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17)

29화

밤을 빌려달라니?

그의 황당한 이야기에 리제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방을 빌려달라는 걸 잘못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리제아나의 대답에 이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혹스러운 눈을 했던 리제아나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장난치는 거로군.’

“그대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우리가 왜 계약을 맺었는지 기억하지?”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는 이젠 옛날이 되어버린 기억을 떠올렸다.

이전에 감옥에서 목의 문양이 붉게 빛나며 그가 가슴을 잡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는가.

일전에 넌지시 말한 저주와 관련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 분명한데 이 남자 참, 말을 당황스럽게 한다.

“밤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는… 이전에 ‘그 일’과 관련된 것인가요?”

“응, 저주가 발현되는 날이 머지않았거든.”

“하지만 제가 도움이 된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나요?”

그저 우연일 수도 있을 텐데.

저주의 발현이 잠잠해질 때쯤 우연히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의 말에 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주는 단 한 번도 그 발현이 스스로 잠잠해진 적 따위 없어. 항상… 황제가 주는 약이 필요했지.”

“약이요?”

리제아나의 물음에 이안은 더 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제 황제는 필요 없어. 당신이 있다면 말야.”

이안이 기쁘게 웃었지만 그의 눈만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드디어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저주를 덜미로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쥔 간사한 황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도 있었다.

‘그’ 황제에게서….

리제아나가 차갑게 식은 그의 눈을 알아채곤 미묘한 시선을 던지자 이안은 빠르게 표정을 지웠다. 그를 수상쩍게 바라보던 리제아나가 질문을 던졌다.

“저에게 다른 해가 가지 않는 것이 확실한가요?”

“내 마법을 걸고 맹세해.”

그 말에 거짓은 없는 듯했다. 리제아나는 그를 탐색하듯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이번엔 리제아나가 그를 돕는 것이 옳았다.

“계약은 계약이니 수락하지요.”

“좋아. 보름달이 뜨는 날 밤, 지하 감옥에서 봐.”

이안이 문득 그녀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손에 입맞춤했다.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보는 그녀에게 그가 속삭였다.

“고마움에 대한 내 성의.”

이안이 낮게 웃었다.

⚜ ⚜ ⚜

네르아는 손질하던 약재를 내던졌다.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할수록 정말 화가 솟구쳤다.

여유로운 얼굴로 자신을 비꼬기까지 하다니.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런 그녀에게 압도당한 네르아, 자신이었다.

“네, 이안이 말해준걸요.”

네르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의 이름이었다.

왜, 이안은 본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여자에게 이름을 허락했을까.

“델리사라고 했던가?”

이안이 데려온 여자에 대해 수소문하니 아비드 제국에서 귀족 영애라고 들었다.

백작가의 영애인 그녀는 아비드 제국 황제의 애인이라고 하던데….

네르아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가마솥 앞으로 다가갔다.

가마솥 안은 걸쭉한 액체가 푸른 빛의 묘한 김을 내뿜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냐. 겨우 망명권밖에 얻지 못한 여자가 앞으로 이안을 위해 뭘 할 수 있겠어?”

네르아는 솥 안의 액체를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둔 약재를 가져와 솥 안에 뿌렸다.

솥 안에서 일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네르아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네르아는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그대로 솥 안으로 떨어뜨렸다.

주문을 외우자 가마솥 위로 태양 문양이 새겨진 마법진이 떠올랐다.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네르아는 어렵지 않게 모두 마치고 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연구실이자 방 안에서 네르아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안은 결국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걸.”

⚜ ⚜ ⚜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리제아나는 자신의 손등을 괜히 매만졌다.

이전에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던 그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윽고 리제아나는 손등 부근이 홧홧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재빨리 손을 내렸다.

‘라이핀도 이따금 손등에 입을 맞췄지.’

하지만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는데.

손등을 쓸던 리제아나는 문득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에 대한 의문이 솟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주는 약…이라고 했지…. 텐젤의 개라고 불릴 만큼 황제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눈, 충신의 눈은 아니었어.’

리제아나는 빛나던 이안의 눈을 떠올렸다.

이안이 말한 대로 지하실에 내려오니 이미 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온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저주에 대해 숨기고 있으니,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그는 땀을 흘리며 벽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이안?!”

달이 차올랐다. 창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달이 이안의 빨간 눈동자에 스미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 뒤의 태양 문양이 화끈하게 욱신거렸다.

“윽.”

고통이 기지개를 피듯 천천히 몸을 가르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다리에 서서히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이렇게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다고? 리제아나는 당황스러웠다. 이안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제 잘난 맛에 살고, 당황하지도 않는 철두철미한 마탑주 아니었던가.

물론 리제아나 앞에서 이따금 얼빠진 표정을 짓긴 했지만.

“우리가 했던 계약 조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여기 있잖아요.”

“그래…. 내 곁에 있어 줘.”

어쨌든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리제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만 해줘. 그래 줄 거지?”

“네. 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람인 거 잘 아시잖아요. 당신에게서 목숨 건졌으니 이제 내 차례예요.”

