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거대한 창으로부터 따스한 햇볕이 알현실 안으로 들이쳤다. 하지만 알현실 안을 맴도는 흉흉한 분위기 때문에 햇볕의 따뜻한 온기도 황궁 안에서는 보잘것없었다.
황제의 기분에 따라 황궁 안의 공기가 달랐으나 오늘은 특히나 다른 날보다 한층 더 어둡고 서늘했다.
황제는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고고하게 그의 아래로 다른 표정 없이 서 있는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황제는 곧바로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지독한 것.’
이안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결국 황제가 먼저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에서 소란이 있었다지.”
“별일 아니었습니다, 폐하. 그저 소동이었을 뿐입니다.”
“그래?”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린 황제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제아나가 쓰러지고 이안이 빠르게 그녀를 부축하며 무도회를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발 빠르게 황궁에 돌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가 왜 쓰러졌는지 알지 못했다.
요새 이안은 제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만 같았다. 이안이 황제에게서 숨기려는 것이 많아지자 황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섭섭하다는 투로 이안을 질책했다.
“예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가 먼저 묻기도 전에 찾아와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말이야. 변했군, 이안.”
능글맞게 구는 황제에게 이안은 딱딱하게 답했다.
“일부러 그리 했습니다.”
“일부러 그랬다?”
황제는 이안에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라며 그를 재촉했다.
“시답지도 않은 일까지 보고하기 시작하니 폐하께서 할 일이 더 많아지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폐하께 보고하지 않아도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해결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의 말대로 황제에게 곧바로 모든 보고가 올라간다면 황제의 일은 매번 불어날 것이었다.
아랫사람이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스스로 하겠다고 하니 한 나라의 황제로서는 박수를 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복종을 바라는 그에겐 반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안을 일곱 살 때부터 길들여왔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황제가 느릿하게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문득 황제가 고개를 늘어뜨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한데…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파트너 일은 왜 그랬을까.”
“…단순한 사고였습니다.”
“사고라…? 이상하지. 파트너로 그 델리사 영애를 데려온 것도 솔직히 놀랐다네.”
이안은 황제가 그가 무도회의 일을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건.”
그가 리제아나에게 다른 인간적인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들킨다면 그다음 날 리제아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몰랐다.
황제는 제 뜻을 거스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자신의 계산 범주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망명권을 막 얻은 여인이 그저 텐젤에 잘 적응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뿐입니다.”
“뭐라?”
이안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이 한차례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가 그리도 친절한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폐하.”
황제의 비꼼에도 이안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네르아는 어딨지? 무도회가 끝나고 그녀를 불렀는데도 통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에 이안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르아는 자유로운 마법사입니다. 저 역시 무도회에서도 먼발치에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마법사들의 소식을 일일이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일순 눈썹을 모았지만 이안은 계속 시치미를 뗐다.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쓸어내리는 황제에게 이안이 물었다.
“폐하, 이야기를 마쳤다면 돌아가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더욱더 깊은 내막을 묻기 전에 서둘러 발을 빼기로 했다. 이안은 이번엔 먼저 대화의 흐름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러도록.”
“예.”
“이전에 말했던 델라스 영지에 대한 서류도 제출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한데 데벤시아 역사서 말입니다. 이전에 언급했던….”
“공작. 그 얘기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던가. 금서의 권한은 분명 황실에 있지만 그 책에 대해 나는 따로 명을 내린 기억이 없네. 피곤하니 어서 물러가도록.”
“…텐젤에 여신의 가호가 무한하길 바랍니다.”
이안이 예를 갖춰 그에게 절한 후 몸을 돌리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알현실을 벗어날 때까지 황제의 시선이 이안에게 머물렀다. 황제의 시선을 알아챈 이안은 알현실을 빠르게 벗어났다.
황제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이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번 꾸었던 꿈이 잊히지 않고 자꾸 떠오르기 때문일까.
역사서 이야기만 나오면 자꾸 말을 돌리는 황제 때문인가.
데벤시아 공작가와 황가의 연결고리. 데벤시아 가문과 황가 사이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그것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 ⚜ ⚜
황궁에서 돌아온 이안은 익숙하게 리제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살짝 열자 리제아나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햇볕을 벗 삼아 그녀는 책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햇살이 리제아나를 비추자 긴 그녀의 속눈썹과 하얀 슬립과 대조되는 짙은 머리카락, 영롱한 자수정 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리제아나.”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왼쪽 발을 오른쪽 발 위에 짓눌렀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제 옷차림을 바로 한 그가 천천히 문을 열며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안?”
