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수확제가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만큼, 무도회에 쏟아부은 재력은 다른 무도회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커다란 샹들리에와 함께 단 50명의 고위급 귀족들만 초대됐지만, 거뜬히 500명은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뒤이어 황궁 악단이 한쪽에서 연주를 하며 분위기를 더욱더 감미롭게 만들고 있었다.
보석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연회 홀은 수확제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알려주는 듯했다.
잘 꾸며진 연회 홀을 둘러보던 리제아나의 귓가로 문득 과거에 아비드에서 그녀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분이 그, 잔인하기 짝이 없다는 황태자비인가요?’
‘세상에, 어쩜 저런 분이 그 자애로운 황태자님 옆에….’
‘황태자께서 델리사 영애를 괜히 아끼는 것이 아니겠지요? 저런 여자가 아내 될 사람이라니.’
아냐. 아니야. 모두 거짓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를 두려워하는 한편 경멸의 빛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는 수많은 눈이 일순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리제아나?”
순간 파도처럼 몰려온 기억은 리제아나를 멈칫하게 했다.
하지만 이내 이안 덕분에 평소보다 빠르게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등 뒤로 아직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어디 아픈가?”
그의 손등 위로 얹은 손에 제멋대로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리제아나?”
“전 괜, 괜찮아요….”
“안 되겠다. 어디 좀 앉을까?”
뒤이어 리제아나가 살짝 비틀거리자 이안의 미간은 아까보다 더 진하게 좁혀졌다.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안이 먼저 몸을 움직여 가까이 있는 테이블로 이끌어 벨벳 암체어에 그녀를 앉게 했다.
“물이라도 줄까? 리제아나, 그대 지금 눈에 초점이 없어.”
“아뇨.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이렇게 매번 도움을 받고 있는데 무도회에 와서까지 짐이 될 수 없었다.
이안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며 리제아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안의 등장과 동시에 무도회의 공기 흐름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홀 안의 모든 시선이 이안을 향해있었다.
그리고 함께 온 자신에게까지도.
‘이런. 일단 처음 등장에서부터 비틀거렸으니 마이너스 1점인가.’
등장과 동시에 이안에게 몸을 기댄 채 입장했으니 곱지 않은 눈초리들이 절로 몸으로 느껴졌다.
“신경 쓰지 마. 새로운 인물에 관심을 주는 건 당연하니.”
그런 걱정을 눈치챈 모양인지 이안은 지나가던 웨이터가 들고 있던 샴페인 두 잔을 자연스레 낚아채 한 잔을 리제아나에게 건넸다.
“때론 이게 더 침착하게 해주기도 하지.”
“샴페인인가요?”
리제아나는 받아든 잔에 담긴 샴페인을 천천히 내려다보며 올라오는 기포를 응시했다.
“진정하게 도와줄 거야.”
그의 다정스러운 말에 리제아나는 망설임 없이 잔을 올렸다. 그러자 이안 또한 그녀 앞으로 자신이 든 잔을 들어 보였다.
“짠.”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리제아나 또한 먼저 잔을 들어 자신에게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이안이 들고 있는 잔과 마주 부딪쳤다.
“제국이 여신의 손길 안에서….”
“언제나 아늑하고 풍성하길.”
리제아나가 능숙하게 그의 인사를 받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러자 유리가 맞부딪히는 맑은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리제아나의 인사에 이안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수확제의 인사말을 아는군?”
“수확제에 대한 책에서 봤어요. 시간이 많이 남았거든요.”
텐젤의 전통적인 수확제 인사말로 내년도 이번 해처럼 부족함 없이 풍족한 생활을 한 것에 대한 숭배와 존경의 뜻을 담고 있었다.
“역시 명성이 어디 가지 않네.”
“절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음… 그대도 나에 대해서 잘 알지 않나?”
“제가 어떻게요?”
“조사했다며.”
의문 어린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자 그는 반대로 장난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리제아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그의 장난을 받아쳤다.
“네에, 네. 잘 알죠. 저하께서는 장난기가 가득하신, 제멋대로인 인물이라는 걸요.”
“됐어요.”
풉. 그와 나누는 이 대화가 얼마나 실속 없는가.
하지만 그가 그녀를 위해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는 그녀였다.
리제아나는 웃음 지으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톡 쏘는 목 넘김과 함께 흐릿한 정신이 다시 맑아진 기분이었다.
“어때? 괜찮지?”
“네. 정신이 또렷해지네요.”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드십니다!”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웅장한 음악이 잇따랐다. 단상 위에는 앞서 보았던 황제와 그녀로선 처음 보는 황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홀 안의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그의 형식적인 연설이 이어졌다. 리제아나가 흘끗 고개를 들자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안과 그녀를 일순 훑고 지나갔다.
