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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117)

42화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이냐? 하다못해 죽었더라도 시체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것이냐!”

오늘도 아비드 황궁의 기사단과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리제아나를 찾지 못한 채로 전전긍긍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전국 각지로 그녀의 행방을 찾아 떠난 병사들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를 찾는 일에 진척이 없을수록 점점 라이핀도 인내심이 다 되어갔다.

필로렌치아 공작 역시 부족한 양귀비 때문에 더 광각초를 생산하기 힘들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껏 광각초로 많은 자본을 끌어모았던 필로렌치아 공작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광각초 제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

라이핀이 분노에 가득 찬 주먹으로 의회실 책상을 두어 번 큰 소리로 내려쳤다.

보좌관인 일라이자는 혹시라도 라이핀의 옥체에 상처라도 날까 안절부절못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회 귀족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모두 라아핀의 눈치를 살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황급히 라이핀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부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

“폐하! 그리 책상을 치시면 다치십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공작에게 그런 핀잔을 들어야겠나?”

“그저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작의 말에 라이핀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젠장 똑같이나 생기질 말지.’

라이핀은 필로렌치아 공작을 흘겨보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짚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검정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보랏빛 눈을 가진 리제아나가 떠올랐다.

그는 힘껏 쥐었던 주먹을 풀며 다리를 고압적으로 꼬고 다시 연이어 입을 열었다.

“하…. 그레고리 상단 쪽은 어떻지?”

그들의 걱정거리인 그레고리 상단은 현재 아비드와 텐젤 두 제국 사이의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골라온 상단 인원들이 모두 과거에 텐젤에서 도망친 이력이 있었던 범죄자들이라 한층 더 빼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소식이 더ㅓ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텐젤 쪽에서 그들을 처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레고리 상단을 제외한 다른 무역단들은 잠깐의 조사 이후에 바로 아비드로 돌아왔습니다만 여전히 텐젤 측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텐젤… 텐젤… 텐젤….”

무역단 총괄인 세바스찬 백작의 보고를 들으며 라이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잡았다.

근래 들어 델리사가 찾아오지 않아 두통이 잠잠해진 줄 알았건만, 또다시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텐젤을 몇 번이나 읊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발칵 의회실의 문이 열렸다.

“누구냐!”

회의를 방해받은 귀족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일라이자가 나서서 문을 열고 들어온 이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헉…헉…. 회의를…. 방해한 점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한 시종은 숨을 다급하게 내뱉으며 땀을 닦아냈다.

“용건이라면 얼른 전해주게. 가까이 오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한데.”

이번에는 라이핀이 먼저 입을 열어 권태롭게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까딱이며 재촉했다.

“그, 그렇다면 잠시….”

갈색 머리의 시종은 모두의 시선을 받고 땀을 삐질 흘렸다. 그는 라이핀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라이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였다.

시종은 라이핀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놀란 눈을 한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폐하?”

덕분에 일라이자를 비롯한 의회실에 있던 모든 귀족의 눈이 라이핀에게로 향했다.

소식을 전한 시종도 깜짝 놀랐는지 주춤거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런… 미안하군.”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라이핀은 헛기침을 하며 옷깃을 여미고는 크라바트를 정갈히 다듬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지. 필로렌치아 공작은 잠시 나를 따라오도록.”

“예, 폐하.”

갑작스레 마무리된 회의에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지만 황제의 명령이었기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떨떠름한 귀족들의 표정을 뒤로한 채로 라이핀이 먼저 일라이자와 소식을 전하러 온 시종, 그리고 필로렌치아 공작과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폐하께서 급한 용무가 생긴 모양 같으신데… 크흠.”

“그렇다고 회의 중간에 쏙 공작만 빼고 가다니.”

“쳇…. 우리가 뭐 별수 있습니까? 폐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저희인데. 폐하도 가셨으니, 이만 회의는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귀족들은 라이핀이 나간 후 하나둘씩 연이어 그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폐하, 무슨 일이옵니까?”

영문도 모른 채로 부름을 받은 필로렌치아 공작이 라이핀의 재빠른 걸음을 황급히 따라가며 재차 물었으나 그는 답해주지 않았다.

