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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46/117)

46화

“이거 이렇게 만드는 거 맞아?”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냥 사 온 후에 몰래 만든 척하면 된다니까요?”

하르힌과 이안은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럼 진심이 전해지지 않잖아!”

“때로는 정성스러운 외관이 가장 진심을 잘 전달할 수 있지요….”

마탑의 꼭대기 층에 위치해있는 낡은 부엌 안에서 두 사람은 말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동안 요리도 안 배우고 뭐했지?”

이안은 비꼬는 어조로 하르힌의 심기를 긁기 시작했다.

“제가 보좌관으로서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거였습니까? 네?”

“도와줄 거 아니면 나가.”

저주에서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리제아나가 밤낮으로 곁에 있어 준 덕분에 빨리 건강을 되찾은 이안은 그동안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대화를 통해 이안은 리제아나가 한 번도 생일에 제대로 된 축하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를 잃은 이안이었지만 공작저 사용인들 덕분에 한 번도 생일을 허투루 치른 적이 없었다. 시엘과 하르힌의 죽이 척척 맞았던 덕분에 오히려 귀찮았던 적이 더 많았다.

반면 리제아나는 어머니를 여윈 후로 흔한 케이크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에겐 생일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생일도 지나셨다면서요, 그분은!”

“제대로 축하받은 적이 없다잖아.”

그래서 하르힌과 머리를 맞댄 이안은 깜짝 이벤트를 해주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는 부엌을 청소하고 요리를 시작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모두 엉망이 될 거예요. 안 돼요. 더는!”

“내가 할 수 있다니까? 나 못 믿어?”

하르힌이 이안의 손에 있던 레시피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러 나오는 경고입니다!”

“됐어! 나가!”

구슬리기도 하고 협박도 해보아도 레시피를 돌려주지 않는 하르힌에 화가 오를 대로 오른 이안은 결국 마력으로 하르힌을 밀어냈다.

하르힌이 그대로 부엌 밖으로 쫓겨나기 무섭게 부엌문이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언제 빼앗았는지 레시피가 둥실 이안의 손 위로 안착했다. 이안은 다시 레시피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빵을 구워야 하는데, 먼저… 반죽을 하고…. 발효는 또 뭐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이안은 한참 레시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10분 후, 낡은 부엌문이 살포시 열리며 이안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부엌 앞을 서성이던 하르힌이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저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알게 됐어.”

이안이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뭐를… 말입니까?”

“직접 만들거나 사 오거나, 그녀를 위한다는 마음은 같잖아. 나는 시간 낭비를 아주 싫어하니 직접 사 오는 것이 효율적이겠군.”

그의 뻔뻔스러운 말에 하르힌은 말문이 막혔지만, 후환이 두려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유명한 디저트 가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하르힌이 이안에게 고집이 참 한결같다며 슬쩍 언질을 놓다가 걷어차일 뻔도 했다.

“이안 님.”

“뭔데, 말해.”

“그… 아직 고백은 안 하셨습니까? 그래도 하실 거죠?”

“고민 중이야.”

“네에? 왜요? 마음을 정하면 언제나 곧바로 저질러버리셨잖아요!”

무도회에서 마음을 깨달은 뒤로 이안이 더욱 리제아나에게 다가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민 중이라는 그의 대답에 하르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제가 이상해.”

“어떤 점이 말입니까?”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해.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한 발짝씩 멀어지려 하는 것이 보인단 말이야. 왜지?”

“글쎄요. 그분의 마음은 이안 님과 다를 수도 있으니….”

“….”

하르힌의 일침에 이안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설마 그분의 마음을 생각해보시지 않은 겁니까….”

그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리 연애 고자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실컷 잔소리를 시작했다.

“확인해볼까…? 하지만 어떻게?”

“…저하, 제가 이래 봬도 연애 경력 다수입니다.”

하르힌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자 이안이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라니까요?”

“그래서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이안의 물음에 하르힌은 그에게 손짓하며 둘뿐인 마차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목소리로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니까 저라면요….”

⚜ ⚜ ⚜

이안은 포장해온 당근 케이크와 레드벨벳 케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안은 두 개의 케이크 중 돌아가던 길에 산 꽃다발과 어울리는 붉은 레드벨벳 케이크를 선택했다.

남은 케이크는 하르힌에게 수고한 보상이라며 주었다. 이안은 거울로 걸어가 제 모습을 확인한 후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안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리제아나 방 앞으로 향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내 이안은 문을 두드렸다.

“리제, 뭐해? 들어가도 돼?”

“들어오세요. 마침 책을 다 읽었으니까요.”

