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처음 보는 이방인 같은데. 이방인 주제에 저하와 춤을 춘다고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한 영애가 낮게 소곤댔으나 리제아나에게 닿기까지 충분했다.
다음 스텝 때문에 그들과 멀어져 뒤의 내용을 들을 순 없었다.
이안의 파트너 자리를 차지했으니 뒷이야기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녀 또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어딜 가나 내 뒤에는 욕이 붙는군.’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듯 보였지만 사실 이러한 반짝거리는 장신구들은 리제아나가 생각하기에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바로 전에까지 손에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이라면 모를까.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상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지고 깨지는 유리. 어쩌면 그것이 더 리제아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리제아나.”
리제아나는 익숙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흘러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리제아나.”
이안이 입을 열어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나열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흘려 들어.”
“뭘요?”
“내가 이런 말 해본 적도 없어서 어색하지만.”
그는 그가 먼저 입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뒷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가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를 넘기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대는 이 무도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야.”
“….”
자신의 외모와 태도에 대한 품평은 지겹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했다.
모두 그녀를 깎아내리고자 했기에 그들은 그녀의 대한 작은 꼬투리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 자신을 칭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일에 리제아나는 익숙하지 않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리제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손을 끌며 춤을 이어갔다.
“진심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리제아나가 속삭였다.
“그대는 이상해. 매사에 스스로에게 부정적이잖아. 그럴 이유조차 없는데 말이야.”
“….”
“기왕이면 웃지, 그래.”
미처 리제아나가 답을 할 새도 없이 이안이 맞잡고 있던 오른손을 자연스레 빼내어 그녀의 오른쪽 볼을 살포시 건드리며 피식 웃었다.
“이안….”
뒤늦게 이안의 행동을 자각한 리제아나가 반응했지만 이미 노래는 끝난 뒤였다.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본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다정스러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 때문이었다.
“어머 어머. 방금 봤어요?”
“세상에 이안 저하가 저렇게 웃다니…. 무도회에 참석도 잘 안 하시는 분이 왜 오셨을까 했는데… 파트너라니….”
“그, 데벤시아 공작이 맞나요?”
“…그렇다면, 역시 네르아 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리제아나와 이안, 그리고 네르아의 관계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이안이 가는 곳이라면 언제나 그의 뒤를 쫓아다니던 네르아였기에 사교계에서 데벤시아 공작과 네르아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드물었다.
“무슨 얘기들 하고 계셨어요?”
영애들에게 한 인영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는 순간,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의 얼굴이 모두 경직됐다.
방긋 미소를 띠며 그들을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네르아였다.
⚜ ⚜ ⚜
리제아나와 이안은 한차례 춤을 추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고마워요.”
리제아나가 먼저 말문을 텄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제아나의 눈꼬리는 아래로 휘어졌다.
이에 이안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호쾌하게 답했다.
“고맙다니. 내가 한 거라곤 콧대 높은 영애의 비위를 맞춰준 것뿐인걸.”
이안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리제아나에게서 픽, 하고 웃었다.
“세상에 이안. 무도회에 정말 나왔군.”
그때, 이안에게 있어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구태여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낮고 거친 목소리에 그 탐욕과 욕심이 가득 묻어나왔다. 황제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리제아나와 이안이 동시에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인사했다. 아담 황제는 인자한 웃음을 짓고 손을 휘저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델리사 영애가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야? 수확제에 저 영애를 데리고 참석하더니.”
눈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칼날같이 날카로웠다. 명백히 그녀의 존재를 반기지 않는 듯했다. 황제는 대놓고 이를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쉬이 황제의 말을 그대로 받고만 있을 이안은 아니었다.
그는 리제아나를 조심스럽게 이끌며 수려한 입매에 진한 웃음을 띠었다.
“이방인인 그녀에게 텐젤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수확제만큼 텐젤에 매력적인 행사가 없지 않습니까.”
리제아나 역시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다정한 척 이안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흐드러지게 미소를 지으며 청아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정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폐하. 결코, 아비드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위상과 아름다움입니다.”
“하하하-”
황제의 박장대소로 무도회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시원하게 웃은 황제가 느릿하게 주위를 살폈다.
황제도 어느 정도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것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그래, 우리 텐젤을 모쪼록 잘 즐겨주길 바라네. 그럼 이안, 다음에 보도록 하지.”
이어서 황제가 먼저 발걸음을 떼어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끝까지 리제아나를 향한 황제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는 것을, 리제아나는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안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좁힌 채로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그가 멀어지고서야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그와 리제아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 다른 꿍꿍이속이 보인 것은 그의 착각일까.
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이안?”
황제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이안을 바라보던 리제아나는 이내 더 묻지 않고 침묵했다.
역시 이안과 황제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 ⚜
이번 수확제에 초대된 이들은 비단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레고리 상단 건을 안전하게 풀기 위한 묘책으로 라이핀은 아비드의 특산물들을 수확제에 사절단을 통해 보냈다. 사과의 의미와 함께 두 제국 사이의 교류를 끊지 말자는 의사를 밝히기 위함이었다.
“텐젤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걸.”
“말조심해. 이곳은 텐젤이다. 함부로 말했다간 아비드로 안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다.”
사절단들은 각기 두세 명씩 모여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외교를 위해 텐젤을 찾은 그들은 두 제국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꽤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아비드 제국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꼬리를 자르긴 했으나 외교에 일부분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레고리 상단 일은 나도 의외였으니….”
“말조심하라니까! 그 상단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불길하게 정말.”
그들은 그레고리 상단 전체가 모두 과거 텐젤인이었다는 사실에 모두 놀라긴 했지만 정작 그들을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텐젤의 배신자 처형 방식이었다.
“소문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자비 없는 형벌을 받았다는군.”
“그러게 조심히 움직일 것이지….”
“한데 이상하지? 무역 정보는 극비리에 진행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정보가 어떻게 텐젤로 흘러 들어간 건가?”
“에엣, 말조심하라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호통치며 쉬쉬, 다른 이들을 입단속 시켰다. 사절단 일원들은 저들끼리 잔을 부딪치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그나저나 아비드의 귀족들은 조금 다른 분위기군.”
아비드는 활발한 분위기의 호쾌한 귀족들이 많다면 텐젤은 그 반대였다.
그들 역시 화려하고 호사스러웠지만 아비드 제국의 귀족들보다 더 차갑고 엄중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사절단들은 텐젤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 잠시 그들을 감상하고 있던 때였다.
사절단에 속해 있던 한 남자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걸렸다.
“고마워요.”
“고맙다니. 내가 한 거라곤 콧대 높은 영애의 비위를 맞춰준 것뿐인걸.”
여성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곁에 서 있는 다른 텐젤 귀족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 앞에 선 남성에게 가려져 인상착의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의아해하며 여자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자 여성의 외모가 또렷이 드러났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칼에 영롱한 보석 같은, 매료될 것처럼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
“어라….”
혹여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그 여성을 응시했다. 여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위험한 확신을 안겨주었다.
겨우 몇 번 발치에서 본 탓에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그녀와 같은 외모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비 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근래 황태자비에 대한 소식이 뜸하긴 했으나 황태자님이 황제가 되셨으니 곧 황후가 될 사람이지 않은가.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정신 차려.”
남자는 서둘러 시선을 떼고 믿을 수 없다는 투로 힘껏 제 머리를 내려쳤다.
말이 될 리가 있나.
분명 가볍게 홀짝이던 칵테일에 취한 자신의 착각일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 굳게 믿으며 잊어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