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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117)

45화

저주는 언제나 그래왔듯 캄캄한 밤하늘처럼 이안의 정신을 어둠으로 덮으며 그를 잠식시키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헤매던 이안은 눈꺼풀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안. 일어나렴.”

그는 문득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의해 깨어났다.

“…아버지.”

부스스 작아진 몸을 일으키며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다시 옛 꿈속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마차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커다랗고 웅장한 모습의 황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궁이다. 도착했군.”

선대 데벤시아 공작이자 이제는 곁에 없는 체스펠이 이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안이 보기에 그의 미소는 어색하기만 했다.

“문양에 통증은 좀 어떠냐? 아직까지도 아프거나 막 그러니?”

“네, 아버지.”

어린 이안은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마치 목덜미를 누가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나타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겪어온 일이었다.

“데벤시아 공작님, 데벤시아 공자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황궁의 입구 앞에 도달해 마차에서 내리니 지금보다 더 젊은 모습의 일레네가 그들을 맞이하며 황제에게로 안내했다.

언제나 강인한 모습만을 보이던 이안의 아버지였지만 역시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한 일을 앞에 둔 듯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주 잡은 아버지의 손은.

‘…무척 떨고 계신다.’

떠는 손과 달리 그는 결연한 시선으로 앞서서 그들을 안내하는 일레네를 따랐다.

“체스펠 렌디 데벤시아 공작 저하와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자님이십니다!”

알현실을 지키고 있던 병사 앞에 도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문 너머에 있는 황제에게 외쳤다. 문이 장엄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이구나, 이안.”

아담 황제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알현실을 울렸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이안과 체스펠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황제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손을 왼쪽 가슴 위로 가져가 주먹을 쥐는 것으로 전통적인 인사법을 마쳤다.

“허허. 일어나도록.”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체스펠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이 경사로운 날임이 분명한데 왜 공작 얼굴이 이리 어두워 보이는가. 다른 일이라도 있는가, 공작?”

듣기 불편할 정도로 조롱기 어린 말투였지만 이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주먹을 꽉 쥐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어린 그가 무슨 힘이 있어서 함부로 나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도… 지킬 것이 생겼으니 더 조심해야 하지만 그전에도 그럴 수 없었지. 약을 얻기 위해서라도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었으니.’

이안이 데벤시아 공작위를 계승하자 황제는 더욱 철저하게 그를 교육하려 들었다. 그의 명령을 따라 그를 도왔지만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안이 공작으로서가 아닌 ‘텐젤의 미친개’로서 오롯이 황제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휘둘려지고 있다는 것을.

“아닙…니다.”

이안은 체스펠의 비통 어린 어조에 고개를 돌려 체스펠을 돌아보았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일단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다과라도 들이라고 하지. 응접실로 갈까?”

“폐하. 이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뭐? 아직 설명하지 않았단 말인가?”

“알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 일정에는 변동이 없으나 부디 그 점만을 고려해주십시오.”

정체 모를 대화들이 이안의 머리 위로 오갔다.

호기롭게 웃는 황제와 덤덤하게 대응하는 체스펠. 두 사람 사이로 날카로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끔찍한 기억이었던 거지? 그래. 좋아. 이에 대해서는 나도 함구하도록 하지. 나에게도 꽤나 귀찮은 일이니.”

“…폐하.”

체스펠이 꾹 다문 잇새로 음산하게 황제를 불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아야-”

그때 저릿한 통증이 재차 그의 뒷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왜 그러느냐 이안?”

“목덜미가 아파요, 아버지.”

이윽고 잠잠하던 통증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심한 욱신거림에 이안이 고개를 숙이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가 알현실 안의 경비와 시종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황제의 손짓에 그들은 조용하고 빠르게 알현실 밖을 빠져나갔다.

체스펠은 고통스러워하는 이안을 자신의 뒤로 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안이 당황하며 물었지만 체스펠도, 황제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악.”

