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네르아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방안은 갖가지 약초와 플라스크 따위로 혼잡스러웠다.
책상에는 그녀가 어젯밤 여러 시도 끝에 마침내 성공한 주황색 물약이 놓여 있었다.
그을린 피부의 그녀에게 어울리는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꺼내 들은 네르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옷에 쌓인 먼지를 털었다.
오래전부터 옷장 가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드레스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으니까.
어느새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딱 시간에 맞추어 모든 준비를 마친 네르아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공간에 물약을 집어넣은 채로 천천히.
네르아가 음습한 표정으로 교활하게 웃었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려온 그 날이, 온 것이었다.
무도회장에 도착하자 언제부터 기다린 것인지 황궁 앞에서 하르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다가 온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상관 하지 말랬지.”
네르아가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하르힌은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하…. 잡아.”
“뭐?”
하르힌이 내민 손을 뻔히 바라보던 네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고 그는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잡으라고. 오늘은 수확제 무도회니까, 아무리 네가 숙녀답지 못하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나도 널 레이디로 상대할 테니까.”
“어이없는 건 알지?”
“더 민망해지기 전에 잡기나 해.”
“참나.”
보통 때라면 응당 거절하겠지만 오늘만큼은 네르아는 손을 맞잡았다.
“늦긴 했지만. 다행이네. 이제 막 무도회가 시작된 모양이야. 비록 황제 폐하의 말씀은 놓쳤지만.”
하르힌이 조금 벅차오르는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황제의 무도회 개막 선언을 놓친 것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무도회는 이제 시작된 모양이었다.
첫 곡으로 간단한 박자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첫 춤은…. 누가 먼저 나서서 추는 거지?”
몇몇 이들이 음악에 맞추어 발을 움직이며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곳은 다름 아닌 정중앙이었다.
하르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무도회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넋을 잃은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는 하르힌의 곁으로 시종에게서 잔을 건네받은 네르아가 다가왔다.
“뭐해?”
그때 하르힌이 턱짓으로 한데 모인 인파 가운데 물 흐르듯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남녀를 가리켰다.
흑발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자와 빛나는 아름다운 적안을 가진 남자가 두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안과 리제아나였다.
네르아가 일순 몸을 굳혔다.
“….”
“이렇게 보니 두 분이 진짜 어울리지 않아?”
하르힌의 말처럼 두 사람은 그린 듯이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부드럽게 이안의 손길에 따르며 우아하게 몸을 돌리는 리제아나와 그런 그녀 옆에서 사뿐히 스텝을 밟는 이안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로채기 충분해 보였다.
춤을 추는 두 사람 뒤로 사람들이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이는 질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으나 그녀의 우아한 춤선에 이내 감탄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르힌 또한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털어냈다.
“두 분이야 범상치 않은 분들이시니 뭐…. 난 음식이나 먹으러 가야지. 너, 네르아.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알겠어? 아니면 같이 갈래?”
“…너 혼자 가.”
네르아의 차가운 대답에 하르힌은 어깨를 으쓱이곤 연회장 한편에 놓인 음식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네르아의 시선은 리제아나와 이안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네르아는 주먹을 쥐고 질투에 몸을 떨었다.
‘보라색….’
두 사람은 보란 듯이 보라색 목걸이와 크라바타로 드레스 코드를 맞추고 있었다.
냉정하게 자신을 내치던 그가 그녀와는 옷을 맞추고 보란 듯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째서… 저 여자에게는…. 대체 왜…?’
네르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문득 그런 그녀의 귓가로 불쾌한 속삭임이 꽂혀 들어왔다.
“어머 어머. 방금 봤어요?”
“세상에 이안 저하가 저렇게 웃다니…. 무도회에 참석도 잘 안 하시는 분이 왜 오셨을까 했는데… 파트너라니….”
“그, 무서운 데벤시아 공작이 맞나요?”
“…그렇다면, 역시 네르아 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네르아? 그 약초 마법사라는 그 여자요? 탄 피부에 예의도 부족한 그 여자, 말하는 건가요?”
네르아는 표정을 가다듬고는 망설임 없이 속삭임이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전까지 자신을 험담하고 있던 영애들이 있는 곳이었다.
“네, 네르아 님?”
총 네 명 정도의 영애로 구성된 집단은 네르아를 발견하자마자 헛기침을 반복하며 눈을 피하기 바빴다.
