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저 여자 혹시 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이안에 대해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지?’
결국, 리제아나는 네르아가 있을 테라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네르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곤란한 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이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리제아나는 거칠게 테라스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볼을 스쳤다. 테라스에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네르아가 간단한 티 세트를 앞에 두고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앉으세요.”
네르아가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리제아나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붙들고 진실을 토해내게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그녀의 말대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석연치 않은 점이라뇨? 그리고 이안에 대해 저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죠?”
“캐모마일 차예요. 향이 굉장히 좋아요. 자, 마셔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좋잖아요.”
네르아가 천천히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곤 자신의 찻잔에 한 번 그리고 리제아나의 찻잔에 한 번 찻물을 따랐다. 그리고 천천히 찻물을 음미했다.
“따뜻한 차로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신다면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무엇을 알고 있죠? 그것부터 이야기하세요.”
“전, 이성을 잃은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기 싫은걸요? 먼저 노기를 가라앉히세요.”
그녀는 리제아나가 차를 마시지 않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제아나는 네르아의 찻잔과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조금 전, 네르아가 자신의 잔에 찻물을 먼저 따르는 것을 떠올렸다.
리제아나는 망설임 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차에서 깊고 진한 찻잎의 씁쓸한 맛이 났다.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갔다.
그때 희미하게 네르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음험해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리제아나는 가슴을 붙잡았다.
쨍그랑
찻잔이 가볍게 리제아나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찻잔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안에 담긴 내용물과 함께 찻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정교하게 새겨진 잔의 무늬들은 조각이 나며 깨졌고 찻잔의 액체는 그대로 리제아나의 손에 튀었다.
“꺄아아악!”
차 시중을 위해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던 시종이 비명을 질렀다.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테라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액체가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순간 무엇인가가 억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웁.”
숨쉬기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졌다.
리제아나는 황급하게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절박하게 숨을 한차례 내쉬었다.
‘차… 차가….’
하지만 언제?
네르아는 자신의 앞에서 차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찻주전자의 차를 따라 마시지 않았던가.
리제아나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간신히 고개에 힘을 주어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네르아는 당황한 듯 빠르게 주문을 외우는 모습이 보였다. 네르아가 사라지고 리제아나는 바닥을 기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군중을 뚫고 이안이 나타났다.
“리제아나!”
단숨에 리제아나의 손목을 붙잡은 이안이 그녀의 이름을 다급하게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마셨어?”
“이…안?”
“마셨냐고!”
“이안….”
마셨다고,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온몸이 축 늘어질 뿐이었다.
이안만을 담은 채로 리제아나의 시야가 점멸했다.
⚜ ⚜ ⚜
“리제아나. 정신 차려봐. 리제아나!”
이안은 주위를 살폈다.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황제의 시선까지는 아직 끌지 못했다.’
이안은 유리 조각과 함께 쏟아진 찻물의 잔해로 다가가 손가락에 찻물을 소량 찍어 맛을 봤다.
마력의 향이 단번에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법으로 만든 어떤 약물임이 틀림없었다.
이안은 다시 한번 맛을 보았다. 이번엔 조금 전엔 느낄 수 없던 익숙한 향이 났다. 광각초였다.
이안은 다급하게 리제아나를 들어 올렸다.
“정신 차려. 이대로 혼절하면 위험하니까, 응?”
당연히 해독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안은 초조하게 리제아나의 상태를 살폈다.
손을 경동맥에 가져갔다. 다행히도 그녀의 맥박은 불완전하지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저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하르힌이 뒤따라와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주변 사람들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안 공작 저하의 파트너가 아니시던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안은 곧바로 리제아나를 들어 올렸다.
“이안 님. 마탑으로….”
분위기를 눈치챈 하르힌이 속삭였고 이안도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차마 뱉지 못한 욕지기가 입안에 맴돌았다. 초조함에 속이 메스꺼웠고 입안에서는 비릿한 신맛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리제아나가 우선이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여러분. 부디 남은 시간이라도 재밌게 즐겨주시길.”
담백하게 퇴장 인사를 마친 이안은 사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심호흡하며 진정시켰다. 의심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정갈한 걸음걸이로 나름 단정히 걸어나갔다.