리제아나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뭐 보고 있었어?”
리제아나와 금세 눈이 마주치자 이안이 눈꼬리를 접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확제의 기원에 대한 역사서가 있어서요. 한번 보고 있었어요.”
리제아나가 건넨 책의 표지를 바라보니 그 책은 예전에 이안이 읽기 귀찮다며 하르힌에게 던져버린 책 중 하나였다.
“재밌어? 그거 재미없던데.”
“읽어봤어요?”
“겉모습만 보아도 딱 그래. 그대는 수확제에 대해서 보기보다 관심이 많나 보네.”
이안이 말을 건네며 어느새 리제아나가 있는 침대 옆까지 다가갔다. 그는 침대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고는 책을 받아들었다.
“흐음…. 재미있기보다는 지식을 위해서죠.”
“열정적이네.”
“딱히 할 게 없는걸요?”
문득 든 생각에 이안은 제 입술을 긴 검지로 두어 번 톡톡 건드렸다.
“그렇게 책만 읽는 것보다, 직접 가서 보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아?”
“네?”
“ 몸도 괜찮으면 오늘 밤, 나랑 야시장 구경 가는 건 어때. 수확제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까 볼 것도 많을 테고.”
“야시장이요? 정말요?”
이안의 말에 화색이 돈 리제아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책 그만 읽고 쉬도록 해.”
이안이 심술궂게 그녀의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아니면 나한테 집중하던지.”
“?”
“푸흡. 장난이야.”
이안이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그의 농담에 리제아나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안은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이상, 이안은 주저하지 않고 직진하기로 했다.
‘뭐 아직은 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리제아나에게 제 마음을 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어 모든 것이 서툴기만 했다.
하지만 이안은 리제아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으면 했다.
⚜ ⚜ ⚜
“흐아아암.”
이안이 떠나고 어느샌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리제아나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하늘에 주황빛 노을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안과의 약속을 떠올리고 리제아나는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 침대에서 먼저 일어났다.
“세상에, 나 지금까지 슬립을 입고 있었다는 거야?”
거울에 제 몸을 비추어보니 새하얀 슬립을 입은 그녀가 있었다.
리제아나는 옷장을 열어 다급하게 옷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황급히 야시장에 입고 갈 옷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집히는 옷을 입고 갈 텐데, 오늘은 왜인지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이건 색이 마음에 안 들고…. 저건 너무 파인 것 같고…. 저건 그냥 아냐. 어라 이건?”
그때 옷장 한편에 놓인 연분홍빛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빛을 받고 붉게 반짝이는 단정한 레이스가 인상적인 드레스였다.
‘왠지…. 이안의 눈동자 색을 닮았네.’
다시 고민하기도 전에 손은 이미 드레스에게 향하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 거울 앞에 섰다. 레이스가 붉게 반짝이는 드레스에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을 한 영애가 비단결과 같은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문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네, 들어오세요.”
“준비됐…어?”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드레스를 입고선 그녀를 보고 멈칫했다.
‘이상한가….’
역시 과한 색은 안 어울렸던 모양이었다. 괜스레 리제아나는 제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잘 어울리네. 색 있는 드레스도 자주 입어.”
이안은 블랙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넓은 소매에 목이 시원하게 파인 옷이었다.
번듯한 제복만 입던 그가 이런 옷을 입으니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능글맞은 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
“걸어서 가는 건가요?”
“걸어서? 당연히 아니지.”
“설마….”
손을 내미는 이안의 행동에 리제아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손을 맞잡아야만 한다면 그가 앞으로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맞는데.”
“하지만 마차를 탄다면….”
“마차로는 오래 걸리니까, 더 일찍 도착하려면 어쩔 수 없는걸. 수확제의 밤은 짧단 말이야.”
아무리 호소해보아도 이번만큼은 이안 역시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리제아나는 한숨을 쉬며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번쩍 빛을 내며 두 사람은 발아래 떠오른 마법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살려달라니까…. 정말….’
그녀는 마음 속으로 조용히 그를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