“무슨 얘기들 하고 계셨어요? 재밌게 들리던데. 제 피부색이며, 예의며.”
“그… 그럴 리가요. 그, 그럼 저희는 그럼 이만.”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영애들은 제각기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네르아 홀로 남게 되었다.
“웃겨서 원.”
덩그러니 남겨진 네르아가 얼굴에 희미한 조소를 띄웠다.
매번 당하면서도 행동을 달리하지 않는 그들이 웃겼다.
문득 네르아는 이안과 춤을 추고 있는 리제아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 그 영애 무리는 네르아와 리제아나를 비교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네르아는 이를 악다물었다.
이국의 사람일 뿐인 그녀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온 이안의 옆자리를 꿰찼을뿐더러 사람들의 주목을 보란 듯이 당연하게 받고 있었다.
그 자리는 네르아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네르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이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그의 탓이었다.
⚜ ⚜ ⚜
한 곡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스텝과 턴을 반복하던 리제아나는 결국 겨우 한 곡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뭐라도 가져다줄까?”
이안이 의자에 그녀를 살포시 앉히며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아뇨. 그냥 쉬고 싶어요.”
간만에 탑에서 나와 몸을 움직인 탓에 피곤한 기색이었다. 리제아나가 몸을 늘어뜨리며 있자 이안이 픽 웃으며 그녀가 쉬도록 기다려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때 이안과 친분이 있어 보이던 귀족이, 눈치를 살피던 이들을 뚫고 나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인기척에 이안 역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이네, 카우스트 후작.”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무도회나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미안하게 되었군. 하긴, 황궁에서도 의회에서밖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
이안과 카우스트 후작은 이리저리 대화를 주고받으며 꽤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이쪽 레이디는? 파트너 소개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실 겁니까, 전하.”
마침내 카우스트 후작의 시선이 앉아있던 리제아나를 향했고 이안이 멈칫하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안 공작의 수확제 파트너인 델리사라고 합니다.”
리제아나가 먼저 선수를 쳐 미리 배워두었던 텐젤 제국의 인사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카우스트 후작에게 인사했다.
몸에 익은 듯 곧장 텐젤 인사법을 하자 리제아나의 우아한 몸짓에 귀족들이 감탄하며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리제아나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속속히 대기하던 다른 귀족들 역시 리제아나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모두 새로운 인물에 흥미가 솟은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그’ 데벤시아 공작의 파트너였으니 귀족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일은 당연했다.
“어디서 오셨나요?”
“전하와는 무슨 사이신가요?”
“어느 가문의 영애신지요?”
동시에 그들 모두의 입을 간지럽히고 있던 질문들이 보따리 터진 듯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예상치 못한 관심에 다소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물론 그들의 물음에 진실을 이야기하긴 어려웠으나 잘 처신하여 답해주었다.
그런 리제아나의 곁을 맴돌며 조금 전부터 틈틈이 그녀에게 말 붙일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자가 문득 그녀 앞으로 섰다.
“저와 한 곡 어떠십니까, 무도회에서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우신 델리사 영애?”
바람둥이로 유명한 레베테스 후작가의 영식 페셀이 능글맞게 보조개가 활짝 핀 그만의 전매특허 웃음을 내비치며 리제아나에게 춤을 청하기까지 했다.
카우스트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안이 눈썹을 구겼다.
그녀가 잘 처신하리라 믿고서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두었거늘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페셀 영식이 리제아나의 손등에 멋대로 입을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이안 안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말씀은 감사하나….”
뜻밖의 전개에 리제아나는 당혹스러웠지만, 그의 청을 거절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입을 뗄 참이었다.
떨어져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안이 훌쩍 걸어와 그녀와 영식을 가로막았다.
“안 돼.”
“네?”
“미안하지만, 레베테스 영식. 안 된다고.”
이안은 자연스레 퍼셀과 손을 맞잡고 있던 리제아나의 오른쪽 손을 빼내 움켜쥐었다. 그리고 짧은 손등 키스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영애들이 볼을 붉혔다.
“자네 파트너는 어디 있지?”
전과 다름없이 침착한 얼굴로 이안이 질문을 이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일그러진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딱히 특정한 파트너는 없습니다만.”
퍼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안은 마치 그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리제아나를 제 곁으로 조금 더 당겼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번 무도회에서 기댈 사람이 이 사람뿐이라. 영식이 내게서 그녀를 빼앗는 건 곤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