언제나 듣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 리제아나의 곱고 가는 목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이안은 빠르게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낸 후에, 마법으로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따스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꽃과 케이크를 건넸다.

“세상에나. 이게 다 뭐…예요, 이안?”

역시나 놀랐던지 리제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꽃과 케이크라니? 그녀는 그녀에게 따로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나 짚어 보았지만 도통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영문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보는 리제아나를 보며 이안은 낮게 웃었다.

“당신한테 주고 싶어서.”

“저한테요?”

“음… 일단 앉을까?”

리제아나의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테이블로 데려가 반대편에 의자를 끌어 앉도록 도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꽃과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저번에 볼 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단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

이안은 이공간에서 막 우린 뜨거운 재스민 차와 함께 접시와 포크를 꺼냈다.

“생일도 지나서 축하한다는 말도 못 하고, 요리 실력도 부족해 사온 케이크지만 그래도… 주고 싶었어.”

그의 눈이 흔들림이 없이 정확히 리제아나를 바라보고 있던 터라, 그것이 꽤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대가 텐젤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아비드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회심의… 뇌물 정도라고 알아두라고. 여러 가지로 감사의 인사라고나 할까….”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민망했던지 얼버무리는 것으로 막이 내리는 꼴이 되었지만.

“감사합니다….”

리제아나가는 얼떨떨하게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녀만을 위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케이크였다.

누군가에게 진심 어림 마음을 받는 일은 리제아나에게 처음이었다.

필로렌치아 가문에서나 황궁에서나 리제아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다.

펠로렌치아 가문에서는 공작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황궁 안은 그녀를 끌어내리기 위해 눈을 빛내는 사람들뿐이었기에 리제아나는 독한 황태자비를 가장한 채 그들을 상대해야 했다.

라이핀에게 죽은 후, 다신 사람을 믿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닫힌 마음에 자꾸 바람을 일게 했다.

“그대도 저번에 감사의 인사를 했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대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안이 부드럽게 일어나 레드벨벳 케이크 한 조각을 칼로 조각내어 리제아나의 앞에 놓아주었다.

뒤이어 주전자도 가볍게 들어 그 옆에 있는 찻잔에 따르자 은은한 포근한 재스민의 향이 올라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리제아나는 포크를 들어 레드벨벳 케이크를 입안에 넣었다.

폭신폭신한 빵의 시트와 새콤하고 단 크림치즈가 맞물려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어?”

하르힌과 심혈을 기울여 고른 케이크지만 그녀의 입맛에 맞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안이 초조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네, 맛있어요.”

잔뜩 웃음꽃이 핀 얼굴로 리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온 리제아나의 미소에 이안은 그대로 다리에 힘을 풀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꽃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꽃도 마음에 들어?”

“꽃이요?”

“예쁘지?”

“우와 꽃 색깔이 파란색이네요? 이 꽃은 어떤 꽃이에요?”

“델피늄이야. 꽃말은….”

이안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만을 담고 있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비껴갔다.

언제나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고서던 그였기에 리제아나는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꽃말은요…?”

결국 답답함에 못이긴 리제아나가 먼저 되물었다. 이안이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

이안의 타오르는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리제아나는 호흡하는 법을 일순 잊었다.

“진심이야.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내가 말했잖아, 감사의 표시라고. 그대가 나를 위해 애써주었던 만큼, 나도 그대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해줄게.”

“이안….”

“케이크는 사실 생일을 제대로 축하받아본 적 없는 리제, 그대를 위한 작은 표시였어. 케이크는 하르힌이 소개해준 빵집에서 사 온 건데, 맛있다니 다행이네.”

그런 이안의 모습에 눈치 없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들을 리는 없었지만, 리제아나는 신경 하나하나가 그를 향하는 것을 깨달았다.

리제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그의 접시에 조각 케이크를 하나 얹어 맛보더니 연이어 감탄사를 내뱉기만을 반복했다.

‘안 돼…. 이러면….’

초조해져 갈 뿐이었다.

리제아나는 그녀를 위하는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수록 그녀는 불안하기만 했다.

전생에서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그녀다.

다시 누군가를 온전히 믿을 수도, 그 사랑을 받는 것도 그녀에겐 벅차기만 했다.

“리제아나? 더 안 먹어?”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그의 은발이 살랑이며 반짝였다.

그녀에게 케이크를 더 권하는 그를 보며 리제아나는 달싹이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감사해요, 이안. 꽃은 잘 받아 둘게요. 케이크도요. 이안이 제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친구.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옅게 미소 짓던 이안의 얼굴이 일순 그 단어를 듣자마자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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