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라이핀은 사절단의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라이핀은 미묘한 얼굴로 그의 말을 곱씹었다. 리제아나가 텐젤에 있다고?
“…그래서 지금 네 말을 종합해보자면, 텐젤 제국의 무도회 그러니까 텐젤 황실의 수확제 무도회에서 분명 리제아나를 본 것 같단 말이지?”
필로렌치아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그 청년이 전한 말을 다시 한번 재차 정리했다.
“긴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 분명 확실한 정보겠지?”
라이핀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긴장으로 몸을 잘게 떠는 청년과 눈을 맞추며 되물었다.
“그…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그런 두리뭉실한 대답을 듣자고 되물은 게 아닌데. 난 정확한 답변을 원해. 정말 리제아나를 봤나?”
“….”
“확실히 보았냐고 물었다!”
청년이 확실히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라이핀이 큰 소리로 되려 청년을 다그쳤다.
“그…그러니까 무도회에서 잠깐이라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보랏빛 눈을 가진 여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녀의 상대는 뒤돌아 있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아마 데벤시아 공작인 듯했습니다….”
“데벤시아 공작?”
라이핀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순간 공작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 청년이 본 여자가 정말로 리제아나인지 아닌지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내 공작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 앞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보았다, 이 말이지. 아니, 확실히 보았다고 정하지. 폐하, 이건 기회입니다.”
“기회?”
공작이 날름 혀를 입술로 핥으며 침을 삼켰다.
“현재 그레고리 상단은…. 잠시 귀를 빌리겠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공작이 라이핀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크흠. 그레고리 상단은 아시다시피 텐젤에게 들킨 이상 살아 나올 거라는 희망은 접으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도 그들이 벌인 일을 몰랐다고 꼬리를 자르셔야 합니다.”
“그럴 예정이었네만.”
라이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공작의 말대로 아비드 제국은 그레고리 상단이 해온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텐젤 제국에게 강조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레고리 상단은 깔끔하게 버린 패로 취급하시고 이번에 새로이 세작을 선별해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흐음….”
“깔끔하게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아이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야기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자 라이핀은 혹 누군가 들을까 손을 올려 흥분한 공작을 제지했다.
“거기까지만. 나머지는 따로 이야기하지. 일단 일라이자, 저 아이에게 따로 쉴 방을 마련해주도록.”
생각할 것이 많아지자 두통이 찾아왔다. 라이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공작도 나가보도록 해. 때가 되면 부르지.”
이후 청년은 일라이자의 안내에 따라 나갔다. 공작 역시 공손하게 인사를 마친 뒤 뒤따라 알현실을 나갔다. 비로소 라이핀이 그토록 원했던 고요가 찾아왔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얽히고설킨 의문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 청년이 목격한 이가 정말 리제아나라면 그녀는 왜 텐젤의 무도회에 있는 것인가?
‘도대체 그녀가 무슨 연줄로?’
애초에 텐젤은 어떻게 넘어갔으며 또 무슨 방법으로 감쪽같이 사라진 걸까.
게다가 파트너와 함께였다고? 그녀가 자신 말고 누구와 어울릴 수 있단 거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황좌에 걸어가 털썩 주저앉은 라이핀이 두통에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젠장. 젠장. 리제아나.”
바보가 되어버린 듯, 그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리제아나의 이름만을 되뇔 뿐이었다.
⚜ ⚜ ⚜
어느덧 시간은 금세 수확제로부터 한 달이나 흘렀다.
허리께를 채다 덮지 못했던 그녀의 머리칼이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왔다.
네르아가 없는 마탑은 이전과 달리 조용했지만 평화로웠다.
기꺼이 서로에게 시간을 쓰며 이안과 리제아나는 그사이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되었다.
“준비됐어?”
“네.”
“하르힌도 나갔어.”
“준비됐다니까요.”
어느새 이안은 창 너머로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보름달이 뜰 모양인지 목 뒤로 따끔거리는 고통이 전해졌다.
황제가 또 한 번 그를 의심할까 오늘은 하르힌에게 황궁에서 약을 받아오라 이른 참이었다.
