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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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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군. 수확제는 넘기고 미세리타와 함께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는 리제아나가 바로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고 빠르게 뇌까렸다.

“무슨 일 있나요?”

“아니, 그저… 네르아가 돌아온 모양이군.”

혼자 중얼거리던 이안이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그를 빤히 바라보는 보랏빛 자수정 눈동자를 마주했다.

“네르아라면 일전에 그 마법사군요.”

리제아나는 이전에 황제 앞에서 만났던 활달한 여자를 떠올렸다. 황제 앞에서 광각초를 만들던 여자 마법사.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던 여자를 기억해낸 리제아나가 이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마법사가 일찍 온 게 다른 문제가 있나요?”

“문제라….”

문제라면 문제지. 이안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녀 방의 창문 너머를 건너보았다. 마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이안의 손바닥 안이었다.

근래 네르아의 행적을 생각하던 이안은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선 그를 바라보던 리제아나가 문득 물었다.

“오늘은 문양을 가리지 않았군요.”

그녀의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태양의 문양이 새겨진 저주의 표식을 가리기 위해 목덜미까지 머리를 길렀으나 머리칼로 온전히 문양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다름 아닌 붕대였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붕대로 목을 감싸고 그 위에 크라바트를 걸치는 것으로 가렸다.

“마탑 안이고. 이제 당신에게 숨길 것도 없잖아.”

“조심성이 없네요.”

“당연하지. 우린 계약관계잖아? 서로의 이익을 위해 비밀은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의 그럴듯한 말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리 거침없이 굴었구나, 저 남자.

“당신은 궁금하지도 않아? 나도 당신만큼이나 비밀이 많은 사람이거든.”

“글쎄요. 비밀은 보통 아는 만큼 감수해야 할 것이 많죠.”

리제아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눈을 보아하니 그 말은 진실인 것 같은데, 그럴수록 이안의 호기심은 더 커질 뿐이었다.

이 여자는, 그의 저주에 대해서도 깊게 알려고 들지 않으며, 문양에조차 관심이 없었다.

이안이 아는 귀족들이라면, 권력자의 약점을 잡고자 눈에 불을 켜고서 더 알아내려 전전긍긍할 터였다. 그를 통해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 저주가 다른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어쩌려고? 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은 너무 겁이 없어. 내가 ‘텐젤의 개’라 불리는 것을 알면서도 신전에서 내 앞을 가로막았지.”

“그것이 저주였군요.”

그 일 이후로 그에게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리제아나였다.

역시 그 문양과 관련이 있던 모양이었다. 한데 그것이 저주일 줄이야. 리제아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자 이안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고민하다 이내 입을 뗐다.

“그래 그 저주는….”

“괜찮아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지?”

“이안은 황궁에서 저를 도와주었고 계약까지 맺은 상태 아닙니까.”

“그래서?”

“또, 저를 시장에서 구해주었지요. 그러니 조금쯤은 당신을 믿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리제아나는 이안과의 기억들을 하나하나씩 천천히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도 직접 사과까지 하러 오시고. 그 자존심 높으신 분이.”

그녀가 웃었다. 그 찬란한 미소가 이안의 눈에 닿았다.

“….”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미소는 이안의 감정들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실은 그가 그녀를 찾은 이유는 사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하나 중요하게 말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리제아나. 아비드의 황제가 뒤바뀌었어.”

이안은 라이핀의 계승 소식을 힘겹게 토해냈다. 이와 동시에 리제아나의 얼굴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가 경악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아직 그가 황제가 되어선 안 되었다.

“지금 뭐라고… 아비드의 황제가 말입니까?!”

본능적으로 리제아나는 오한이 그녀의 몸을 덮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핀이 아비드의 황제가 되었다면 이제 그가 아비드 제국을 주무르는 것은 물론이며 이 텐젤 제국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어떤 수로 이렇게 빨리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황제로 군림하는 아비드 제국을 리제아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설마 혹, 아비드 황제가….”

“그래, 죽었다.”

“아비드 황제는 병들었지만, 아직 그리 일찍 세상을 뜰 리가….”

말을 잇던 리제아나는 잠자코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과 마주했다. 리제아나는 그의 눈빛을 금세 알아차렸다.

“혹시 당신도 라이핀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래.”

리제아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아비드의 황태자비로서 라이핀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이리 잔인한 사람이었던가?

이안은 그녀에게 한 차례 더 가까이 다가오려 했지만 리제아나는 완강히 그를 거절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정심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으나 이안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축객령에 이안은 조용히 그녀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 ⚜ ⚜

아비드의 황궁.

라이핀은 알려진 것처럼 간소하게 즉위식을 올렸다.

라이핀은 이제는 황태자궁이 아닌 본궁에 머물렀다.

황제의 화려한 집무실의 탁상에 앉아 라이핀은 거대한 창을 건너보았다.

크고 작은 황궁의 성들이 빼곡하게 창에 들어차 있었다.

라이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부족해….’

“리제아나….”

