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이번에도 기절했군.”
정신이 든 이안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하.”
“이안. 이안으로 부르라니까.”
리제아나의 말에 곧바로 이안이 정정했다.
‘아파도 고집은 여전하네, 참.’
식은땀으로 젖은 그의 이마를 보자니 더 지켜만 봐서는 안 됐다.
“마탑 사람들을 불러오는 게 좋겠어요.”
그녀 홀로 이런 지하 감옥에서 그를 살필 수 없었다. 리제아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가 저주를 숨기고자 함은 알았지만, 이런 곳에 있다간 더 아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안은 리제아나의 손목을 더 세게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아냐.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괜히 이곳에서 당신을 보자고 한 게 아니야.”
“…아파요.”
리제아나의 손목을 저도 모르게 강하게 잡은 이안은 황급히 제 힘을 깨닫고는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
리제아나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옆에 도로 앉을 뿐이었다.
“하아….”
잡고 있던 손목을 놓은 이안은 마른 세수를 했다.
“이제 곧 괜찮아질 거니까. 그냥… 그냥 옆에만 있어 줘.”
그의 말대로 식은땀과 함께 그의 손에 가득 맴돌던 열기가 조금 사그라진 것 같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역시 내 확신이 맞았어.”
“내가 이안의 저주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저주가 발현될 때, 그대가 함께 있으면 잠잠해진다는 거야.”
“어째서죠. 전 마법사도 아닐뿐더러 그저 평범한 사람인걸요.”
“들어봐. 첫 번째 만남에서도, 지금도 당신 옆에서 이 저주가 진정됐지. 원래대로라면 이 저주는… 고작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도대체 왜. 그 근본적인 이유는 이안마저 알 수 없었다. 왜 그녀가 태양의 저주를 막을 수 있었을까.
“왜 하필 당신일까….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군.”
이안은 아직 호흡조차 힘겨워 보였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정신이 있을까. 리제아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땀을 많이 흘렸어요. 올라가서 수건만이라도 가져올게요.”
이렇게 찬 곳에서 땀을 많이 흘린다면 후에 병이라도 날지도 몰랐다. 다시 몸을 일으키는 리제아나를 이안이 붙들었다.
“아니.”
“?”
“가지 마. 그냥 여기 있어 줘. 그거면 될 것 같으니까.”
달빛만이 가득 찬, 공허한 지하 감옥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그의 외모처럼 감미로웠다.
리제아나는 자신의 손목을 꼭 붙든 남자가 더 편하도록 몸을 뉘였다.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는 이안은 고통이 점점 사라지는 모양인지 점차 그 표정이 안정되고 있었다.
문득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도회나 파티, 좋아해?”
“무도회나 파티요?”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는 미간을 구겼다.
순간 그날의 무도회가 리제아나의 눈앞에 선명히 펼쳐졌다.
자신을 델리사의 범인으로 몰아세우던 라이핀, 그리고 그의 명에 따라 기사들에게 비참하게 끌려가는 그녀.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
가벼운 질문에서조차 라이핀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몸서리쳤다. 하지만 이윽고 그가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짐작한 그녀가 가볍게 타박했다.
“그런 걸 왜 묻는 거예요? 아픈 사람이.”
“당신… 이곳의 시장 구경은 해줬지만 생각해보니 이곳에 온 이후 나 외에 다른 사람들과 교류조차 없잖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좀 쉬기나 해요.”
리제아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파서 거칠게 숨을 내쉬는 사람이 옆 사람이나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번에 수확제를 맞이해서 무도회를 하는데, 리…리제가…. 그러니까 그대가…. 내 파트너가 되면….”
그의 잔잔한 목소리가 고요하지만 빠르게 지하실을 울렸다.
“수확제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상황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서 그녀는 파티에 대한 좋은 추억 따위 없다.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뿐인 그곳에서 리제아나에겐 라이핀뿐이었다.
‘그만…. 그만 떠올리자, 이제.’
리제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파티, 즉 사교계는 그 제국민들의 고위층 권력들이 모이는 자리로 힘을 얻기 위해서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훗날을 위한다면 참가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그는 오롯이 리제아나를 배려하는 셈이었다.
“물론 우리의 계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 알다시피 수확제는… 텐젤 제국의 가장 큰 행사야. 그러니 그곳에서 사람을 사귈 기회가 많을…거야…. 물론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이안이 말을 덧붙였다. 평소 보던 것과는 다른 서투른 모습에 색다르기까지 했다.
“푸핫.”
리제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네, 좋아요.”
사실 아직은 무도회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들이 머리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날, 라이핀의 만행과 그녀를 외면하는 공작, 그리고 차갑게 비웃던 델리사의 모습들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아. 극복해내지 않으면 내가 회귀한 이유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항상 델리사가 껴있었지. 무도회에서 내게 일이 벌어질 때마다.’
