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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117)

33화

수확제 당일 아침.

리제아나는 데벤시아 공작저에 머물렀고 이안은 마탑에서 바쁜 일들을 처리했다.

여러 서류를 겨우내 처리한 이안이 빠르게 데벤시아 공작저를 찾았다.

“리제, 준비됐어?”

“이안?”

“아직 준비가 안 끝난 모양이네.”

“나가세요, 도련님!”

저녁에 열리는 수확제 무도회 준비로 자신도 치장하기 위해 데벤시아 공작저를 방문한 이안이 며칠 동안 보지 못한 리제아나를 찾아갔지만 퇴짜 당하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를 치장하고 있던 하녀장 시엘에 의해.

“아 알겠다니까. 잠깐 인사만 하러 온 거야.”

“네네. 이제 됐죠? 숙녀의 치장 도중에 들어오는 건 무슨 실례입니까, 정말. 이건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라니까요, 도련님?”

“알겠다고…. 그럼 나중에 봐.”

어릴 때부터 그를 봐왔던 시엘은 그가 공작이 된 이후에도 꾸준히 도련님이라 불렀다.

게다가 마탑의 용무로 인해 잘 찾아오지 않은 공작저를 가끔 찾아갈 때마다 웃음으로 대접해주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안이 멋대로 할 수 없는 이이기도 했다.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다. 저하? 함부로 가지 말라고 했죠. 시엘에게 꼭 잔소리 들을 걸 알면서도!”

하르힌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안이 퇴짜 맞는 소리를 듣고 웃음을 내비치며 대꾸했다.

“리제랑 얘기도 못 하게 할 줄 몰랐지.”

이안은 입을 삐쭉거리며 제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그러다가 또 혼나시죠, 멋대로 머리 만졌다고. 아직 단장 안 하셨으니 망정이지. 자, 이제 저하도 단장하러 가셔야죠.”

짜증 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그의 행동을 지적하며 하르힌은 이안을 방 안으로 천천히 안내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기사단에게도 인사하고 그래야 하지 않겠나….”

“저하가 꾸미시는 게 귀찮고 싫으시다고 해서 지체하시면 저 시엘에게 꾸지람만 더 맞으실 텐데요.”

하녀장 시엘은 시간 낭비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특히 이안이 별로 관심이 없는 치장을 해야 할 때 그가 미적대며 시간을 끌 때면 얌전했던 성격이 들끓어 오르기 일쑤였다.

“윽.”

이안은 짧게 앓은 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그의 차례는 시엘을 비롯한 다른 하녀들이 리제아나의 치장을 마친 뒤에나 올 테니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신사의 기본예절이었다.

“너도 치장해야지. 무도회, 같이 나가는 거잖아?”

“시엘 님은 저하 치장해주시느라 바쁘실 텐데요.”

“뭐가 문제야. 자, 너도 가야지.”

“윽.”

저도 당할 줄 몰랐던 하르힌은 조금 전 이안과 마찬가지로 픽 한숨을 내뱉고는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르힌은 고아 출신 부관이었지만 이안의 도움으로 자작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도회에 참가할 자격은 충분했다.

게다가 그는 이번 무도회에 결국 네르아와 함께 파트너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괜히 황비는 아니라는 건가.’

이안은 걸어가면서 어렴풋이 리제아나의 치장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물론 그는 하르힌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잊으려고 해도 자꾸 그녀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저 간단한 화장을 하고 화장대 의자에 앉아만 있었음에도 그녀의 자세에서 우아함이 흘러내렸다.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이안이 하르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네 파트너는?”

“네르아 말입니까? 치장은 자기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나중에 합류하겠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더 묻지 않고 걸어나갔다. 하르힌은 왜인지 찜찜한 기분이었으나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 ⚜ ⚜

저녁 4시.

하늘에 새빨간 물감이 제멋대로 흩뿌려진 시간.

태양도 수확제를 축하해주는지 여느 때보다 더 붉게 존재감을 빛내기 시작했다. 시장 곳곳에 수확제를 기념하는 야시장이 펼쳐졌다. 본격적으로 축제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 이거 하나만요! 네? 도련님. 셔츠 단추 하나만 더 잠가야 한다니까요?”

“됐어, 시엘. 리제아나를 데리러 갈 시간인걸. 하르힌이나 마저 꾸며주든지 해.”

장정 두 시간이나 시엘의 폭풍 같은 수다를 들으며 그녀의 손길을 받아내야 했던 이안은 무도회 시간이 되자 득달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리제아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크라바트를 고쳐 맸다.

드디어 눈앞으로 손님 접대 방이 나타났고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띄워졌다.

“후.”

