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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117)

47화

이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 뒤로 왜인지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에 리제아나는 불안해졌다.

그와 그녀는 친구라 일컫기도 모호한 사이였던 걸까. 그가 어느 정도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그녀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단지 혈혈단신으로 낯선 나라에 온 그녀를 동정한 것뿐이라면?

“친구….”

이윽고 이안이 낯설다는 듯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

“친구라….”

이안이 리제아나의 말을 또다시 중얼거렸다.

그는 창문 너머를 응시하며 찻잔의 남은 차를 가볍게 목으로 흘려 넘기고는 얕은 웃음을 흘렸다.

“친구…. 그래. 좋아. 나만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어.”

잠시 어두운 낯빛이 스쳤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그의 기색을 빠르게 알아챈 리제아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계약 관계로 얽힌 것뿐이라 그가 그녀를 신경 써준 것일지도 몰랐다.

동정심도 아닌 그저 그의 이득을 위해서 말이다.

“저와 친구 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아, 아냐. 친구. 난 좋은데?”

그가 정말 좋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나, 반응, 표정 변화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편이었던 그녀였던 지라, 그의 행동이 자꾸 걸렸다.

“케이크는 마저 먹도록 해. 차는 다 마신 것 같으니 더 따라줄게.”

낮은 음성으로 읊조리는 이안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실망스러움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 뭐 물어봐도 될까?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거든. 탁 터놓고 서로 친구라고 인정한 김에 물어보고 싶었어.”

근 한 달 동안 이안은 그 나름대로 그녀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아비드에서의 그녀의 위치, 그녀의 실종을 황실에서 이를 감추고자 한다는 점, 그녀가 황궁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의문을 풀리지 않았다.

카르페디엠 시장에서 다트를 하던 그녀가 익숙하게 몸을 놀린 것을 이안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영애일 뿐인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아비드는… 개방적이긴 해도, 남녀 역할에 대해선 꽤나 엄격한 편이잖아.”

이에 리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텐젤 제국은 남녀의 역할에 규제 없이 각자의 재능을 인정해주지만 아비드 제국은 그렇지 않았다.

“저희 레이디들은 대부분 손에 책을 들고, 무도회에 나서는 법과 훌륭한 요조숙녀로 거듭하는 법을 배우기도 하죠.”

“그렇지… 그런데.”

“?”

“카르페디엠 시장에서 그날 다트를 하던 때 말이야. 그대에게서 여전히 답을 여전히 듣지 못했네.”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는 곰곰이 그날의 기억을 한차례 되살려보기 시작했다.

필로렌치아 공작에게 한 방을 먹인 후 이안이 ‘데이트’라며 카르페디엠 시장으로 그녀를 데려갔던 날임이 분명했다.

“아비드에서는 어떻게 지냈었는지 물어봐도 돼?”

“대충 아실 텐데요.”

“뭐, 구설과 진실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까.”

리제아나의 날렵한 움직임에 의구심을 품은 이안이 그녀에게 질문했지만, 그녀는 결국 질문을 피했다. 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안은 아직 그때의 의문을 풀지 못한 것이 걸린 모양이다.

“그때…?”

“몸 쓰는 것이 꽤 익숙해 보이더군.”

“….”

그야 당연했다. 리제아나는 필로렌치아에서 받지 않은 교육이 없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리제아나에게 더 많은 것을 원했고 곧이어 검술까지 그녀에게 가르치려 들었다.

그녀의 체력이 약해 그가 원하는 교육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쓰는 것에 더 익숙해진 이유는 공작의 가혹한 처벌에 있었다.

처벌에 익숙해진 몸뚱이는 절로 살기 위해 날렵해질 수밖에 없었다.

검술과 더불어 혹독한 처벌 때문에라도 다른 영애들과 달리 몸 쓰는 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리제아나는 애써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거짓말을 할까? 하지만 이안이 손쉽게 간파할 게 안 봐도 뻔해.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사를 다시 끄집어낼 수밖에 없어. ’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사이 리제아나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녀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그에게 모두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그가 원하는 답 내에서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말하기 곤란하다면 재촉할 생각은 없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적안이 잔잔하게 그녀를 담아내고 있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이안에 리제아나는 고민과 달리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안.”