어느 순간이라도 자세를 흐트러져서는 안 되었다.
사냥개들에게 그야말로 사냥감을 물어뜯으라 던져주는 격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절대 그들에게 동요를 들키지 않아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설마…?”
“맥박과 호흡 모두 괜찮아 보이지만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것을 보아 조사해볼 필요가 있어. 일단 마탑으로 돌아가. 황궁에서 얼추 벗어나면 곧바로 이동 마법을 쓴다.”
그가 마탑주이며 마법사라는 사실은 황제를 제외하고 누구도 알아선 안 되니 말이다.
광각초로 인한 독살 시도니 의료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마탑으로 데려가 일단 할 수 있는 치료 마법을 모두 다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꼭 저하께서는 함께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만. 돌아가 있으라뇨? 같이 안 가십니까?”
이안이 건넨 문장에서 미세한 의문점을 찾아낸 하르힌은 놓치지 않고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이 낮게 목소리를 긁으며 씹어뱉듯 말했다.
“할 일이 있어.”
“그러고 보니 네르아는 어쩌죠? 아까 손님 곁에도 없던데요.”
“네르아…. 망할….”
메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이안이 뇌까렸다.
“네르아는 내가 찾는다. 일단 너라도 치료 마법과 함께 안정 마법을 걸어주고 있도록 해.”
미처 하르힌이 대답하기도 전에 지체되는 시간이 아까웠던 이안은 서둘러 그에게 이동 마법을 쓸 것을 명령했다.
마법 주문을 외우는 하르힌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리제아나가 스쳐 지나갔다.
이안의 적안이 분노로 번뜩였다.
⚜ ⚜ ⚜
“헉…. 헉….”
한편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황궁의 뒷문으로 빠져나온 네르아는 아비드의 경계선과 이어져 있는 뒤편의 숲을 향해 열렬하게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어코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다만 이안이 그렇게 빨리 돌아올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행동했어야 했다.
그녀가 마신 차의 액체는 극히 소량이었다. 그 정도로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 정신을 찾지 못하길 희망을 걸어봐야지.’
어제부터 약물을 만드느라 마력을 소진해버렸다. 숨이 벅차올랐다. 두 다리가 드레스 자락 때문에 거동이 불편했다. 이제는 다리가 후들거려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나무를 잡고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자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죽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이제는…. 저하를 볼 수도 없잖아….”
리제아나가, 그 손님이 차라리 그 자리에서 바로 즉사했다면…. 네르아가 저지른 일은 누구도 알 수 없을 터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차를 마셨다면.’
그럼에도 여전히 리제아나를 독살하려 했던 계획을 후회하지 않았다.
수년 동안 이안의 주위를 맴돌던 그녀보다 먼저 이안을 가로챈 그 손님이 정말이지 미웠으니까.
“그러게 왜 한 번을 돌아봐 주지 않으셨습니까. 저하.”
네르아는 원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내 숲의 진득한 어둠 속에서 비릿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당신이 한 번이라도 고개를 돌려보았다면! 그랬다면…!”
묵혀 두었던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자 메아리처럼 그녀의 외침이 숲을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 필요 없어. 부질없어. 망해버렸어….”
더는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았던 네르아는 무릎을 오므려 고개를 푹 숙였다. 문득 누군가가 네르아 앞에 섰다.
“기어코 저질렀구나, 네르아.”
절망스럽게 몸을 말던 네르아가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을 거라 예상했던 도주로가 들통나 나버린 것이었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는 그녀가 익히 들어왔던 목소리였다.
“설…마….”
네르아의 심장이 요동쳤다.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자 두려움이 솟았다.
“내가 이래서 널 주시하고 있었지.”
달빛이 비치자 네르아는 그녀를 찾아온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일찍이 경고를 하였던 것 같은데, 끝까지 듣지 않더군. 네르아, 네가 그리 멍청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실망시킬 줄이야.”
“….”
“예전에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건드리지 않는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대담해졌을까?”
새빨간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네르아를 가소롭게 쳐다보고 있는 이안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