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비록 라이핀이 황제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실질적인 권한은 가지지 못한 채로 그저 황제의 일을 대행하는 것에 그쳤다.
모두가 그가 차기 황제인 양 굴었어도 틈틈이 그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것을 라이핀은 알았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잡념을 밀어 넣은 라이핀은 느긋이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하며 규칙적으로 구두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간 몇 번이고 생각해왔었다.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이다. 더는 늦추어서는 안 되는 그 일을.
“전하, 필로렌치아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시종이 다가와 그에게 은밀하게 전달했다.
“들어오라 해라.”
라이핀은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그를 안으로 들였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손님은 다름 아닌 로버트 데 필로렌치아 공작이었다.
“제국의 미래, 태양을 뵙습니다.”
평소라면 짧은 인사와 함께 본론에 들어갔을 필로렌치아 공작은 특별히 오늘 인사하는 데에도 정성을 들였다.
이는 꽤나 라이핀으로서는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알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가지고 왔나?”
라이핀의 진중한 한마디에 공작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정교한 무늬가 장식된 암갈색 작은 상자로 공작의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래서 내가 공작을 좋아하지. 말을 하지 않아도 공작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
“영광입니다. 오롯이 전하를 위한 일입니다만 이리 알아주시니 송고합니다.”
공작의 말에 라이핀 역시 한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오늘처럼 달빛이 온전히 검은 구름에 가려진, 빛 한 점 없는 밤을 기다렸다.
“그럼 슬슬 움직이지.”
새벽 네 시. 황궁이 어둠에 물든 시각.
공작과 라이핀은 발걸음을 죽이며 황태자궁을 나와 본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들리지 않습니다.”
“만일을 위해 일라이자는 두고 왔으니 구태여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공작.”
일라이자도 이들의 계획에 관여한 이 중 하나였다.
다만 그는 함께 나서지 않았다. 언제나 라이핀의 곁을 지키던 그였으니 그는 황태자 궁에 머물러 라이핀이 궁에 머무는 양 행동하기로 했다.
“나의 아버지는.”
라이핀은 본궁으로 향하는 동안 새벽의 차디찬 공기가 느껴졌다.
이제 가을이구나. 사방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흔한 바람 소리조차 없었다.
“참으로 혹독하신 분이셨지.”
달빛마저 숨 죽인 듯한 새벽. 적막을 깬 건 라이핀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런 주제에 몸은 또 약해서.”
라이핀이 서늘하게 뇌까렸다.
마침내, 본궁의 집무실을 지나 지하실을 향하는 숨겨진 계단을 내려가자 이내 얼마 안 가 방이 하나 나왔다.
“오랜만에 뵙는군.”
문을 열자 지하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한 노인이 있었다.
“아버지, 접니다.”
“….”
“굳이 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듣기만 하세요.”
라이핀은 제 아버지의 주름 진 손을 마주 잡았으나 눈만은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안 좋은 기억이 그를 덮은 탓이었다.
라페지온 아비드 베네딕트 황제는 라이핀의 친부로서 주었어야 할 정을 주지 않았다.
엄한 가르침으로 어머니가 없는 그를 몰아붙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황자로서 수치스럽기만한 벌로 그를 다스렸다.
그래도 어린 나이의 라이핀은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여 아버지가 그를 탓할수록 스스로를 더 몰아세웠다.
황위를 이어받을 그이니 아버지가 엄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아버지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황제로서의 덕목, 황제로서의 위엄 그리고 황제가 지녀야 할 결단력까지도 말이죠.”
“….”
주름진 눈이 한차례 떨렸다.
“그래서 저도 그 가르침을 감히 한번 실천해볼까 합니다.”
“….”
“제 어머니가 아프셨을 때조차 당신은 무심했죠. 아프고 병든 황후는 제국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요.”
황후 헤이즈 아비드 베네딕트는 든든한 라이핀의 뒷배였지만 몸이 약했다. 이내 황후가 병이 나 약해지자 황제는 미련 없이 그녀에게서 관심을 돌렸다.
그녀의 병색이 나날이 짙어져도 그는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다 쓴 도구를 버리는 것처럼 황후를 찾지 않았다.
황제의 관심이 떠난 황후의 말로는 권력의 가장 끝에서 밀려나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라이핀은 황제에 대한 증오심을 갈고 닦았다.
황제에게 내색하지 않고 그는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 맹수는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마찬가지로 기다렸다. 나이든 그가 똑같이 아파서, 한없이 허약해지기를.
“흐어….”
황제가 앓는 소리를 기력 없이 겨우 내뱉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라이핀이 잡고 있는 손을 있는 힘껏 맞잡았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런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헛수고였다.
“아버지. 감사했습니다.”
라이핀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다른 한쪽 손을 공작에게 내밀며 턱짓했다.
