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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117)

39화

이안이 천천히 한 발자국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예전부터 그랬었지, 넌.”

“….”

“내가 못 본 척을 한 것도 뻔히 알았을 텐데. 이제 감히 나의 것을 건드려? 내가 언제 너를 그렇게 가르쳤지 네르아?”

네르아의 어린 시절을 보아온 이안은 누구보다 그녀의 집요한 성정을 알고 있었다. 그와 비슷하다는 것도.

그녀는 소유욕이 강했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었다. 그럴 수 없다면 거칠게 파괴할지언정, 포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이안의 곁에 머무르며 이안과 연결점을 만들어보려는 여성들을 모두 차단했다.

굳이 직접 자신이 쳐내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더 편해 이안은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이제 리제아나에게 위협이 된다면, 이안은 묵인하던 사실을 더는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저하께서도 한 번도 그만하라 하신 적… 없습니다.”

네르아가 입술이 피날 정도로 세게 깨물며 나무를 잡고는 가까스로 떨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났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니, 네가 이를 모를 리 없지. 내가 리제아나를 다른 여자들과 달리 생각한다는 것을.”

이안은 네르아의 감정을 알고 있었으나 그리 깊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우한 네르아를 마탑으로 데려오고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것은 이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할 만큼 어중간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마탑 소속 인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전 처음 저하를 보았을 때부터 사모해왔습니다.”

이안의 말에 섣불리 답을 하지 않던 네르아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웃음을 흘리고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도 아셨지만 묵인하신 거, 아닙니까.”

“하…. 네르아. 사람은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구제해준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 수밖에 없어.”

이안은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느낀 감정은 착각이라 말해두고 싶군. 그냥 동경일 뿐이다. 어린 시절에 느낀 동경을 사랑이라 착각한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감정입니다. 몇 년을 품어왔던 감정에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거야말로 착각이십니다.”

네르아가 이안의 말에 격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서 리제아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거슬려서요.”

“순전히 너의 감정에 휩쓸려버린 피해자인데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네.”

고압적으로 팔짱을 낀 채로 달빛을 배경 삼아 네르아를 고고히 내려다보는 이안의 차디찬 얼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온전히 제 뜻대로 죽어주지 않아서.”

“네르아….”

그동안 함께 해 온 시간을 봐서라도, 네르아가 뜻을 굽히고 회개한다면 네르아를 용서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비릿하게 웃어 보이는 네르아는 그녀가 벌인 일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저하야말로 정신 차리시란 말입니다! 누구보다 저하 옆에서 보필하고 아꼈던 접니다. 한데 어째서 저 타국의 여자 따위를 왜…!”

제 분을 이기지 못한 네르아는 결국 두 볼을 눈물로 적시며 이안을 향해 바락 쏟아냈다.

“어째서 넌 너밖에 모르는 것이냐. 너는 제멋대로 너의 감정만 쏘아붙이며 다른 사람까지 해쳤어.”

“…!”

“그동안에 했던 일을 묵인했다. 언젠간 나름대로 그게 고쳐질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 놔뒀어. 하지만 넌….”

“무, 무엇을 말입니까.”

“이제 더는 봐줄 수 없다. 네르아 너에게서….”

이안이 적안을 번뜩이며 그의 아래로 몸을 떠는 네르아를 내려다보았다.

“너에게서… 마력을 봉인하겠다.”

“!”

이안의 말에 네르아가 숨을 삼켰다.

마력을 봉인해…?

네르아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눈을 부릅떴다.

“저… 저하….”

이안이 아무리 다그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 주장을 펼쳤던 네르아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력 봉인이라니. 마법사에겐 최악의 벌이었다.

마탑의 마탑주는 많은 마력을 지녔다. 마탑 일원들은 모두 마탑주와 종속 계약을 맺었다. 가진 마력을 마탑주에게 모두 넘겨 복종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럼 본래의 그릇보다 더 많은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고, 마법사로서의 기량 또한 순식간에 커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봉인’이란 마탑주가 더 이상 마력을 넘겨주지 않는다는 걸 뜻했다.

이는 그동안 마법사로서 살아왔던 모든 혜택과 더불어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너의… 약초 융합 마력은 너무나도 위험해. 너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안은 한쪽 손을 들어 자신의 온 마력을 집중시켰다. 반면 네르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저하…! 저하가 어떻게 저에게…!”

하지만 여전히 네르아는 입 밖으로 용서를 구하거나 잘못했다는 말 따위 뱉지 않았다.

