 하르힌의 방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그 때문에 하르힌은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다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나?”
“네.”
“내 표정이 정확히 어떻지?”
“음…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일을 방금 겪고 오신 것 같데요….”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 이안의 눈치를 살피던 하르힌은 결국 제 앞의 먹음직스러운 케이크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다시 포크를 들어 올렸다.
한입에 케이크를 털어 넣자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에 하르힌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집 케이크 역시 맛있네요! 케이크와 꽃도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맛만 좋은 케이크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당근 케이크는 레드벨벳 케이크와 달리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케이크였다.
같은 수제 크림치즈가 들어갔다 해도, 당근 케이크는 시나몬 향과 함께 시트 사이사이에 있는 호두와 얇게 썬 당근이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목 막혀 보이는데.”
“별것이 다 걱정이십니다. 여기 우유 있어요. 딴 길로 새지 마시고요, 바로 본론 들어가시죠?”
고민이 있을 때 입가를 매만지는 이안의 버릇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르힌이었다.
그는 녹색 머리를 털면서 이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그래, 징그럽게.”
“할 말, 있으신 거잖아요? 역시 연애 고수라고 했던 말을 흘려들으신 게 아니었군요. 후후….”
“그 웃음, 기분 나쁜데.”
“저하!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되묻는 하르힌에 이안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뗐다.
“나 못생겼어?”
“예?”
⚜ ⚜ ⚜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질문에 하르힌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말로 이룰 데 없이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몸매까지 훌륭해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질문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던 하르힌은 머리를 긁적였다.
“거울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이제껏 내가 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대체 왜?”
“왜요? 차이기라도 하셨나요?”
“리제가 나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하르힌은 창을 바라보았다. 마탑의 창 사이로 노을이 지며 뜨거운 태양 빛이 방을 붉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으니 이 시간까지 두 사람은 충분한 대화를 나눈 뒤일 텐데, 이안의 표정은 착잡해 보이기만 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정확히 말해주셔야 제가 알 거 아닙니까….”
“뭐 꽃과 함께 케이크를 준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후가 문제란 말이지.”
“?”
“왜인지 그녀가 날 더 밀어내는 기분이야.”
“호오?”
하르힌이 추임새를 넣으며 두 번째 당근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우리가 친구라고 하더군. 마치 선을 긋듯.”
이안이 짜증스럽게 제 머리칼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말했다.
하르힌은 의외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분께서 저하를 딱 친구라고 정의하셨다는 거네요? 그것이 저하는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고요.”
“정확해.”
분명 리제아나 또한 이안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만 같았는데. 친구라니.
하르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성격에 밀당할 것 같진 않은데….’
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몇 안 되는 흥미로운 주제에 하르힌은 자세를 고쳐 앉고는 우유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래서 결론은 내고 오시긴 한 겁니까? 설마 친구 맞다고 대답하신 건 아니겠죠?”
“음….”
“음이라는 건…. 대답하신 거잖아요! 저하는 다 완벽하신데… 왜 연애 쪽에서만…!”
“뭐라?”
하르힌이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이안이 답답해 결국 가슴을 두드렸다.
“만일 친구라고 인정해버린다면 앞으로 그 선을 넘기 힘들 겁니다.”
“뭐?”
그는 마치 번개를 정통으로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검술 연습 같이하기로 했단 말이야. 내일부터.”
“검술 연습은 또 뭡니까…?”
알 수 없는 이야기에 하르힌이 인상을 더욱 구겼다.
이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그럴수록 하르힌은 답답함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네요.”
“적어도 내 마음을 확실하게 고백해두고 싶어. 받아들이는 것은 리제의 마음이겠지만.”
이안이 소파에 더 깊게 자신의 몸을 기대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애초에 이미 여러 번 마음을 표현한 것 같지만.’
그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리제아나를 대하는 이안의 태도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걸 정말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로 못 보는 척하는 건지 리제아나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안이 현재,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뭘 고민하십니까? 하시던 대로 직진하시죠, 그럼. 단 부담스럽지는 않게요. 뭣하면 검술 수업으로 더 관계를 진전하셔도 되겠네요.”