리제아나의 믿음직스러운 말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웃음을 끝으로 이안은 풀썩 바닥으로 마치 누가 떠민 듯이 쓰러졌다.

달빛이 쓰러진 그를 감쌌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백발이 반짝였다. 신음을 흘리며 겨우 뜬 그의 적안이 어느 때보다 붉게 빛났다.

“으윽….”

눈썹을 한데 모아 찌푸린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씹으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안!”

리제아나는 빠르게 이안의 손목을 낚아챘다. 쓰러진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리제아나는 그를 살폈다.

“으윽….”

고통스럽다는 듯이 심장을 움켜잡은 이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알알이 맺혀 있었다. 대체 어떤 저주이기에 이리 고통스러워하는 거지.

분명 이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가 왜 이리 안쓰러울까.

리제아나는 입술을 짓씹고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맞잡은 이안의 손으로 고통으로 떠는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하….”

그가 힘겨운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그녀가 잡은 손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기운에 몸을 맡긴 그가 조용하게 그녀의 곁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래도 기절한 모양이었다.

⚜ ⚜ ⚜

“이안…! 이안!”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에 그는 몽롱하게 눈을 떴다.

그는 직감적으로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려다본 그의 몸은 어린아이처럼 작았다.

귀에 익은 그 목소리는 곁에 있던 리제아나의 것이 아닌, 남성의 것이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 고개를 돌려 올려다본 얼굴은 그의 기억 속에 묻힌 그 얼굴 그대로였다.

“곧 준비 마칩니다, 아버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나왔다. 그제야 그는 그가 보는 환각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불러보는 호칭이었다.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멋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기다리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아.”

“아버지는 걱정도 많으십니다. 폐하께선 항상 절 예뻐해 주시지 않습니까. 폐하께 예쁨 받는 아들과 함께 가는 것인데 어찌 눈살을 찌푸리십니까?”

선대 공작, 그러니까 어릴 적 이안의 앞에 선 체스펠 렌디 데벤시아 공작의 얼굴에는 근심이 겹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닌…. 아니다. 어서 준비하고 나오거라. 마차를 대기시켜둘 테니.”

그는 이안의 눈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한 채 먼저 화제를 돌려 방을 나갔다.

괴로운 꿈이었다. 힘이 없어 소중한 것을 그대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악몽이었다.

근래에는 꿈을 꾸지 않아 괜찮아진 줄만 알았는데, 하필 지금 다시 그 날의 환각을 보는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꿈속의 어린 이안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마쳤다. 이내 마차에 선대 공작을 마주하고 앉자 그제야 그가 출발 명령을 내렸다.

“출발하자, 황궁으로.”

출발 명령을 내리는 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멀어져만 가는 저택에 머물러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그날의 그가 무엇을 해야 했을까. 더 깊이 아버지의 의중을 따져 물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는 너무 어렸다. 그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의 이안이 할 수 있는 변명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내가 말이냐?”

“…불안해 보이십니다. 매우.”

어린 이안의 질문에 체스펠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말씀하세요, 아버지.”

“황궁에서 무슨 말을 듣던, 네가 무슨 행동을 하던….”

“….”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애써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며 체스펠은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네 탓이 아니다.”

‘…후회합니다. 아버지의 눈에 맺혔던 그 두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을.’

그의 눈에 자리 잡은 초조한 감정을 아버지는 애써 숨기며 자신의 아들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쾅.

체스펠의 쉰 목소리에 이안이 입을 뗀 순간, 마차가 멈추어 섰다.

화창하기만 하던 하늘이 우수수 부서지기 시작했고, 그의 귀로 이명이 가득 메웠다.

“아버지!”

뒤늦게 이안은 체스펠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마차 바닥이 갈라지고 이안은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의 비좁은 시야 사이로 여전히 걱정스러운 낯빛을 띠고 있는 체스펠이 보였고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안의 시야가 점멸되었다.

⚜ ⚜ ⚜

“이안! 이안!”

그대로 쓰러진 이후 이안이 미동조차 없자 당황한 리제아나는 재빠르게 그를 흔들며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은 리제아나의 몸집보다 몇 배나 더 컸기에, 그리고 황태자비로서 딱히 사람을 옮겨본 적 없는 그녀에게는 무리였다.

그가 미간을 구기더니 악몽을 꾸는 듯이 앓은 소리를 두어 번 내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 아버지….”

식은땀과 함께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던 리제아나의 손이 멈칫했다.

“으윽….”

이윽고 들려오는 그의 앓는 소리와 함께 이안이 눈을 떴다.

눈을 뜬 이안에 리제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괜찮은지 볼 심산이었다.

조금 쉰 목소리의 이안이 부스스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자 리제아나가 입을 뗐다.

“쓰러지셨어요.”

아버지를 향한 그의 애절한 외침이 이상하게 귀에 맴돌았다. 리제아나는 그에게 더 자세한 질문은 꺼내지 못한 채 점차 초점이 또렷해지는 그의 적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