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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37/117)

37화

그의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선 퍼셀이 그제야 그가 다름 아닌 데벤시아 공작이란 것을 떠올리곤 허리를 굽혔다.

“공작님의 파트너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이내 자신의 주제를 알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를 보곤 이안은 만족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흥미롭게 이쪽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리제아나가 작게 그에게 속삭였다.

“제가 헛짚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까 퍼셀 영식께서 제게 춤 신청을 하셨을 때 눈치채고 막아주신 건가요?”

“…들켰나?”

“거절할 참이었는데 발도 참 빠르시네요.”

리제아나가 작게 툴툴거리며 턱짓으로 이쪽을 빤히 보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고맙다는 표현으로 알아들을게.”

“네. 마음대로 들으세요.”

“뭐?”

“당신에게 자꾸 받기만 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이젠 번거롭네요, 이안.”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샹들리에의 은은한 조명이, 리제아나를 드리웠고 이안은 그 뒤로 다시금 제멋대로 뛰는 심장 때문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여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귀족들에 리제아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뭔데, 이거?”

이안은 황급히 커다란 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애써 피어오르는 말도 안 되는 감정에 마른 세수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터였는데.

제 감정이 누군가에게 진심이 될 리가, 없는데.

⚜ ⚜ ⚜

이안은 멀찍이 서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이야기를 나누는 리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해 보였다.

아비드에서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안은 그녀가 텐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도 쉽게 그곳에 적응하리란 걸 알았다.

자신이 결심한 것에 흔들림 없이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

어느새 그의 곁으로 하르힌이 다가왔다. 접시에 한가득 음식을 담아온 그는 연신 오물거리며 그의 옆에 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공님. 별일… 쩝쩝… 없으셨죠?”

“….”

“…대공님?”

어디론가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선 이안에 하르힌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리제아나가 있었다.

“자꾸 특정한 한 사람이 시선 끝에 밟힌다면 그건 무슨 감정이지?”

“예?”

“그러니까….”

진심을 내뱉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일평생 한 번도 누군가와 고민을 공유해본 적도 없었던 이안은 평소와 달리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튀어 나가버린 진심은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더 부추길 뿐이었다.

이안은 한 번에 샴페인을 털어 넣고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하르힌을 슬쩍 보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용할 생각뿐이었는데…. 그런데 자꾸만 눈에 밟히고 생각나. 혹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조금 특별한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싶어서.”

“흐음?”

생각보다 덤덤하게 내뱉는 이안의 말을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듣던 하르힌은 그 대상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하께서는 정말 완벽한 인간이시지만 매번 이런 쪽에서는 숙맥 같으세요.”

“욕이냐?”

“답답하다는 거지, 욕은 아닙니다.”

사실 처음 이안이 리제아나를 마탑에 데리고 올 때부터 하르힌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리제아나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저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나? 흥미롭지. 볼 때마다 질리지 않는걸.”

“그뿐이에요? 아무런 감정도 안 느껴지시는 거 확실하신 거냐고요.”

이미 이안이 말을 꺼낸 시점 이후부터 하르힌의 확신은 거의 굳어지고 있었다.

사랑.

물론 스스로는 부정하고 있지만 아직 서툴러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야 한 번도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 없는 그 이안 공작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복잡하다는 거야. 그냥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

“흠….”

이런 사랑에 무지한 인간을 깨우기 위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연애의 감정, 특히 사랑이란 것은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섬세하고 다치기도 쉬운 연약한 감정이다. 또 사람을 움직이는 강인한 감정이다. 그 복잡미묘한 감정. 마법 보다 더 마법 같은 감정.

마침 하르힌의 머릿속에 이안에게서 감정을 끌어낼 한 가지 방법이 스쳐 갔다.

“그러고 보니 퍼셀 영식의 무도회 춤 제안을 손님이 아니라 저하께서 직접 거절하셨다고 하던데.”

“당연하지. 파트너로서 곤란한 일을 겪게 하면 안 되잖아?”

“솔직해져 보시죠?”

하르힌이 능글맞은 얼굴로 팔꿈치로 툭툭 이안의 팔을 찔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이안이 미간을 구기자 하르힌은 얼굴 팔을 내려 그를 언제 찔렀냐는 듯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뭘 말이지?”

“조금 전 저택에서 그분을 치장해준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보고 계셨던 거 아세요?”

“내가?”

하르힌의 직언에 이안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네. 그러셨습니다. 왜 그분을 그렇게 보셨어요? 한번 그때의 손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흠… 그때라면,”

밤하늘같이 짙은 머릿결,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 거기다 웃을 때면 접히는 보조개가 그의 눈엔 예쁘게만 보였다. 함께 춤을 출 땐 맞잡았던 손에서 그녀의 온기가 은은히 느껴졌다.

“아름…다웠지.”

심장이 또다시 제멋대로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도, 황궁에서도, 무도회에서도, 언제나 리제아나와 함께 있을 때 느꼈던 즐거웠던 기분이 떠올랐다. 동시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그 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군….”

