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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17)

40화

불안은 심적으로 지친 상태일 때, 그때를 노려 침투해 그녀의 정신을 어지럽히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필로렌치아 공작저에서 있을 때나 황궁에서 있었을 때나 리제아나는 매번 악몽을 꾸었었다.

“어머니….”

리제아나는 제 앞에 미동도 없이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생기 가득 넘치는 웃음으로 보는 사람 역시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던 어머니였다.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분명 꿈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숨이 막히고 제대로 호흡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입 밖으로 겨우 나온 말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끄집어내기 턱없이 부족했다.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연속해서 필로렌치아 공작은 울음이 섞인 비탄한 목소리로 리제아나를 찌를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몸은 여전히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던 소녀는 그저 아버지의 말을 믿고서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리제아나는 이를 막을 힘조차 없었다.

‘깨고 싶어…. 이런 꿈.’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중 누구도 어린아이일 뿐인 그녀를 위로하려 들거나 가여워하는 이는 없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손이 높게 올라갔다.

어린 리제아나에게 아버지는 거인과 같이 느껴졌다.

꽃처럼 아름다운 공작가와 그 안에 있는 나비 같은 사람들.

하지만 장미처럼 공작가의 실상은 아름다운 겉모양과 달랐다.

장미는 화려하고 겉치레가 아름다운 매혹적인 붉은 색을 가지고 있는 꽃잎과는 정반대로 뾰족한 가시로 무장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내 딸이니까 이렇게 교육해주는 거란다. 공작부인이 없다는 것은 우리 가문에게 크나큰 단점이다. 그러니 공격당하기 전에 공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새겨듣도록.”

그는 리제아나의 실수에 인색했다.

리제아나가 실수를 할 때면 그는 잘못이라 칭하며 냉정하게 그녀의 복부나 허벅지 뒤쪽을 회초리로 때리곤 했다.

옷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필로렌치아 가문의 하나뿐인 귀한 딸로 보였을 테지만.

황태자비가 되고서야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겨우내 벗어났다. 그 이후로 라이핀의 눈에 들기 위해 바삐 움직이느라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조금쯤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두려웠다.

아버지의 손이 올라간 것만으로도 꿈이었지만 몸이 벌벌 떨렸다. 가혹한 그의 처벌에 대한 기억이 거대한 빗줄기처럼 그녀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눈을 감을 감은 리제아나에게 귓가에서 익숙한 음성이 울렸다.

“정신 차려 리제!”

다급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는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그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외침이 반복될수록 리제아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에 천천히 금이 가더니 이내 갈라져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는…?’

“리제아나!”

낮고 굵은 목소리였으나 지나치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였지…?’

흐릿하게 목소리의 주인이 생각나려던 찰나, 또 한 번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던 바닥이 세차게 흔들리며 훅 꺼졌다.

왜인지 저만치에서부터 빛이 보였다.

천천히 빛을 향해 걷자 그 끝에서 리제아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고귀하고 순결해 보이는 새하얀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그녀를 향해 붉은 적안의 눈을 휘며 선 남자가 있었다.

“설마.”

정체를 깨달은 순간 통 떠올릴 수 없었던 목소리의 주인을 부를 수 있었다.

“설마…. 이안…?”

리제아나는 눈을 떴다.

⚜ ⚜ ⚜

“리제!”

빌어먹을 꿈속에서 드디어 탈출한 모양이었다. 강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리제아나의 눈을 찔러왔다. 그녀는 짧게 눈을 찡그렸다.

“깨어났구나. 정말…. 다행이다. 몸은 어때? 괜찮아?”

일어나는 리제아나를 본 이안은 그녀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사포로 질문을 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네르아가 준 차를 마시고…. 윽.”

오래 누워있던 모양인지 몸을 일으키자 그녀를 누르는 현기증에 리제아나는 눈을 찡그렸다.

“머리 아파? 어디가 어떻게? 잘 때 신음을 많이 흘리던데 계속 안 좋은 거야?”

“진정하세요, 저하. 누구라도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을 때 그리 다급하게 질문 세례를 한다면 놀라서 다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안 옆에는 하르힌도 앉아있었다. 그는 책을 보던 중이었는지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 그런가…. 미안 리제. 너무 당황해서.”

하르힌의 꾸지람에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그맣게 뇌까렸다.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목에 힘을 주자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리제아나가 목을 한 손으로 누르며 가다듬자 이안이 하르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르힌. 물 좀 떠가지고 와.”

“예? 제가요?”

“그럼, 내가 갈까?”

“아,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럼.”

하르힌은 귀찮았는지 투덜거렸지만 이내 이안의 눈빛을 한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책을 옆에 있던 탁자에 올려놓고는 방을 재빠르게 나갔다.

방에는 이제 이안과 리제아나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고 잠깐이었지만 약간의 적막이 둘을 휘감았다.

“걱정했어.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을까 봐.”

그는 나른하지만 침착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걱정 고마워요. 멀쩡하게 떴으니 이제 걱정 마요.”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서 처음 본 이가 그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제아나는 문득 꿈에서 보았던 이안을 떠올렸다.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일단 몸은? 어디 아픈 데 없어?”

“음… 그런 것 같아요. 아픈 데도 없고, 딱히 불편한 데도 없어요.”

리제아나는 손을 오므렸다가 펴보고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보며 뻐근한 몸을 풀어보았다. 딱히 콕 집어 아프다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후… 다행이네….”

이에 이안이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

광각초의 독성에 헐떡이던 리제아나를 살린 건, 이전에 그녀가 시장에서 벌어진 소동에서 발견해낸 ‘라이지나’였다.

