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리제아나의 방 안으로 환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떠오른 마법진 위로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제아나는 팔짱을 낀 채로 사나운 얼굴을 한 채 그를 맞았다.
“기다렸어?”
“또 마음대로 순간이동 시키셨군요. 제가 분명….”
“말하고 순간이동 하라… 라고 했지. 그래서 했잖아? 순간이동 한다고?”
“이봐요. 이안.”
리제아나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난 말이야.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릴 대로 휘둘려 왔어. 이젠 당신까지 나를 쥐고 흔들겠다고? 웃기지 마.”
더는 이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리제아나는 충분히 이전의 생에서 그래왔고 덕분에 목숨까지 뺏겼다.
그녀를 위하는 척 그녀를 뒤에서 이용하던 라이핀에게,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에게.
리제아나는 이안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경고했다.
“다신 내 허락 없이 나를 함부로 이동시키지 마. 그랬다면 계약이고 뭐고 당신의 약점을 쥐고 개처럼 물고 늘어질 테니까.”
“….”
리제아나는 텐젤 제국에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 그가 아무리 대공이라 한들 자신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없다.
리제아나의 기세에 이안은 뒤로 물러났다.
‘흠…. 가시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더 곤두세우곤 하지.’
한 걸음 물러나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려준 덕일까. 이내 분노로 번뜩이던 그녀의 눈이 가라앉고 이전의 우아하고 침착한 리제아나로 돌아왔다. 리제아나가 그를 바라보며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이전의 과거가 생각나 울컥 화를 낸 것만 같아 리제아나는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으나 함부로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를 뿐이었다.
문득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모양새를 하더니 이안이 약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공간에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미안, 내가 사과할 테니 이제 치료해도 될까?”
왜 떠나지 않고 서 있나 했더니 이 남자, 아직 그녀에게 볼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잔뜩 화를 쏟아냈건만 아무렇지 않은 기색의 남자를 리제아나는 허탈하게 올려보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텐젤의 ‘개’였다.
⚜ ⚜ ⚜
생채기는 겉보기에 얕은 상처인 것 같았지만 막상 이안이 약을 바르자 생각보다 따끔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그녀가 살던 방식이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몸에 베인 습관은 쉬이 변화할 수 없었다.
“아파?”
이안이 묽은 연고를 손가락으로 뜨더니 상처에 문질렀다.
“이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됐어. 내가 할게.”
리제아나가 드레스를 도로 덮기 위해 손을 내저었으나 이번만큼은 이안도 쉬이 비켜주지 않았다. 그의 어조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란 심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제.”
“은근슬쩍 이름 줄이지 마세요.”
한번 리제라고 불렀다고 두 번 리제를 허락해줄 그녀가 아니었다.
능청스럽게 그녀의 애칭을 본래 불렀던 양 부르는 이안에 리제아나는 눈썹을 매섭게 들어 올렸다.
“이런… 그래. 리제아나.”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 이안은 능글맞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녀의 지적에 빠르게 태도를 바꾸는 이안이었다.
다분히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리제아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모른 척했다.
문득 리제아나는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계약 관계에 묶여서일까?
계약을 신뢰로 더 견고히 하기 위해서?
거리를 점점 좁혀오는 이 남자의 의도를 리제아나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리제아나.”
“말씀하세요.”
리제아나가 저를 경계한 다 한들 아직 물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아까 말이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어 운을 떼었다.
아까라면… 그가 무엇을 묻을지 짐작되어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꽃이 어떤 꽃인지, 그 효능을 알고서 행동한 건가?”
“…아뇨 도박이었어요.”
“도박?”
예상치 못한 리제아나의 물음에 이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도박’은 이때껏 그가 보아온 그녀의 성경에 영 맞지 않는 단어였다.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박을 할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반쯤은 어림짐작해본 거예요. 그 꽃을 필로렌치아 공작의 집무실에서 본 적 있거든요.”
간략한 이야기에 이안은 눈썹을 모았다.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한 눈치였다. 리제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광각초는 제가 황태자비가 되기 전부터 필로렌치아 가문에서 온갖 독초들을 연구해 만든 거예요. 광각초는 그 위력이 대단해요. 다른 독초들은 상대도 되지 않죠. 그런데 구태여 다른 독초들을 연구해야 할 이유는 없을 거예요. 그 꽃을 마주한 순간 생각했어요. 분명 광각초와 관련된 꽃일 게 틀림없다고.”