또 한 번 고통이 이안을 강타했다. 이안은 목덜미를 손톱으로 긁으며 고통을 잠재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꿈속에서도, 고통은 선명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정신과 몸을 갈라놓았다.

“아버지…. 아버…지…. 사…살려주세요…. 저… 너무…. 너무 아파요….”

눈물겨운 일곱 살 아들의 애원에도 체스펠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의 아들에게서 몸을 돌린 채였다.

“아아악!”

시야가 희뿌옇게 번져 앞을 볼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을 일으켜 누군가에게로 달려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끝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달려든 틈새로 현실의 장벽이 열리며 뜻하지 않게 현실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안?”

가늘고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리제아나의 목소리였다.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리…제…. 리제….”

리제아나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며 이안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놀란 그녀가 그의 어깨를 감싸자 그녀의 온기에 간신히 마음을 놓은 그가 눈을 감았다.

“괜찮아요? 식은땀이….”

“나는… 괜찮아…. 나는….”

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잊을 수 없어 이안은 고통스러웠다.

‘겨우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이런 꿈을 꾸는 이유가 뭔데. 도대체 왜.’

이안이 괴로워하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 ⚜

“쓰러졌다? 그래서 네가 대신 온 것이라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하르힌은 알현실을 울리는 황제의 호통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와의 알현이 얼른 끝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따르는 주군의 명이니 하르힌은 명령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셈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죠…. 요즘 저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안이 일러준 대로 하르힌은 그를 걱정하는 척, 그의 상태를 하나씩 황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말한 것처럼 황제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눈동자에 진한 이채가 띠었다.

“심상치 않다니?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 심장을 자주 부여잡으며 잠을 오래 주무십니다…. 자주 피곤한 듯싶고….”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런 증상은 처음 듣는데. 흥미롭군.”

황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르힌은 다시금 헛기침하며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시켰다.

“그래서 저하께서 폐하께 믿을 무엇인가가 있다고, 꼭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래.”

아담 황제는 네르아의 부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네르아가 없으니 이안의 저주를 막을 약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르아는 현 텐젤에서 이안의 저주를 막는 약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였다.

텐젤에서 마법으로 물약을 만드는 인재는 드물었다.

또한 네르아는 그중에서 뛰어난 인재였다. 그녀는 황제가 준 제조법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였다.

예부터 전해지던 제조법대로 고대저주를 막는 약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가 사라지다니.

아담 황제는 네르아의 부재에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네르아가 주고 간 여분의 약이 아직 많았지만, 불안했다.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아 더더욱 그랬다.

한 번도 그의 연락을 무시한 적이 없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이안이 자꾸만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으니, 아담 황제는 울컥 노기가 치밀었다.

“자, 가져가거라. 혹시 모르니 여분의 것도 챙겨주마.”

그래서였을까. 황제는 두 가지 약을 꺼냈다. 하나는 그의 피로 만든, 진정제가 담긴 약이었고 또 하나는 네르아가 사라지기 전 새로이 만든 저주를 증폭시켜준다는 약이었다.

아직 실험을 거치지 않았으니 함부로 쓰지 말라고는 했지만 황제는 이안에게 다시금 그의 위치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약이 아니라면, 너는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했다.

목줄이 풀어졌다면 다시 주제를 알도록 꽉 움켜쥐는 것이 응당 맞는 일 아니겠는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제의 검은 속내를 알 리 없는 하르힌은 고개를 숙이며 약을 받고 유유히 발걸음을 돌려 걸어 나왔다.

저만치에서 황궁을 바라보며 하르힌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수확제 이후로 네르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그녀의 방을 방문했지만, 텅 비어 있었다. 결국 넌지시 이안에게 물어보아도….

“내게 물어도 네르아의 행방은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라고 말할 뿐이었다.

왜인지 그의 주군은 네르아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만 같았다.

“이상해…. 그녀가 이렇게 오랜 시간 나타나지 않는다고?”

무언가 이상했다.

이윽고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네르아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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