이안은 리제아나가 시장에서 마수에게 내던졌던 꽃을 기억해냈다.

이전에 리제아나의 방에 우연히 들렸다 그녀의 책상에 펼쳐진 약초 지식 백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광각초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조사를 하고 있던 것을 이안은 또한 알고 있었다.

리제아나가 라이지나라는 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쓰여 있는 곳에 꽃잎들을 끼워두었는데 덕분에 이안도 쉽게 라이지나의 효능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곧바로 망설이지 않고 꽃으로 물약을 만들어 리제아나에게 먹였던 것이었다.

언제나 옳고 확실한 선택을 강행했던 이안으로서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그때의 그는 리제아나를 깨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안의 얼굴에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리제아나가 입을 열 차례였다.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그녀는 헛기침을 반복했다. 그리고 천천히 운을 떼었다.

“아까 오래 잠들어 있다고 했죠? 제가 얼마나 잠들었나요?”

때마침 하르힌이 물을 가지고 왔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물잔을 리제아나의 손에 살포시 쥐여준 이안이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리제, 그대는… 수확제 첫날 이후로 나흘 동안 잠들어 있었어. 미동도 없이 정말 잠만 잤지.”

“나흘…이요?”

나흘이라는 시간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흘이라니. 그리 오래 잠들어 있었을 줄이야. 부서진 찻잔과 리제아나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조이던 그 날의 아픔을 떠올린 그녀는 눈썹을 모았다.

분명 그 찻잔에 네르아가 어떤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리제아나의 의문을 알기라도 하듯 이안이 답했다.

“그대가 먹었던 차 안에 약간의 광각초가 섞여 있었다. 다행히 소량이라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안이 숨을 들이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하자 급격히 낯빛이 어두워진 하르힌은 탁자에 올려두었던 책을 도로 집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나간 그를 흘깃 보던 이안은 입술을 몇 번 짓씹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전에 당신이 발견한 라이지나라는 약초를 쓴 후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어. 그런데… 신음을 흘리며 식은땀을 수도 없이 흘리더군.”

“제가… 그랬군요.”

아마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리제아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꿈의 내용에 서둘러 고개를 가로젓고 그에게 집중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당차게 말해놓고서 면목이 없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도… 이렇게 당할 줄은 예상 못 했으니까.”

리제아나의 위로에 이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분명 위로해야 하는 것은 자신인데, 오히려 위로받고 있다니.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정말로.”

이안이 짐짓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에 리제아나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쉬어.”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던 그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얼굴은 돌아보지 않은 채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비드에서의 꿈인가?”

“…네.”

“악몽…이었겠지?”

“….”

리제아나는 더 답하지 않았고 이안 또한 그녀에게 더 묻지 않았다.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은 이내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 ⚜ ⚜

아비드와 텐젤의 국경선.

여러 병사와 마법사가 지키는 국경선은 경비가 삼엄했다. 그 때문에 아무리 숙련 받은 이라도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허가받지 못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이가 함부로 국경을 건너다 적발될 시 이를 명분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아직도 멀었나? 젠장.”

하지만 강화된 경비와는 별개로, 국경선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토끼굴이 있었다.

오직 네르아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통로였다.

그녀는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제 몸을 간신히 이끌었다. 해가 지고 어두운 틈을 타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굴로 이동했다.

네르아는 이제 이 나라에서 자신에게 더 기회가 없는 것을 알았다.

마법을 부릴 수도 없으니 약물도 만들지 못할 테고 아무 능력 없는 저를 그 약삭빠른 황제가 거두어줄 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력을 봉인 당하고 마탑에서 쫓겨났으니 네르아는 더 갈 곳이 없었다.

네르아는 이를 갈았다.

반드시 그 여자에게 그대로 복수하리라.

네르아는 텐젤을 떠나 아비드 제국으로 갈 참이었다.

다만 몸 의탁할 곳이 필요한데….

문득 독기 가득 찬 눈으로 그녀가 만든 향수를 건네받던 여자가 떠올랐다.

네르아 자신에 대해 정보가 별로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어 신뢰성이 두터운 인물.

‘고객님이시지.’

네르아는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깨닫고는 다양한 약초나 독과 관련된 약품들을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고파는 거래를 자주 해왔다.

많은 사람이 애용해왔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비쌌던 ‘사랑의 묘약, 아모리아’를 매달마다 주문했던 ‘고객님’이었다.

어느새 토끼굴에 도착한 네르아가 굴 위에 쌓인 마른 낙엽을 거두어낼 때였다.

“거기 누구야!”

“…”

“어이, 왜 그래 거기?”

“분명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정찰을 나온 병사들인 모양이었다. 두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선택지는 이제 얼마 없었다.

마력은 사라졌지만 신체적 능력은 남아 있으니 어렵진 않으나 뒤처리가 조금 위험했다.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식은땀이 등을 뒤덮을 정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섯 걸음.

수풀 속에서 네르아는 천천히 호신용으로 허벅지에 둘러맸던 나이프에 손을 가져갔다.

네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두 걸음.

어두운 형체는 조금 더 가까이 네르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르아는 칼을 빼내어 몸을 일으킨 후 여차하면 병사에게 달려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재차 말소리가 들렸다.

“멍청아 어딜 가는 거야? 거긴 수풀이 하도 빽빽해서 사람이 들어갈 자리도 없어.”

“하지만.”

“그럼 넌 계속 찾으시던지. 바람에 잎들이 스치는 소리라니까. 하여간 정말.”

“…아 알았어.”

동료가 비아냥거리자 병사는 결국 포기하고 진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 사람의 것일 게 분명한 숨소리였는데.

병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착각이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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