복잡한 심경으로 리제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떠오르는 여명에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새벽이네요.”
“응.”
리제아나가 감옥 천장의 창살이 박힌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희뿌옇게 파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오지랖이지. 당신은 혼자 스스로 잘할 거였잖아.”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가 픽, 웃었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리제아나는 그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감옥이라.”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처음엔 지하감옥에 갇혔고, 나라를 팔아먹었음에도 황제는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래서 이 공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지하 위로 올라가고 싶으나 그의 고집을 알기에 리제아나는 그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낙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지옥인 것도 아니었다.
“한숨 더 자요.”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하고 있을게.”
리제아나의 무릎을 파고든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가볍게 숨을 들이쉬는 모습을 보아 정말로 그의 말처럼 얕은 잠에라도 빠진 모양이었다.
리제아나는 무릎을 내준 채 이제는 달빛은 가시고 새벽빛이 도는 창살 아래 그를 내려보았다.
그런데도 그의 은발이 예쁜 빛으로 반짝였다.
리제아나는 손끝으로 살짝 그의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 ⚜ ⚜
드디어 약물이 완성되었다.
네르아는 솥 앞에 섰다.
그녀는 투명한 유리병에 약물을 담았다.
약물은 푸른빛을 띠는가 하면 붉은빛을 띠었다. 빛을 따라 오묘한 빛을 내뿜는 약물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은 네르아는 조심스럽게 약이 든 병을 탁상 위의 가방에 넣었다.
어느새 약속한 시각이 되었고 그녀는 슬슬 황궁으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황궁으로 가는 일은 쉬웠다.
이안만이 쓰는 그의 집무실 안쪽 방에 황궁으로 통하는 마법진이 있다는 것을 네르아는 알았다.
그가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한 네르아는 익숙한 몸짓으로 집무실 안쪽 방으로 들어섰다.
잠긴 방문 앞에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 네르아는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마법진 앞에 섰다.
주문을 외우기 무섭게 눈을 뜨니 크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두운 황궁의 공기와 누구보다 잘 어우러지는 황궁 주인은 매번 마주할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알현실은 황제 외에 누구도 있지 않았다. 용건이 용건인 만큼 시종들을 내친 것이다.
황제는 여상하게 황좌에 앉아 습관처럼 제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늦는군. 내가 너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폐하.”
네르아는 자세를 낮춰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를 하고는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
“약은?”
황제는 용서를 구하는 그녀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그녀를 늦은 시간에 황궁으로 불러들인 용건을 꺼내 들었다.
“물론 챙겨 왔습니다.”
“좋아. 이리로 가지고 오도록.”
음흉한 미소를 한층 더 짙게 지으며 황제는 손을 뻗었고 네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황제에게 다가갔다.
오묘한 빛을 가진 푸른 액체.
이는 제국에 단 하나밖에 없으며 오직 특수한 제조법을 통해서만 만들어낸, 존귀한 황제의 피를 담고 있는 해독제였다.
“수고했다.”
황제의 손에 해독제를 넘기기 전 네르아가 멈칫거리며 해독제를 다시 품으로 가져갔다.
그런 그녀에 황제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폐하. 분명 이전에 약조를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저와 이안 님을….”
“분명 약조하지 않았느냐. 내 반드시 이뤄주겠다.”
그의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네르아가 황제의 손 위에 해독제를 올렸다. 만족스럽게 약병을 움켜쥔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너의 소원은 반드시 이뤄줄 터니 걱정 말고 이만 가봐라.”
“그럼….”
날렵하게 은신 주문을 외운 네르아가 그림자 속으로 포개 들어 사라졌다. 언제나 그랬듯 알현실에는 황제가 홀로 남았다.
“이제 슬슬 올 시간이군.”
곧 달이 차오를 터, 언제나 그랬듯 이안이 심장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며 자신을 찾아올 테지.
황제는 이안이 싫지 않았다.
그는 잘 훈련된 그의 개와 마찬가지니.
무엇보다 황제는 이안의 목줄을 쥐고 있지 않나.
황제가 제 손의 약병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만 이따금 그 붉게 빛나는 적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건… 체스펠을 연상시킨단 말이지.’
과거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황제는 입술을 비틀며 불쾌함이 담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참 대담한 자이기도 했지. 생각만 해도 말이야.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자이긴 했지만, 그때만큼은 처음으로 흥미로웠어….’
옛날을 떠올리며 오묘한 미소를 짓던 황제는 문득 깨달았다.
달은 이미 차올랐고 그 빛은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건만 여전히 그 자리에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