왜 떨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짧은 심호흡으로 이리저리 뛰는 마음을 가다듬은 이안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한 하녀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린 자를 확인하러 온 듯한 그녀는 이안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한 걸음 물러나 리제아나를 보며 말했다.

“공작 저하 드셨습니다.”

“이안?”

공작 저하란 말에 다른 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리제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이안은 살짝 열린 문을 조금 더 밀고 리제아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그렇게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걸음 수를 세며.

그리고 마침내 다섯 발자국. 그의 눈앞에는 기다렸던 리제아나가 서 있었다.

“리제….”

그녀의 눈동자와 똑같은 보라색 드레스에 곁들인 연한 하얀색 레이스, 꽉 조여진 허리선이 그녀를 훨씬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소매에 달린 투명한 꽃무늬 레이스와 상체에 달린 리본, 목에 매단 검은색 초커.

더불어 그녀는 흰 얼굴에 어울리는 복숭앗빛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눈 위의 얹은 색조 화장은 빛을 받을수록 반짝이며 빛났고 입술은 탐스러운 앵두색을 띠고 있었다.

“예쁘다. 리제아나.”

그는 담백하게 그녀의 모습을 본 소감을 말했다.

머리와 화장까지 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녀는 한 나라의 황태자비다웠다.

여신의 대리인과도 같은 우아하고도 고급스러운 자태였다.

제비꽃같이 맑은 보라색 눈동자가 이안을 응시하자 이안은 눈을 요염하게 접으며 입을 움직였다.

“영애, 이제 무도회에 가실까요?”

그가 검은 제복과 함께 맨 보라색 크라바트와 그녀의 목에 걸린 자수정 목걸이는 누가 보아도 파트너처럼 어울려 보였다.

그의 말에 리제아나의 가느다란 손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안은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 ⚜ ⚜

“좋은 오후입니다, 데벤시아 공작님. 그런데 이분은?”

이안과 리제아나는 데벤시아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금빛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벌써 여러 마차가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이안의 가문 문장을 확인하고 곧장 그들을 맨 앞으로 이끌었다.

“파티 초대장은 없어. 그래도 내 파트너로 참여시키고 싶은데. 안되나?”

“그렇다면 데벤시아 공작님께서 이 영애분의 무도회 공증인이 돼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어디에 적으면 되나?”

“여기에 적어주시면 됩니다.”

이안은 리제아나의 손을 제 팔에 얹은 채로 마차에서 내리며 에스코트했다.

그는 경비병이 건네는 깃털 펜을 들어 가볍게 성명서에 데벤시아 공작저의 사인을 마쳤다. 경례하는 경비원을 뒤로하고 연회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네요.”

그들이 걸어가던 도중, 넌지시 리제아나가 말했다.

이안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그녀를 건너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피식 웃으며 답했다.

수확제는 큰 축제인 만큼 경비도 삼엄해 직접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안이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리제아나를 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 텐젤 제국의 가장 위상 높은 공작자리에 앉은 자이자 황제의 최측근인 그가 그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니 당연한 거지. 데벤시아 가문의 부탁인걸.”

리제아나의 어이없으면서도 이해가 간다는 얼굴을 바라보자 이안은 말을 이었다.

“이제 이 레드카펫 계단을 오르면 무도회장이야. 그대가 해줄 일은 그저 내 옆에 딱 붙어있기만 하면 돼.”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귀찮겠지만 총 사흘 열리는 무도회야, 황제 눈에만 띄면 되니 오늘로 두 번만 참가할 거야.”

일주일의 축제 중, 무려 사흘이나 열리는 무도회였다.

이안은 물론 사흘 내내 무도회에 참석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유익하지 않은 대화에 끼느라 체력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뭐, 앞서 얘기했듯이 즐기기만 해.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해도 좋지만, 무도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서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니 주의하고. 어느 정도 무도회가 마무리된 듯하면 원한다면 중간에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

무도회 이야기를 하니 벌써 지루한 기분에 이안이 입매를 늘이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무도회가 무르익을 때까지. 미안하지만 그때까지만 참아줘. 사람들에게 그대가 내 파트너라는 걸 알려야 하니까.”

곁을 한시도 떠나지 말라는 부탁인 걸까.

인생의 대부분을 그림자처럼 살아온 그녀로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사를 대신했다. 그러자 이안은 한결 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한걸음 먼저 올랐다.

“혹, 내 옆이 심심해지면 이야기해.”

“네?”

“할 수 있는 한 재롱이라도 떨어보지.”

그럼 그렇지. 그의 농담에 리제아나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때마침 등 뒤로 화려한 무도회장 불빛이 이안의 등 뒤로 밝게 빛났다.

가을을 대표하는 무도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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