공작은 그의 무언의 신호를 알아듣고는 한껏 고개를 깊게 숙였다. 한때는 황제이자 그가 모셨던 주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상자를 넘겨주었다.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그러도록.”
이내 필로렌치아 공작이 방을 나가고 라이핀은 황제이자 아버지였던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한때 제국을 빛냈던 태양이자, 주인은 이토록 무력하게 떨어졌다.
상자 안에는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손수건이 아니었다.
광각초로 만든 약물을 뿌린, 허약한 노인에게는 꽤나 치명적인 손수건이었다.
“잘 지켜봐 주세요, 아버지.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내 나라, 나의 행복, 전부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손수건을 들고 라페리온 황제이자 한때의 제 아버지인 그의 코와 입을 막았다. 몸부림은 생각보다 적었다.
노인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고 미동도 없이 온전히 눈을 감았다.
아비드의 황제가 죽었다. 이제 새로운 황제가 등장할 차례였다.
지하실을 나온 라이핀은 황궁 복도의 거대한 창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밤하늘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달빛 하나 없는 어둠이 완연히 그를 감쌌다.
라이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별 하나 없는 밤하늘과 잠자코 눈을 맞추었다.
⚜ ⚜ ⚜
“라페리온 황제, 아니 전 황제가 본궁에서 숨을 거두었다며?”
라페리온 황제의 시신은 아침마다 그의 방을 청소하던 한 시녀로 인해 밝혀졌다.
거대한 침실 한가운데에서 바로 눕혀진 채 눈을 감은 황제의 주검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이내 모두가 달려왔다.
그렇게 라페리온 황제의 죽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대륙 곳곳으로 퍼졌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으로 그가 정말로 병상에서 사경을 헤맸다는 소문은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그 늙은이,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했건만.”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비드 제국을 떠돈 다음 날 아침.
텐젤의 제국에조차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귀족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아비드 제국 황제의 죽음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이안이 불참했기 때문에 그들은 보다 거리낌 없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에 황제 즉위식을 조용히 진행한다더군.”
베히티혼 후작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수염을 매만지며 심드렁한 태도를 내보냈다. 어느 제국이든 황제의 즉위식은 대부분 화려하게 진행됐으나 조용히 올린다는 점에서 의심스러웠다.
“애초에 즉위식을 간소하게 올리다니! 필시 그래야만 하는 사정이 있을 겁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베히티혼 후작.”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이 얘기는 당장 저하께 알려드려야겠군.’
하르힌은 헛기침을 반복하다 이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으로 향하던 그에게 문득 말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더군.”
“크림슨 후작? 웬일로 늦었군.”
그가 나가려는 찰나 황급히 들어온 한 귀족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시내에서 벌어진 이야기 들었나…? 글쎄 한바탕 큰 소동이, 그것도 수도 중앙 시장에서 있었다고 하더군.”
⚜ ⚜ ⚜
“피곤하네요. 쉬고 싶습니다.”
다분히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단호하게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리제아나에 이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그녀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약 상자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잘 쉬고.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말을 끝으로 이안은 리제아나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힌 후 이안은 거칠게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가족 이야기에 이리 예민할 줄이야. 몰랐군.”
홀로 복도에 남은 이안이 눈치 없이 꺼낸 질문을 한 자신을 탓했다. 가벼운 질문으로 꺼낸 이야기가 그녀의 상처를 건들 줄 몰랐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온 이안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한숨을 내쉬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숨,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심기가 언짢으신 겁니까? 이전에 회의 취소 건으로 제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압니까? 그리 계시면 제가 옆에서 투덜대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하르힌은 잔뜩 입술을 부풀리고 나타나 얼음을 넣은 위스키 잔을 내밀었다. 이안의 기분이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저 붉은 눈이 풀리면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단 소리지.’
그리고 하르힌은 이안 없이 귀족 회의에서 고생한 자신을 위해 위스키를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 저하 오늘따라 술맛이 좋은데요?”
하르힌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한 모금 짧게 들이마신 후, 소파에 앉았다.
이윽고 하르힌도 다시 채운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곤 건너편에 앉았다.
“그래서 본론이 뭔데.”
귀신같이 하르힌이 이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그에 하르힌이 움찔 몸을 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어떻게 아시고. 이안이 마른세수를 하곤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눈썹을 모았다.
“하…. 저하 그게…. 그게….”
“뜸 들이지 말고.”
“하이고. 저하.”
하르힌이 이안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며 결국을 입을 열었다.
“그게…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저하. 나쁜 소식이랑… 더 나쁜 소식이요.”
위스키 잔을 든 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뭇대던 하르힌이 고개를 들었다. 두 개의 나쁜 소식 중, 어느 소식을 먼저 보고해야 할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래도 피곤한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