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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17)

28화

마탑에 도착한 네르아는 조심스럽게 마탑의 복도를 걸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누군가와 마주쳐 봤자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이 뻔했다.

네르아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그러나 이내 복도에서 튀어나온 그림자에 네르아가 놀라 힉, 숨을 들이켰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하르힌이었다.

“네르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하르힌이 평소와 달리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라 움찔댔던 네르아가 그가 하르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냐 약골?”

네르아가 세모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네가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하르힌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비뚜름하게 서서 네르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색에 네르아는 결국 입을 뗐다.

“마법약에 쓸 약초를 미세리타와 함께 구했어. 물론 내가 더 빠르게 약초 재료를 모아서 먼저 도착한 거야. 됐어?”

“정말 그뿐이야?”

“그래! 이동 스크롤도 챙겨서 더 빨리 올 수 있었던 거고.”

네르아가 스크롤 종이를 흔들어 보이자 하르힌은 그제야 믿는 눈치였다. 네르아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마법의 약물을 몰래 사고팔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미리 변명거리를 준비해 둔 자신을 칭찬하며 네르아는 퉁명스럽게 하르힌을 보았다.

“여기서 나를 기다린 거야? 나도 너처럼 마탑에서 살아온 지 벌써 몇 년째라고. 어떻게 날 의심할 수가 있어?”

“단지 그것 때문에 기다린 거 아니야. 너도 이번에 수확제 연회에 초청받았어?”

“응, 이번에 처음으로 초대받았어. 하지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네르아는 고압적으로 팔짱을 끼며 입을 내밀고 대꾸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하르힌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네르아가 싫은 건 아니다. 남매처럼 티격태격하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 자라온 만큼 단지 그녀가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가까이에서 네르아와 이안을 지켜봐 온 하르힌이기에 그는 네르아의 감정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네르아는 마법사일 뿐이며 이안은 한 제국의 공작이었다.

그녀가 선을 넘은 감정으로, 이안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깨질 것이다.

또한 하르힌은 네르아의 가끔 욱하는 성질이 걱정스러웠다. 언젠가 그녀가 일을 쳐도 크게 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하르힌의 선에서 정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수확제 파트너 때문에 저하께 가려는 것이라면, 그만둬.”

“왜 네가 그런 걸 신경 쓰는 거야?”

“저하께서는….”

리제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이안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네르아가 리제아나에 대해 알아 봤자 마탑만 시끄러워질 뿐일 터였다.

“…그러니까.”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이안이나 리제아나에게 자칫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에잇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하르힌은 두 눈을 꾹 감고서 내뱉었다.

“너 나랑 수확제 같이 갈래?”

“수확제? 하르힌,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네르아의 주변으로 흉흉한 살기가 펼쳐졌다.

“하르힌, 넌 한 번도 수확제의 무도회에 참가해본 적 없다면서? 그런데 나에게 파트너 제의를 하는 이유가 뭐야?”

“그야….”

“그래 들어보니, 그 포로가 마탑에 머문다면서? 포로의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쁠 텐데 나와 수확제 갈 시간은 있어?”

하르힌은 보통 마탑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큰 무도회에 참가한 횟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니 네르아의 말에 하나도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뭐라 더는 대꾸할 수 없어 우물쭈물하던 찰나였다.

하르힌이 애써 침묵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네르아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하…. 난 몰라.”

그가 중얼거렸다.

“난… 할 만큼 한 거야.”

애절한 하르힌의 중얼거림이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 ⚜ ⚜

“그래 쉬어, 난 이만 나가 볼게.”

자신의 방이 위치한 3층으로 올라가던 네르아의 시선이 2층 끝쪽 방에 닿았다.

창문 사이로 비추는 노을 아래로 이안이 보였다.

“저하?”

네르아가 중얼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이안 또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를 마주한 이안이 눈썹을 모았다.

“네르아. 왔군.”

“네. 제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왔지?”

“미, 미세리타보다 일찍 재료를 구해서 더 빨리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따로 행동하는 일은 없도록 해. 마탑 소속의 마법사는 이제 몇 없으니 혹, 무슨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알겠나?”

이안은 그녀가 먼저 안부를 물을 것도 없이 짧은 인사와 함께 빠른 속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네르아가 실망 어린 눈을 했다.

2층 끝쪽 방의 문 사이로 문득 익숙한 얼굴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은….”

틀림없었다. 황궁에서 본 그 여자였다.

이미 대화를 마쳤는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는 이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무엇인가 느껴졌다.

다시 한번, 네르아의 촉이 발동했다.

리제아나를 사납게 바라보던 네르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밝고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하고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새 손님이시네?”

살갑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네르아를 마주한 리제아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일전에 텐젤의 황궁에서 만났던 그 마법사였다.

조용히 네르아를 훑어내린 리제아나는 우아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왜인지 이 여자, 자신에게 호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무슨 일이죠?”

“우리 구면이잖아요. 그쵸?”

어느새 재빠르게 다가온 네르아는 싱글싱글 밝게 웃었지만, 그녀의 눈빛을 못 알아볼 리제아나가 아니었다. 리제아나는 네르아를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리제아나의 당당한 시선에 일순 움찔한 네르아가 헛기침을 하고는 사람 좋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할까요?”