어차피 이안은 고민을 털어놓으러 온 것뿐, 사실상 그가 이안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젠장. 나도 연애하고 싶네….’
현재 앞에 있는 당근 케이크에나 집중하기로 한 하르힌은 또 한 번 케이크로 깊숙이 포크를 찔러넣었다.
하늘이 덧없이 붉었다. 이안은 붉어지는 노을빛처럼 한없이 사랑에 빠져들고 있다.
⚜ ⚜ ⚜
크로덴느 백작가 저택 너머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노을빛은 모략을 꾸미고 있는 두 여성을 장렬히 비추었다.
“제가 이전에 드린 그 새로운 아모리스 향수 효능이 어떻던가요?”
“사실상 시도해볼 시간도 없었어.”
델리사는 라이핀에게 쫓겨나던 일을 회상하며 잘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왜 그녀를 거부하는지 알 수 없었다. 향수의 효능이 그리도 쉽게 빠져나갈 리 없었다.
“제대로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는 소리네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네르아가 두 번째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왜?”
“일단 그 향수에 새로운 재료를 첨가했거든요. 그리고 제게 요구하신 향수의 조건과 맞아떨어지기도 하고요.”
“?”
네르아가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델리사의 눈이 재빠르게 그녀의 화장대 위의 향수로 향했다.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하듯 눈에 불을 켜고는 손에 힘을 주어 향수를 휘감았다.
“정말이야, 그 말?”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쉽사리 믿지 못하는 델리사를 보며 네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델리사 님은 어째서 그 향수가 필요한 건가요?”
“그건 왜 묻는 거지?”
네르아의 물음에 델리사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녀를 경계했다.
델리사의 날선 시선에도 네르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원래 사연이 얽힌 향수가 힘이 더 강해지는 법이거든요.”
델리사는 여전히 델리사를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별거 없어. 단지 남자의 마음을 얻고 싶은 여자의 욕망 중 하나일 뿐이지.”
“그 남자, 보통 남자가 아니잖아요?”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네르아의 말에 화들짝 놀란 델리사가 고개를 쳐들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고객님의 상대가 단순한 귀족 남자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걸요. 그래서, 이야기 계속해보시죠?”
“하….”
델리사는 짧은 탄식 후에 숨을 들이마시고는 네르아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도회에서 폐하의 마음을 얻을 기회가 있었는데, 빼앗겨 버렸어. 리제아나 이 쓸모없는….”
델리사가 이를 바득 갈았다.
‘리제아나?’
기묘한 위화감이 네르아를 덮쳐왔다.
“첫 번째 무도회에서 보기 좋게 딴 여자가 가로챘지. 결국, 폐하는 그 여자와 국혼을 하셨지. 하지만 네 향수 덕에 후에 그 사람의 마음을 다시 가져올 수 있었지.”
분하다는 듯 이를 갈다가 히쭉 웃는 그녀는 흡사 마녀와도 같았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뭔가요?”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나의 남자를 빼앗아간 간악한 여자지.”
델리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네르아는 꺼낼 이야기가 더 남아있었다.
“그 아비드 제국의 소문난 악녀 말이지요? 그 여자,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귀찮게 또 뭘 그런 걸 물어봐? 칙칙하고 답답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에 음침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졌어!”
우연일까? 네르아의 머릿속에 한 여자가 스쳤다.
자신을 여기까지 내몰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망할 여자.
그 여자 때문에 이안이 자신을 버렸다.
더군다나 마력까지 봉인해버리고서.
“그러고 보니… 저하께서 매번 ‘리제’라고 호칭했는데…. 설마.”
네르아는 그제야 맞추어지는 퍼즐 조각에 머리를 굴리며 뇌까렸다.
“답답하게 뭐라는 거야?”
보다 못한 델리사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네르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그 여자가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였다고?
“혹시 아비드 제국의 리제아나라는 그 황태자비, 현재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네르아는 입술을 피나게 짓씹었다. 비린 피가 입안에 퍼졌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번듯하게 올라가 있었다.
드디어, 모든 정황이 어렴풋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