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17)

43화

한밤의 침입자는 전혀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두 손을 여유롭게 들어 보였다.

문득 멀리서 크로덴느 백작 부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델리사의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델리사?! 괜찮니?!”

조금 전, 네르아를 창문에서 마주하고서 너무 놀라 내지른 비명 소리가 꽤 컸던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방문 밖을 향해 말한 델리사는 다시 네르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여유로워 보이네.”

“이래 봬도 초조한 편입니다. 혹시 남은 술 있으십니까?”

“너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에 만족스럽다면 기꺼이.”

델리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델리사 크로덴느. 현 황제의 정부이자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인. 웃는 모습이 특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만인의 사랑을 받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모두 가면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델리사는 본능적으로 네르아 또한 그녀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눈치챘다.

델리사는 그 표독스러운 얼굴을 더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꼴은 뭐니? 빨리 이야기나 시작하지? 별일도 아니면서 시간 끌었다면 넌 그대로 바로 황실에 세작으로 보고되어 단두대에 서게 될 테니까.”

서늘한 눈빛과 함께 거칠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 모습은 사랑스러운 얼굴과 비교되어 타락한 천사처럼 보였다.

“그럼 각설하고. 제가 감히 요청합니다만, 고객님. 저를 이곳에 몰래 숨겨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가 가진 모든 약초 지식으로 고객님에게는 특별히 더 특출난 향수들을 만들 수 있는 제조법을 드리겠습니다.”

“제조법을 주겠다고? 왜 네가 직접 만들지 않고?”

“아비드 제국에는 뛰어난 마법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전… 사정이 있어… 현재는 마법을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제조법만 있다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델리사에게는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녀에게서 사들인 물약이나 향수는 모두 효과가 뛰어났다. 다양한 약초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은 아비드 제국에서 특히 귀했다.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사정은 또 뭐고?”

“모종의 이유로… 저는 제가 있던 보금자리로 현재 돌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네가 위험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잖니, 결국.”

델리사의 허를 찌르는 한 마디에 매번 의기양양해 보이던 얼굴이 잠깐이었지만 일그러졌다.

그녀의 한 마디에 네르아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낮게 한숨을 뱉었다.

“흐음….”

델리사는 현재 상황을 돌이켜보며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혹, 저 여자에게 폐하를 확실히 낚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렇다면….’

몇 차례의 거래로 델리사는 그녀가 아비드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단한 지리도 헤매며 제국민이라면 당연히 아는 사실도 그녀는 모르곤 했으니까.

만일 그녀가 적대국인 텐젤인이라면 백작가 전체에 위험을 뻗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초에 저 향수를 사들일 때부터 감수해야 했던 위험이야.’

사랑을 피어나게 해주는 사랑의 향수, 아모리아. 이 약물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이미 몇 차례나 사용해온 델리사였다.

“…우리가 서로 알아가야 할 점들이 많을 것 같은데.”

델리사의 한 마디에 네르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힘이 닿는 데까지 너의 존재를 숨겨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너 때문에 우리들의 거래가 들킨다면 나는 이후의 일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을 거야.”

“좋습니다.”

“명심해. 너로 인해 내가 다른 피해를 입게 된다면 난 널 가차 없이 버릴 거야.”

“네.”

델리사의 경고에도 네르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그럼 너의 그 몹쓸 행색에 대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겠지? 네 손에 쥐고 있는 내 향수도 내놓는 게 좋을 거야.”

“물론입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네르아라고 합니다.”

네르아는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했다.

“델리사 크로덴느. 그리고 일단 그 옷부터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보기 매우 거슬려.”

“하지만 옷이 없는데…. …델리사라고 하셨나요?”

“후에 하녀를 시켜서 줄 테니까.”

네르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델리사’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델리사는 의문스럽게 이쪽을 바라보는 네르아를 보며 눈썹을 구겼다.

“뭘 그렇게 보니? 일단 너를 숨겨주는 조건으로 가장 강력한, 한번 다가가기만 한다면 제대로 ‘매혹’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향수의 제조법을 알려줘, 알겠니?”

“네…. 네….”

아비드 제국에는 ‘델리사’라는 이름의 영애가 흔한 걸까?

네르아는 검은 머리칼에 보랏빛 눈을 한 여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눈앞의 고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느새 노을에 검은 물감이 흩뿌려지고 기어코 밤이 찾아왔다.