“저에게 무슨 이야기를 말이죠?”

“에이. 여자들끼리 친해지면 좋잖아요?”

마법사가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따로 있을 리가 없다. 리제아나는 단숨에 그녀가 자신을 그저 떠보기 위해 말을 걸어왔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리제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도발을 리제아나는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들어와요.”

리제아나는 우아한 몸짓으로 문을 열어 네르아를 맞이했다.

기품이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을 힐끗힐끗 살피던 네르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고마워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르아는 방에 들어서며 방긋 웃으며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곤 부담스러울 정도로 리제아나를 빤히 응시했다.

“텐젤은 지낼 만한가요?”

“네. 그럼요.”

“무섭지 않나요? 여긴 적국이잖아요?”

“무섭다뇨? 본국보다 이곳이 더 마음이 편한걸요.”

“흐음? 그런가요? 어떤 점에서요?”

무엇인가를 캐내고자 하는 속셈이 분명했다.

당연하게도 리제아나는 자신의 비밀을 그냥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곳은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주는 사람이요?”

“제가 있던 곳은 항상 본래 마음을 속인 채 말뿐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만.”

“….”

“네르아, 당신처럼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아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을 수 있네요.”

걱정하는 척 리제아나를 떠보는 그녀를 다분히 돌려서 말하는 것이었다. 네르아의 눈이 앙칼지게 치켜 올라갔다.

리제아나는 그저 우아하게 웃어 보이며 그녀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네르아는 속으로 조용히 이를 갈았다. 이 여자, 만만치 않은 여자임이 분명했다.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네, 이안이 말해주었는걸요.”

“이안?”

‘이안’이란 호칭에 네르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언제부터 그가 저 여자에게 호칭을 허락한 걸까.

초조함에 네르아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말이 없는 그녀에 리제아나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머 대화는 이 정도면 될까요?”

“하하하…. 사실 방금 여정에서 피곤한 상태거든요. 아무래도 이 이상의 대화는 미루어야겠네요.”

애써 웃음 지으며 네르아는 다음을 기약하며 밖으로 나갔다.

사라지는 네르아의 뒷모습을 보며 리제아나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감히 나를 떠보려 하다니. 아직 네르아라는 마법사는 그녀에게 백만 년은 일렀다.

⚜ ⚜ ⚜

방을 나선 네르아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그녀를 떠볼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네르아, 그녀가 당했다.

여유로운 태도의 리제아나를 떠올린 그녀는 더욱 사나운 얼굴을 했다.

“…그 여자, 뭔가 보통 신분의 사람 같지 않아.”

돌이켜 생각하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걸음걸이에 완벽한 절도와 예절이 배어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상대가 자극해도 흥분하지 않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우아하게 상대해오지 않던가.

네르아는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노을과 같은, 주황색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하나로 묶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물끄러미 닫힌 리제아나의 방문을 쳐다보며 네르아가 중얼거렸다.

“따로 조사가 필요할 듯하네. 저 사람. 뭔가 이상하게 기시감이 든단 말이지. 어디서… 텐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네르아가 눈을 빛냈다.

“어쨌든 전하 곁에 수상한 인물은 최대한 치워두는 게 좋으니까.”

뒷조사가 좋지 못한 방법이라는 것쯤은 알지만 이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행할 결심이 있었다.

그러니까 거슬리게 왜 눈에 띄어선.

네르아가 조소했다.

⚜ ⚜ ⚜

“앞으로 이틀 남았나.”

“보름달이 뜨는 날 말씀입니까?”

이안의 곁에서 서류 정리를 돕고 있던 하르힌이 물었다.

“그래. 곧 ‘그날’이다.”

하르힌은 곧바로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지닌 그 저주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하르힌은 보름달이 뜨는 날에 그가 그 저주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사실은 알았다.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아 이러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지 그에게 물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안은 말했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깊이 알수록 위험하니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낫다. 그러니 그저 명대로 자신의 곁에서 물러나 있어.’

제 주인에 대한 걱정이 앞섰지만 이안이 말해주지 않는 이유가 필시 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르힌은 매번 다짐했다.

이안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하르힌은 그만큼 그를 믿으니 애써 모른 척 그를 따르기로 했다.

“황궁에 미리 일러두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매번 ‘그날’이면 황궁에 가던 이안이 처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이틀 후에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생각이야.”

이안이 짐짓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늦은 밤, 방 안에서 책을 읽던 리제아나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리제아나는 방문자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리제아나는 읽던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들어오세요.”

리제아나의 허락에 문이 열렸다.

역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백발에 나른한 붉은 눈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리제아나는 남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오는 남자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늦은 밤에 찾아와서 미안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가볍게 그를 타박하는 말과 달리 응접실 탁자 앞의 의자로 리제아나가 우아하게 앉으며 문가에 선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계약, 기억하지?”

“네 기억해요. 당신이 필요할 때 내가 당신 곁에 있어 주기로 했죠.”

리제아나의 말에 이안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이자 흰 머리칼이 그의 이마로 흘러내렸다.

“그래. 그러니까, 당신의 밤을 좀 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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