“아직 그렇게 고통이 심하지 않아. 발현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은 듯하네.”
이안이 벽에 기대어 천천히 떠오르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르힌이 그 대신 황제를 대면할 터였다. 하르힌이 그가 저주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변명을 대도 황제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약을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못마땅한 황제의 얼굴이 절로 떠올라 이안은 비릿하게 웃었다.
황제가 더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이안은 더는 황제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리제아나가 옆에 있었다.
그녀는 그의 저주를 막을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슴을 옥죄는 고통도, 거칠어지는 숨도 그녀가 옆에 있으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녀만 곁에 있다면 그를 괴롭게 하는 것들은 다 없어질 것만 같았다.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문득 리제아나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오후에 하르힌이 그녀에게 전해준 소식이었다.
“소식 들었어요. 뭐 하르힌이 전해준 소식이긴 하지만.”
“이런, 내가 전해주려고 했는데.”
이안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그레고리 상단은 이틀 전 처형당했다.
19년 전 벌인 범죄와 함께, 기존 무역단이 아님에도 아비드 황실을 속여 무역단으로 신분을 속인 죄, 양귀비를 몰래 밀수한 죄 등등의 형량이 합쳐져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비드 측에서도 그레고리 상단의 전적을 전혀 몰랐다며 깨끗이 발을 빼는 바람에 그레고리 상단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 아니 필로렌치아 공작의 자금줄이 완전히 잘려버려서 속이 시원하네요.”
리제아나가 악녀처럼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붉은 얼굴로 씩씩거릴 모습을 떠오르니 조금쯤은 고소한 기분이었다.
“처형 날, 사형수들의 가족이 찾아왔더군. 그들은 끝까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보다가 비로소 그들이 처형당했을 때, 눈물을 흘리더군.”
이제 이안은 자연스레 리제아나가 앉아있던 침대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펴고 앉아 말을 이었다.
사형수들의 가족들은 사형장에 찾아와 그들이 죽어서야 비로소 미동도 없는 시체를 껴안고 울었다.
“미워도 가족이라는 건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리제아나는 그런 이안을 보며 안타까운 눈을 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일 테니까요.”
그런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란 무엇일지 이안은 고민해보았다.
어느새 둥글게 차오른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에서 찬란하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가 심해졌다.
왜인지 그동안 그녀에게 숨기고자 했던 진심이 그의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음, 내가 비밀 하나 이야기해도 될까?”
아직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던 이야기라 떨렸지만 애써 침을 삼키며 이안이 말했다.
“난… 내 저주가 두려워. 19년 동안 매번 찾아온 저주여서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두려워. 이따금 내가 온전한 정신이 아닐 때도 있거든. 저주의 발작 때문에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하지만 이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어.”
“….”
“혹여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 발작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내가 한 행동을 기억할 수 없어. 그 점이 가장 난 두려워.”
이안의 시선이 먼 허공을 향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받던 물약이면 저주가 진정되었어. 그래서 이젠 저주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한쪽 다리를 꼰 채로 시큰거리는 목덜미를 가리던 붕대를 천천히 풀어 태양 문양을 드러나게 했다.
“…그런데 또다시 난 겁쟁이처럼 저주를 거부하고 싶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의 적안이 또렷하게 리제아나를 응시했다.
“어떤 비밀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대가 내 저주를 안정시켜주니 황궁에 갈 수고는 덜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무서워.”
리제아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듣기만 했다.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주어야 할지 아직 사고 회로가 정확히 돌아가지 못했다.
“처음으로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겠지.”
이윽고 목덜미로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목덜미의 통증이 곧 전신으로 퍼져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안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미안 그대를 지켜주고 싶은데 결국 또 이런 위험한 부탁만 하게 되네.”
“?”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일렁였다.
“리제아나 당신을 정말 잘 지켜주고 싶은데…. 왜 항상….”
그 말을 끝으로 더는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이안은 흐려지는 의식에 침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리제아나의 입이 달싹거리며 움직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녀의 말을 채다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