리제아나와 이안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무사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순간이동에 성공했다. 두 사람은 야시장으로 가기 위해 로브를 걸쳤다.

“자, 갈까?”

“손은 왜 잡죠?”

리제아나는 본격적으로 야시장을 돌아보자는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에 로브를 올려주고선 그녀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는 그의 행동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 많잖아.”

이안은 능청스럽게 변명하며 그녀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카르페디엠 시장의 수확제 마지막 날이야. 불꽃놀이도 하니 구경꾼들이 얼마나 몰려오겠어. 혹시 리제아나, 당신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축제니 사람은 분명 많겠지만….”

“게다가 나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서로를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손을 맞잡고 다니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리제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안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말했다.

“혹시 내 손을 잡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런가? 그래서 거부하는 건가?”

“뭐라고요? 절대 아니에요.”

이안이 잔망스러운 말투로 장난을 던졌다. 하지만 리제아나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부정하자 이안이 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너무하네.”

“장난치지 마세요.”

“내가 진심이라고는 전혀 생각 안 하나 보네.”

“또, 또 장난.”

그가 방심한 사이 리제아나가 생각을 바꾸고 손을 빼낼까 봐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이안은 야시장의 중심부로 한걸음 내디뎠다.

-쿵쿵

왜인지 리제아나의 가슴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 감정은 뭐지? 리제아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질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결국 리제아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텐젤의 수확제 마지막 날 야시장은 그의 말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장에서는 음식들을 반값으로 팔았으며 다양한 이벤트들도 많았다. 곧 있을 불꽃 놀이를 기대하며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일단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으니 닭꼬치부터 먹자.”

“닭꼬치라고요?”

“왜? 닭꼬치가 입에 안 맞아?”

“그게 아니라…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닭꼬치는 분명 평민들이 주로 즐겨 먹던 음식이라 배웠는데.

리제아나는 끝까지 이 말을 내뱉지 못하고 이안을 바라보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숯불로 구워진 닭고기과 고소하게 구워진 양파가 절묘하게 어울렸다. 덧발라진 소스 때문에 짭짜름하지만, 매콤했다.

“이거….”

맛있다.

리제아나는 중독성 있는 닭꼬치 맛에 이끌려 두 입, 세 입, 계속해서 베어 물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맛있지? 다음에는 단 음식을 먹으러 가볼까?”

“아이스크림이요?”

“그거 말고. 맛있었나 보네, 기억까지 하고. 하지만 우리 텐젤에는 또 다른 유명한 디저트가 있지.”

닭꼬치를 먹자마자 이안은 크레페라 불리는 디저트 집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얇게 구운 팬케이크 위로 과일들과 과자, 초콜릿 시럽까지 뿌리는 환상적인 디저트지. 아이스크림도 올려달라고 했어.”

크레페 역시 이안의 예상대로 리제아나의 입맛을 돋우기에 너무나도 훌륭한 디저트였다.

“맛있어?”

“네. 이안은 카르페디엠 시장을 잘 아시네요.”

“하하. 중심부이기도 하니 많이 와봤지. 이상하게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리제아나의 의문에 답을 하던 이안의 얼굴에 그리운 듯한 표정이 잠깐이지만 떠올랐다.

“이안.”

“응?”

두 사람은 북적거리는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리제아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이안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마워요. 이안.”

“어?”

“매번 나를 도와주어서, 고맙다고요. 황궁에서나, 무도회에서나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이 말하고도 쑥스러웠는지 리제아나는 제대로 이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리제….”

“어, 불꽃놀이가 시작되려나 봐요.”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 리제아나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곧 형형색색의 불꽃이 찬란하고 화려하게 하늘을 물들였다.

“예쁘다….”

리제아나가 그 황홀한 광경을 보며 낮게 혼잣말했다. 이안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다만 그의 시선은 하늘이 아닌 그녀에게 향한 채였다.

⚜ ⚜ ⚜

하늘에 퍼진 불꽃들은 다양한 색들을 띠고는 이내 곧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이 더 붐비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자리 잡은 둘이었지만 이곳에도 금세 구경꾼들이 늘어났다.

-펑펑펑

연달아 세 개의 폭죽이 터지며 반짝이는 별이 걸린 밤하늘을 장식했다. 리제아나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못 박힌 듯 서서 하늘을 구경하는 리제아나를 보며 이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불꽃놀이 좋아하는구나.”

“불꽃놀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오랜만이거든요.”