리제아나는 어둡고 습한 기억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단단히 각오한 채 그를 불렀다.

‘그래…. 그가 그동안 날 위해서 해온 것들을 생각해. 나라고 그에게 이런 이야기, 못 할 게 뭐야. 친구…가 되기도 했으니까.’

한번 결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응. 리제아나.”

이안은 그녀의 부름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했다.

이안이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모은 리제아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듣고 있어.”

그녀의 손등을 덮는, 큰 손이 주는 온기에 리제아나는 이야기도 하기 전에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에요.”

“….”

리제아나는 마른 입의 침을 삼켰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사고로 잃었어요.”

답지 않게 리제아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드레스 자락을 꾸욱 잡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내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저 때문에 벌어졌다고…. 아버지는 지금까지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필로렌치아 공작은 자식에 대한 올바른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리제아나는 공작의 벼락같은 고함과 때때로 날아오던 손찌검을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아버지의 학대와도 같은 교육을 다른 말 않고 받아온 건. 저조차도 어머니가 그리되신 게, 제 탓으로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학대라고…?”

일순 리제아나의 눈빛이 바람 앞의 풀처럼 흔들렸다.

“아버지에 의해 저는 가문에서 다른 영애와 달리 굉장히 기초적인 검술을 배웠어요. 또한…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방침으로 가끔은 처벌도 받았고요. 그래서 다른 영애들과 달리 몸 쓰는 일에 능해 보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리제아나가 씁쓸한 눈을 하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차마 그를 바라보기 힘들었다.

그녀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자신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화가 나.”

“네?”

“당신이 당신의 부모에게서 그런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

이안이 도리어 자신이 괴로운 듯한 얼굴을 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야기를 듣는 이안이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라 더욱 답답했다.

“이미 지난 일이에요. 과거에 묶여선 지금을 행복하게 지낼 수 없잖아요.”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리제아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이안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야. 하지만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해주었으면 좋겠어.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지킬 수 있다면 좋을지도….”

“네?”

이안이 곰곰이 제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시장과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을 다시 돌이켜 보면 나쁘지 않은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뒤통수 얼마나 선득해지던가.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언뜻 보기 너무 연약해. 그러니 내가 검술을 가르쳐 주고 싶어. 혹시라도 내가 없을 때 그대에게 다른 일이 생기지 않게.”

“…!”

혹여 그녀가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나 이안은 그녀가 받아주길 바랐다.

그는 그녀가 대답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저 체력을 키우는 기본적인 검술만 배웠어요. 그러니 많이 부족할 거예요.”

그때의 어린 그녀는 상처가 날 정도로 쓰라리고 무거웠던 검이 싫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리제아나는 억지로 검을 들었다.

“왜냐하면 약속된 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공작은 검술 선생님을 쫓아냈거든요.”

“그렇게 짧게만 배웠다고? 하지만 아직 몸이 기억하는 걸 보면 당신 재능 있었잖아?”

이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별수 있나요. 그땐 제가 아버지의 말을 어길 생각을 감히 해보지도 못했는걸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쓰리게 웃는 리제아나의 눈은 쓸쓸해 보이기만 했다.

리제아나의 시선 끝에 아쉬움이 머물렀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잘 버텼네.”

“네?”

“용케 그 집안에서 살아남았으니까.”

리제아나는 일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여전히 그의 손이 리제아나의 작은 손 위를 덮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그동안의 설움을 모두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이런 위로를 받은 적이 있던가?

그 필로렌치아 가문의 하나뿐인 여식이란 이름 뒤로 고통받던 그녀를 온전히 공감해주던 사람이 있던가.

“간단한 검술 정도는 내가 알려줄 수 있어.”

“이안,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무슨 소리야. 또 그런 일이 있을 때를 위해 대비해두는 편이 좋잖아?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대를 지킬 것이지만. 만약이란 것이 항상 있으니까.”

“그렇게 제가 걱정되나요?”

“지금까지 당신이 겪은 일이 있는데 당연한 거 아냐?”

짐짓 이안이 표정까지 굳히며 단호하게 말하자 리제아나는 큭, 그만 웃고 말았다.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도 투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리제아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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