알현실에 가까워지자마자 그는 병사들이 문을 열기도 전에 인내심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공작까지 방안으로 들어오자 병사들이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네가 그 사절단 일행 중 하나인가.”

한 청년이 있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간 라이핀은 입을 열어 얼굴을 확인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은 청년도 마찬가지였는지 청년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윽고 라이핀의 목소리를 듣고서 청년은 라이핀을 향해 고개를 황급히 조아렸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수확제에 텐젤을 갔던 사절단 중 한 명입니다.”

시종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라이핀과 필로렌치아 공작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청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굽힌 라이핀이 온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텐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보도록 해라.”

“네….”

청년은 라이핀의 어조에 한껏 긴장한 얼굴로 호흡을 갈무리한 후 입을 열었다.

그는 라이핀의 말대로 텐젤에서 겪었던 일의 모든 것에 대해서 보고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본 리제아나로 추정된 인물에 대해서까지, 모두.

⚜ ⚜ ⚜

같은 시각, 크로덴느 백작저에서는 누군가 울분 섞인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젠장. 왜! 내가 뭐가 부족해서?”

어둠이 드리운 방안에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옷, 장신구들이 하나 같이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찢어지거나 부서진 채로 놓여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될까요, 마님?”

“괜찮다. 저 아이에 대해선 모두 함구하도록 하고 그저 놔두거라.”

방 밖에서 하녀와 크로덴느 백작 부인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지만 델리사는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방 안의 물건에 화풀이했다.

시녀를 통해 백작저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단번에 라이핀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전해 들었다.

평소라면 무슨 걱정이라도 있냐며 그녀에게 달려왔을 라이핀이었는데.

“폐하, 델리사 영애께서 백작저로 잠시 내려가고 싶으시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델리사가? 알겠다. 허락한다고 해.”

“예….”

벨리타가 전해 들은 말을 곧이곧대로 알려주자 체면을 위해 삼킨 쓰라린 분노가 기어코 제 방에서 터진 것이었다.

“이럴 바에야! 아니지…. 아니야…. 내가 어떻게 얻었던 라이핀의 마음인데….”

델리사는 덜덜 떠는 손으로 네르아가 준 향수를 구석구석 뿌렸다.

사랑에게 향기가 있다면 필시 이런 향을 풍기지 않을까. 묘한 힘을 가진 향수를 델리사는 재차 자신의 몸에 뿌렸다.

“이런, 이런.”

그때 창문으로부터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가 자연스레 델리사의 귀에 꽂혔다.

“누, 누구냐! 거, 거기 누구야?!”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인기척에 의해 델리사는 기겁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향수를 놓치고 말았다.

누군가가 다가와 바람처럼 날렵한 가벼운 몸짓으로 향수를 잡았다.

“비싼 값을 치르고 거래한 향수가 아닙니까, 고객님. 막 쓰시면 곤란하죠.”

“이 목소리는….”

고양이처럼 앙칼진 목소리였다.

다 찢어져 버린 치맛자락과 함께 높이 묶인 포니테일.

그을린 피부.

“제가 사정이 있어서 이리 미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제 단골 고객님께선 이해해주시겠죠?”

빛나는 달빛을 뒤로 하고서 정체를 드러낸 네르아가 정중히 인사했다. 네르아는 델리사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너…. 말도 없이 이렇게! 게다가 이 꼴은 뭐야?”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분노 때문에 델리사의 목소리는 가시 돋친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네르아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저랑 거래를…. 그니까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를 요청드리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추가적인 거래? 그게 뭔데?”

델리사는 네르아가 흔들어 보이는 향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안타깝게도 네르아가 더 빨랐다.

미처 손이 향수에 닿기도 전에 네르아가 뒤로 물러났다.

“내 돈을 주고 샀으니까 내 것 아니야? 내놓으라고!”

“물론 드리지요. 하지만 제 거래를 먼저 들어주신 후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득이 없다면 들어주시지도 않을 테니까요. 물론 원하신다면 더 좋은 물건을 드리지요.”

“뭐?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델리사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보냈다.

실소를 내뱉은 델리사는 포기한 듯 자리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네르아에게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말이나 들어보지.”

“간단합니다.”

이에 네르아도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의자에 앉았다.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이곳에 아무도 모르게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혹시 알까요? 제가 당신에게 정말 도움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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