어쩐지 경계 어린 시선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언제 그녀와 눈이 마주쳤냐는 듯 자연스럽게 연설을 이어갔다. 수확제에 축복과 풍요를 기원한다는 이야기였다.
“폐하의 눈에 도장 찍기는 성공이네.”
이안이 곁에서 잔망스러운 말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상하네요. 황제가 저희를 왜 저런 시선으로 보는 거죠? 제가 아비드 사람이라 아직 의심스러운 걸까요?”
“글쎄. 당신이 아니라, 나를 의심하는 거라면?”
그의 말에 리제아나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더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제아나는 홀을 둘러보며 조금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마탑 분들은요?”
“참가한다더군. 아마 이 자리 어딘가에 있겠지.”
“그렇군요.”
간결한 그의 답에 리제아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무도회를 시작하도록 하지!”
그들이 속삭이며 대화하고 있는 도중, 연설이 끝난 모양인지 황제가 무도회 공식적인 개막을 외쳤다. 피아노의 선율이 그의 말을 잇따랐다.
“자, 우리도 이따 한 곡 나가서 춰야지?”
이안이 음악에 맞추어 손을 내밀었고 리제아나도 어느새 다 마셔버린 빈 샴페인 잔을 놔둔 채로 올라오는 술기운에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 후회할걸요?”
무도회의 춤 순서는 제일 먼저 황제와 황후가 추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모든 황실 무도회의 불문율이었기에 모두들 음악에 맞추어 부드러이 미끄러지는 황제 부부를 응시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춘 사람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완벽히 춤을 추어 나갔다.
“좀 야위셨군.”
이들을 응시하던 이안이 뇌까리자 리제아나의 시선 또한 황제 부부에게로 향했다.
“황후 폐하 말이야.”
이전의 알현을 마지막으로 황후는 꽤나 수척해져 있었다.
리제아나 역시 황후의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건너 듣기로 텐젤의 황제 부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금실이 좋았지만 아직 그들 사이에 아이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끝났군.”
잠시 리제아나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황제 부부의 춤은 끝났고 다시 귀족들로 인해 홀은 다시 한번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몸을 움직여 볼까요? 영애.”
“좋아요.”
이안은 다시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리제아나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 ⚜ ⚜
부드러운 선율에 맞추어 이안의 손을 맞잡은 리제아나는 익숙하게 춤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무도회에 있어서 텐젤과 아비드의 문화 차이가 크게 없는 모양이었다. 무도회의 예법에 익숙한 리제아나는 자연스럽게 이안의 호흡에 맞추어갈 수 있었다.
“제법인데.”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요. 이 정도 춤은 눈 감고도 출 수 있답니다.”
“그 뻔뻔함도 제법이군.”
이안이 우아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리제아나를 한차례 리드했다.
능글맞은 그의 대답에 리제아나는 살며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길에 따라 리제아나는 크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춤을 추기 시작하니 자신을 훑어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녀를 가늠하고자 하는 눈들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아.’
‘악녀도 저런 악녀가 따로 없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여자가 아비드의 황후가 된다니.’
애써 샴페인으로 진정되었던 가슴이 다시 울렁거렸다.
그들의 모든 시선이 마치 리제아나가 실수를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찌를 듯이 아프게 느껴졌다.
‘아비드 제국에 망조가 깃들었다!’
‘저 마녀 때문에!!’
오늘은 특히나 텐젤 제국에서 가장 큰 무도회 중 하나였으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불안감이 마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전에 듣던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황태자비로서 느꼈던 압박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리제아나는 몸을 떨며 스텝을 밟았다.
문득 그가 속삭였다.
“괜찮아. 나만 따라와, 리제아나.”
이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살며시 울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리제아나의 손을 맞잡았다. 뒤이어 연주하는 곡의 박자에 맞춰 하나, 둘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군중들이 걸음을 물러 비켜섰다.
“춤을 많이 춰봤나 보네.”
“전적이 있으니까요.”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면 사과하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심장이 의사를 반하고 뛰어댔다. 그들이 거리는 스텝 덕분에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했다. 가까워질 때면 이안은 나직한 목소리로 리제아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소소한 이야기들을 건넸다.
그런 이안의 노력들 덕분이었을까.
찬란하게 빛을 비추는 조명 아래로 이안의 붉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따뜻한 불꽃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
“그저 분위기에만 익숙해지면 돼. 앞으로 그대가 즐길 나날들인걸.”
“…네.”
맞잡은 손과 함께 앞으로 스텝. 그리고 뒤로 스텝. 왼쪽으로 두 걸음을 살포시 걸었다가 그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또 한 번 이동한 후, 이안의 손에 이끌려 턴을 했다.
스텝을 밟으면 밟을수록, 회전할수록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기까지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무도회가 이리도 즐길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몸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