“오랜만?”

“옛날에도 엄마와 손잡고 같이 이렇게 야시장에서 불꽃놀이를 봤는…데.”

리제아나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향해 꽂혀있었지만, 옛 기억을 꺼내는 그녀의 눈은 왠지 슬퍼 보였다.

“아비드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하늘에 계신 분이라 아쉬울 뿐이네요.”

“….”

다시 또 한 번의 불꽃이 터졌다.

마지막 불꽃이었는지 여태까지 쏘아 올려진 불꽃 중에 가장 밝고 화려했다.

이안은 리제아나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는 그녀를 따라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부모님에 대한 옛 기억이라….’

이안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서 바로 죽었다.

그래서 이안에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가끔씩 그 또한 어머니란 존재가 궁금했다.

그나마 기억나는 가족이라고는 고작 아버지인 선대 공작인 체스펠뿐이었지만 그 역시 어린 시절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몫까지 그를 사랑해주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흐릿해져 갔다.

공작 부부가 죽고 어영부영 떠안아 버렸던 공작의 자리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게 일에만 전념했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부모님이라….”

이안이 낮게 웃었다.

비록 황제가 그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황제는 그저 이안을 자신에게 복종할 도구로만 취급할 뿐이었다.

“…불꽃놀이가 끝이 났네요. 이걸로 수확제가 끝인가 봐요? 다들 돌아갈 채비를 하네요.”

낮게 가라앉은 그의 눈을 잠자코 보던 리제아나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밝게 말했다.

이안은 가볍게 웃었다.

“불꽃놀이만 보고 가려고? 누가 수확제에서 불꽃놀이만 보고 가? 그대가 읽던 책에서 그랬나?”

이안은 빙그레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수확제의 가장 성대한 이벤트인 불꽃놀이 말고도, 또다른 이벤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확제는 자정에 막을 내렸다. 그러니 아직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대다수 사람은 불꽃놀이가 끝나고 돌아가지만, 수확제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달랐다.

“자정까지 한다고는 아는데, 남은 두 시간 동안 무엇을 하시려고요?”

“대화? 대화하기에 아주 좋은 곳을 알고 있지.”

대화하기에 좋은 곳?

궁금해진 리제아나는 이안을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또다시 손을 내민 이안에게 못 이기겠다는 양 리제아나는 손을 마주 잡았다.

이안은 만족스럽게 그와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를 이끌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카르페디엠 시장 광장의 중심이었다. 거대한 나무가 자리한 곳 바로 옆에서 커다란 불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텐젤 형식의 불놀이야. 나무를 한데 엮어서 뾰족한 장작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불을 놓아 커다랗게 만드는 거지.”

이안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안 눈 같아요. 빨갛고 예쁜 게.”

리제아나의 말에 순간 이안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이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이안? 얼굴이 붉어졌어요.”

“불의 열기 때문에….”

이안은 손 부채질을 하며 겨우 대답을 회피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어.”

이안은 벤치로 그녀를 안내하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수확제 날에 이 땅을 축복하기 위해 여신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까.”

“신전에 제물 바치는 행사는요?”

“이미 했지.”

“언제요?”

“그대가 깨어나기 이틀 전?”

수확제의 역사서에 따르면 수확제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불꽃놀이라고 하지만 신관에서 드리는 기도 역시 장관이라 했다.

여신의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작물을 바치며 여신을 기리는 공연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놓쳐버렸네요.”

리제아나가 실망 어린 얼굴을 했다.

그녀는 수확제에 대해 꽤 기대하던 모양이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직접 보고 경험하는 일이 꽤 즐거운 눈치였다.

“실망한 표정이네. 그렇게 보고 싶었어?”

“기대… 정도는 했었으니까요.”

“뭐가 걱정이야. 내년에도 같이 수확제 보러 오면 되지. 좋아 그럼 소원은 정해졌군.”

그의 미소를 보고서 리제아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언제부터일까. 아비드 황실에서의 생활을 견디기 위해 라이핀을 제외하고 누구도 믿지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안에게만은 자꾸만 기대게 된다.

‘…또.’

그런 이안을 바라보며 리제아나는 생각에 잠겼다.

‘또다.’

벌써 몇 번째인가. 항상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튀어나오고 만다.

‘역시 이상한 사람.’

그녀는 이안의 질문을 되새기며 나직이 웃었다.

“역시, 딴 거로 빌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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