제 감정을 다 안다고 자부하다니. 그걸 스스로 입 밖으로 내뱉다니.

이안은 저 스스로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헤프게 웃었다.

“깨달으셨습니까?”

그들 사이에 묘하게 흐르던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 하르힌이 대답을 종용하듯 은근슬쩍 이안에게 물었다.

뿌듯한 웃음은 덤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이안이 나지막하게 읊조리고는 피곤한 눈을 쓸었다.

그의 가슴 속에 리제아나라는 사람은 여성으로서 자리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행복할까 언제나 생각하고 또 궁금했다.

사랑이란 감정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 정확히 어떤 느낌과 생각을 지니고 다가오는지 그는 몰랐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깊어지는 건 당연하니까. 나조차도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지도 몰라.’

하지만 닿고 싶고, 항상 곁에서 말을 걸며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매번 볼 때마다 애타는 마음을 끊어내기에는 이미 짧아진 도화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에 이안은 마침내 제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끝까지 하르힌에게 제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하르힌 역시 이안이 깨달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슬쩍 곁눈질로 본 이안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진하고 깊은, 가장 순수한 웃음이었다.

하르힌은 음식을 든 접시를 내렸다. 역시 자신의 주인은 사랑에 빠진 모양이었다. 하르힌은 눈을 굴렸다. 타국의 영애와 공작이라….

그리 쉽게 이루어질 관계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주인이 처음 관심을 보이는 이성이었다.

“이안 님은 무도회를 더 즐기실 예정이신가요?”

“그녀가 원한다면. 그런데 첫 춤을 출 때 너와 네르아는 안 보이던데.”

이안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거슬리고 있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네르아가 약속 시간보다 늦어서요.”

“네르아가?”

“네. 마탑에서 뭐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내가 알기론 아무 일도 없던 것 같던데.”

네르아의 일은 약초 재료를 조달하는 것으로 미세리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일이라? 무엇인가 기시감이 들었다.

“아. 샴페인이 너무 다니까 차가 당기네요.”

하르힌이 생각에 잠긴 그를 스쳐 지나가며 샴페인 잔을 천장으로 들어 올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나도 하나만 부탁할 걸 그랬나.”

“무엇을?”

“아니 아까 네르아가 차 두 잔을 시종에게 따로 부탁하더군요. 저하께 드리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닌가 보네요. 지금까지 권유하지 않는 걸 보면요.”

“차? 네르아가 차를…? 지금 리제아나는 어딨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리제아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리제아나의 우아함과 지적할 것 하나 없는 예법에 귀족들의 호기심은 금세 호감으로 바뀌었다.

무리 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리제아나는 문득 주위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 사이로 나타난 여자 때문이었다.

그을린 얼굴에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녀 앞에 섰다.

“손님… 아니, 델리사 영애도 역시 오셨군요. 이 수확제 무도회에.”

네르아가 발랄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아는척했다. 이전에 마탑에서 그녀를 떠보던 네르아였다. 그녀의 등장에 리제아나는 멈칫했지만 금방 표정을 바꾸고 마주 웃었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조금 전만 해도 모습을 찾을 수 없어서 오시지 않나 했습니다.”

늦은 네르아를 비꼬는 말이었다. 네르아는 잠시 입매를 굳혔으나 밝게 웃으며 손을 모았다.

“역시 멀리서 지켜봤지만 남다른 분이시군요. 궁중 예법에 익숙하고 춤도 이리 잘 추시다니. 마치 어디 높은 가문 출신인가 했습니다. 정말 감탄했어요.”

그녀의 말에 주변의 사람들 역시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그들 역시 리제아나에게 그녀의 출신에 대해 물었지만 그녀는 적당히 둘러댔을 뿐이었다.

그녀의 출신을 꼬집는 네르아에도 리제아나는 흔들림 없이 받아쳤다.

“노력의 결과죠. 이 텐젤의 문화에 열심히 공부했답니다.”

“하지만 이상하죠. 이안 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걸까요? 이국 출신이신 영애께서?”

“그건….”

“텐젤의 문화에 금방 익숙해지신 듯하지만, 아직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아 보입니다.”

네르아가 한걸음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안, 그에 대해.”

뜻밖의 이야기에 리제아나는 흠칫 네르아를 바라보았다. 네르아가 비릿하게 그녀를 비웃듯이 웃었다.

“이안, 그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요? 그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많지 않나요? 황제도, 저주도?”

리제아나는 텐젤 황제의 충직한 개라는 소문과 다르게 황제에게 이따금 보이던 경계 어린 시선을 떠올렸다. 네르아는 그 이유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 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어요. 원한다면 알려줄게요. 만일 저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델리사 영애의 석연치 않은 점에 대해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하는 수밖에.”

경고 섞인 속삭임 뒤로 네르아가 스르르 군중 속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리제아나를 재촉하듯 그녀에게 돌아보고는 그대로 테라스 너머로 사라졌다.

리제아나는 네르아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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