여전히 그녀에 대한 단서는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찾은 진주 머리핀조차 확실한 단서가 되지 못했다.

분명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라이핀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서랍을 열었다.

서랍 깊은 곳에서 화려한 보석들이 달린 보석함을 꺼내든 라이핀은 조심스레 그 안을 열었다. 그는 보관해두었던 머리핀을 손에 쥐어 보았다.

리제아나가 남기고 간, 그녀를 떠올리게 할 만한 물건이라곤 그 머리핀, 하나가 전부였다.

다시금 생각해보니 델리사를 부를 때처럼 그녀를 다정하게 부른 적도 없는 듯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곁에 있을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리제아나가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가슴이 답답해졌다.

문득 일라이자가 인기척을 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폐하, 델리사 영애가-”

“바쁘다.”

“하지만 문 앞에서 전하가 부르실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최근 들어 델리사가 집무실에 자신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라이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라이핀에게 고했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거절하려 했지만 델리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폐하! 라이! 이대로 절 영영 보지 않을 생각입니까?”

델리사의 분노가 찬 목소리에 라이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여보내라.”

라이핀의 허락에 문이 열리자마자 델리사는 바람처럼 빠르게 라이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씩씩대며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라이핀 앞으로 섰다.

“많이 바쁜가요? 제 얼굴조차 보지 못할 만큼?”

“제국의 황비이자 차기 황후가 사라진 중대한 안건이니 그럴 수밖에.”

“차기…. 차기 황후라뇨? 폐하!”

“델리사. 리제아나는 필로렌치아 공작 가문의 여식이야. 알다시피 필로렌치아 가문은 황실에 충성하는 가문이지 않나? 그런 그녀가 차기 황후임은 당연하지. 안 그런가?”

라이핀이 델리사가 또다시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막아섰다.

그의 말에 델리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내 앞에서는 이름 대신 황비라는 호칭밖에 쓰지 않았으면서. 언제부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지?’

델리사는 차마 입 밖으로 하지 못할 말을 애써 삭히며 분노와 함께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달라진 황제의 태도에 다른 궁인들이 수군대는 것을 델리사 또한 모르지 않았다.

황제의 애정이 식자 그들은 델리사가 지나갈 때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델리사, 짐에게 아직 남은 서류들이 많아.”

“….”

“그러니까.”

“….”

“나가주었으면 하는데.”

무표정하게 냉담한 어조로 답하는 그의 모습이 델리사에게는 그저 충격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입술을 짓씹던 델리사가 번쩍 고개를 들고는 그에게 몸을 붙어왔다.

“진심이십니까, 폐하?”

그녀가 이전에 네르아에게서 구매한 향수의 향이 더욱 퍼지도록 그녀는 자신의 머리칼을 넘기며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델리사…. 윽.”

라이핀은 멍하니 다가오는 델리사를 응시하며 이름을 뇌까리다가 이내 진한 향에 몸서리쳤다.

언젠가부터 두통에 시달리던 라이핀은 델리사를 찾지 않은 후로 그 고통이 점차 옅어지던 차였다.

한데 델리사가 다가오자 의문의 향과 함께 두통이 찾아왔다. 라이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폐하…?”

“마지막… 경고다. 나가라, 델리사. 내가 찾을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여봐라!”

이내 라이핀의 명을 받고 달려온 일라이자가 델리사를 끌어냈다. 그녀는 악을 썼지만 결국 근처의 호위병들의 손에 이끌려 집무실 밖으로 쫓겨났다.

손에 쥔 보석 핀을 내려다보며 라이핀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황비라는 막중한 직책을 떠맡게 된 그녀에게 줬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심약해 보이는 그녀였으나 황비라는 큰 지위를 견디기 위해 노력해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황태자비에 올랐을 때, 황태자비의 자격이 없다며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모진 환경에서도 그녀는 싫은 소리 하나 없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였다.

예전에 일라이자와 시장에 나가 감찰하던 도중의 일이었다. 라이핀은 우연히 장신구 노점 앞에 섰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자 그는 이미 자연스럽게 핀을 들고 선 채였다.

“어머 손님, 아내분에게 주실 건가요?”

라이핀의 인기척에 주인장이 쪼르르 달려와 그에게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는 짙은 회색 로브를 쓰고 있었기에 당연히 사람들이 그를 알아볼 리 없다. 그럼에도 그 대신 나서려던 일라이자를 막아선 라이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막 결혼한 신혼이지.”

“어머, 이 보석핀이 잘 어울리시겠네요! 새신부는 이런 자상한 남편을 얻으셔서 좋겠네요.”

“…나도 그녀가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군.”

상념에서 깨어난 라이핀이 창문을 흘깃 바라보았다.

제 마음과 달리 맑고 푸른 하늘이 보석핀을 사던 그때와 같아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

언제부터 틀어진 거지.

라이핀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으나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그가 왜 그녀를 그리 대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무엇보다 과거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라이핀은 결국 제 마음을 깨닫곤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리되었구나.

라이핀은 보석 핀을 힘있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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