“도박이란 말은….”
“그 꽃이 광각초의 효과를 극대화할지 또는 억눌러줄지 저로선 알 수 없었으니까요.”
리제아나가 말을 마치자 그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굉장히 운이 좋았다.
“…스치듯이 봤다고 했나? 기억력이 대단하군.”
“필로렌치아 공작의 가르침은 혹독했거든요.”
다만 리제아나는 그런 이안의 의문을 자연스럽게 넘기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이안이 억누르고 있던 궁금증을 자극하기만 했다.
“필로렌치아 가문이 벌인 일에 대해선 많이 들었지만 가문 내 이야기는 들은 게 없군. 가르침?”
“필로렌치아 공작 아래서 딸로 살아오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히기 마련이죠. 살아남기 위해서는요.”
“답지 않네.”
“무엇이?”
그의 물음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예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이상하군. 아버지를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니.”
“아시다시피 전 아비드 제국에서의 모든 것을 놓고 이곳에 왔어요. 가문에 정이 있을 리 없죠.”
질문 유도에도 리제아나는 꿋꿋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여 이안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곤 약을 다 바른 무릎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말 그대로야. 쉽지 않은 시절을 보냈겠어.”
“각자의 가정사는 비밀로 간직하죠. 귀족들이 행복한 가정 꾸리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가문의 손익을 묻고 따져 결혼하는 것이 다반사잖아요?”
“필로렌치아 가문이 그렇다는 이야기인가?”
“…오늘따라 질문이 많으시군요.”
리제아나의 어조가 한차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어느 정도 그녀에 대한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듯했다.
아비드 제국에 복수를 한다는 그녀의 말에 짐작했으나 오래전부터 이어온 경멸, 그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손 줘, 아까 보니까 손에도 상처가 났던데.”
이안이 손을 내밀었지만 리제아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어요. 먼저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직 상처가 남아 있어.”
“호의는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호의라 할 수 있죠, 이안.”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동자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이안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처음 리제아나를 봤을 때와 어쩐지 비슷한 것 같았다.
“아직 하실 말씀이 더 남아 있으신가요?”
단호한 리제아나의 음성이 무겁게 방에 내려앉았다.
⚜ ⚜ ⚜
아비드의 황궁, 라이핀은 초조하게 넓은 집무실을 오갔다.
벌써 리제아나가 납치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진전은 없었다.
라이핀은 황태자로서 여러 특권을 넘겨받았으나 여전히 황제로서의 권한은 없었다. 황실의 주요 기사단을 움직일 힘이 아직 그는 없었으며 황실의 재무를 직접 꾸릴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황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광각초 문제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리제아나를 찾을 기사단과 함께 앞으로 광각초 사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황실의 모든 권한을 가져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기사단장 베일은 언제나 눈치를 보았다. 그도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고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다.
그런데도 그런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도저히 제 주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주는 압박감은 엄청났으므로.
따뜻해 보이던 그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큰일 났군.’
베일은 본능적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더욱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그의 얼어붙은 갈색 눈동자에 돌던 따뜻한 빛은 감히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대체 기사단장은 하는 게 뭐지?”
오랜 정적 끝에 라이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단조로웠으나 어조는 그렇지 않았다. 힐난하는 조로 라이핀이 구겨진 미간을 검지로 누르며 말했다.
“저희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비전하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누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이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목격자도 못 찾고 있지 않나. 리제아나의 호위 기사는 그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베일은 침묵으로 답을 이어나갔다.
그날, 리제아나의 호위 기사는 리제아나의 명령에 따라 신전의 초입까지만 그녀를 호위하였다. 시녀와 함께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으로 리제아나는 사라졌다.
목격자도, 일을 저지른 사람도, 그 누구도 사건의 실마리조차 알지 못했다.
“됐다. 나가.”
그는 베일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것으로 일단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그의 배려에 황송해하며 베일은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마침내 집무실에 홀로 남은 라이핀은 나지막한 한숨을 깊이 내뱉었다.
‘황태자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라이핀은 무언가를 결심하듯 주먹을 움켜쥐었다.