“네가 자초한 일이지 않으냐.”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안은 마력을 집중시킨 손을 단숨에 뻗어 네르아의 머리에 가져갔다.

숲속에는 절망 어린 비명만이 크게 울려 퍼졌다.

얼굴을 덮은 이안의 커다란 손 사이로 네르아는 붉게 빛나는 달을 보았다.

달의 주인은 네르아에게 마지막 자비조차 베풀지 않았다.

⚜ ⚜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여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무엇인가가 모자란 느낌이었다.

“우리 리제, 일어났니?”

누군가 고요한 적막을 깼다.

그녀의 어머니인 사브릴 데 필로렌치아였다.

다정한 웃음소리와 함께 빨간 머리를 질끈 묶고 찾아온 그녀의 어머니는 백조 같은 걸음걸이로 어린 리제아나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우리 예쁜 딸. 예쁜 내 딸, 리제아나.”

그제야 현재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오랜만에 본 어머니의 얼굴에 리제아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만 봤다.

“일어날까, 리제아나? 차는 어떠니?”

리제아나는 손을 들어 어머니가 내민 손을 맞잡고 그녀를 따라 정원의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필로렌치아 공작은 언제나 그랬듯 일이 바쁜지 티타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히비스커스 차를 준비해 보았단다.”

“우와! 정말요?”

말이 제멋대로 나갔다. 어린 기억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리제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마님, 차를 내왔습니다.”

“…너는.”

리제아나를 보며 미소를 내리지 않던 사브릴이 차를 가져온 하녀를 보고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인가 결심을 한 듯이 잘게 떨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리제아나는 모든 상황이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애초에… 차를 주전자에 내오지 않고 찻잔만을 내오다니?’

하지만 리제아나의 생각과 별개로 찻잔은 각각 사브릴과 리제아나 앞에 놓였다. 하녀는 어색하게 주전자를 가지고 오겠다 하며 자리를 급히 떴다.

“우리 리제.”

사브릴이 찻잔을 손으로 감싸며 그 온기를 느끼듯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 말씀하세요.”

“너는 아직 어리니까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 그래도…. 그래도 나중에 내 말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

“사람에게 너무 쉽게 빠져들어 온 마음을 내주진 말렴. 나는 너를 얻어 후회는 없지만, 넌 다른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사브릴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의 눈이 일렁였다.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머니. 그게 무슨-”

“지금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네 탓이 아니다. 모든 게 한때 충동적이었던, 내 선택에 대한 결과니까.”

“….”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사브릴은 고개를 떨구어 찻잔을 바라보았다. 리제아나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찻잔을 응시했다.

사브릴의 찻잔은 그녀와 다르게 초록 잎이 둥둥 떠 있었지만 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사브릴이 잔을 들어 올렸다.

“시간이 다 되었구나. 오시는 걸 보니.”

리제아나는 누군지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있지. 리제, 내 딸.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란다. 매번 그릇된 선택을 하던 나에게 넌 최고의 선택이었단다. 내 잘못은 너로 인해 용서받았을 거야. 사랑한단다, 나의 리제. 언제나, 영원히, 어디서든 함께 할게.”

말을 마친 사브릴은 단숨에 차를 들이마셨고 정확히 5초 후, 피를 토하며 풀썩 의자에 힘없이 쓰러졌다. 문득 뒤로 필로렌치아 공작이 나타났다.

“사브릴! 사브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아버지…. 이게 도대체… 어머니….?”

놀라 소리치는 아버지의 옆에서 리제아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닥친 상황을 직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사브릴의 찻잔 위에 떠도는 찻잎들을 보았느냐.”

“하지만 저도 그 찻잎이 무엇인지….”

“왜 말리지 않았어! 이상했다면 바로 말해서 멈추었어야지. 오 사브릴…. 이게 대체….”

리제아나를 탓하며 절규하는 공작과 리제아나 사이로 사용인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을 둘러쌌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리제아나를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볼 뿐 아무 대처도 하지 않았다.

입에 풀이라도 발라진 듯이 변명을 하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나오는 말이라곤 자의와 상관없는 ‘죄송합니다.’뿐이었다.

“죄,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어머니가… 흑….”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 사이로 분노에 눈을 번뜩이는 공작의 한쪽 손이 높이 그녀를 향해 올라간 것을 깨달았다.

리제아나가 눈을 꾹 감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던 순간이었다.

“리제아나, 정신 차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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